AD

도보여행 [작은여행기] 16. 이 여행을 통해 나는 무엇을 얻으려 했을까?

Broadcaster 리르리안
2021-11-11 16:29:02 42 0 0

[본 여행기는 개인적인 관점에서 편한 작성을 위해 반말로 작성되었습니다.]

[내용의 시점이 3주 가량 된 이야기라, 사실이 약간 왜곡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


2021년 10월 24일, 일요일.

어제 너무 많이 걸었나보다.

피로가 채 회복되지 않은 듯한 느낌.

하지만,

오늘만 좀 고생하자.

오늘은 여수에 들어가는 날이니까.

숙소를 나와서 방송을 켜고,

한 마디 말을 꺼내본다.

목소리가 많이 잠겼다.

순천을 빠져나가기 전에 커피라도 한 잔 해야 하려나...

3bef2756d277161a8c3f980eb0a01305.png

<며칠 만에 보는 지친 눈.>


----------------------------------------------


어제 무리를 해서 순천시내에 들어왔으니,

오늘은 여수시청 근처까지 간다.

여수엑스포역으로 가는 거라고 생각하기에는

약간은 돌아가는 느낌의 경로지만, 

이렇게 해도 내일 10~11시 정도면 마칠 수 있다.

애초에 이걸 생각해서 이렇게 왔으니,

오늘 여수시청에서 푹 쉬기로 생각하고

길을 나선다.

61503b9cfbdd2c17f24a61782eebf485.png

<30.6km. 이 정도면 해볼 만 하다.>


---------------------------------------


오늘도 아침부터 느낌이 쎄하다.

분명 화장실을 갔다 왔는데...

꼭 

어쩔 수 없이 순천역을 들렸다 가기로 한다.

그리고 들른 김에 커피도 한 잔 샀다.

24dfec7434a6d63a0ee59e02fcec9bf5.png

<요즘에는 항상 아침에 겉옷을 입는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졌기 때문이다.>


--------------------------


오늘은 천변 산책길을 따라 초반에 움직인다.

원래대로였다면 순천동천을 따라 순천만습지 사이로 이동했겠지만,

순천역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해룡천 천변길을 따라 걷게 되었다.

그런데...

산책로가

통제당했다.

01108235fa3a1af747ab6a2df336a4e7.png

<이용에 불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네, 어쩔 수 없죠... 제가 모르고 간 걸요.>


아파트 단지 사이를 지나

순천만 습지로 들어서니

흔한 시골길의 모습이 되어버린다.

출발한 지 단 한 시간인데,

아까 보던 도시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끝없는 콘크리트 길과

그 옆으로 난 산책길을 걷는다.

이런 길도, 오늘만 지나면 걸을 일이 없겠지.

마지막이기에,

조금 더 눈에 담아두기로 한다.

bf0617c9aa80bc911493e455ed7e5789.png

<길에다 말려놓으려고 펴놓은 곡물을 보니 시골이 맞구나 싶다.>

497f9cb3eec985f2d3ad997394fb66b7.jpg

<이쯤 내려오니까 추수를 안한 논보다 추수가 끝난 논이 훨씬 더 많이 보인다.>


--------------------------------


작은 산(?) 을 넘어 더 한적한 시골길로 접어든다.

이 작은 이차선도로 위에는 차들이 단 한 대도 없다.

저 멀리 보이는 고가 위 국도에는

수많은 차들이 서로 경쟁하듯 굉음을 내며 달리고 있는데,

그거에 비하면 여기는 그야말로 한적함 그 자체다.

e94b4019745f0df4c1bd632e294e8c2d.jpg

<평화롭다. 벌레가 꼬이는 것만 빼면.>


지도를 보고,

저수지를 끼고 돌면 길이 나온다고 한다.

그렇게 길을 갔는데

어느 새 길이 막혀있다.

뭐지...

천천히 지도를 다시 살펴본다.

GPS는 시골이라 역시 맛이 갔다.

주변을 둘러보고, 로드뷰와 지도를 비교해본다.

아,

지도에는 표시 안된 길이

로드뷰에는 선명하게 나온다.

그리고 느낀다.

또 잘못 왔구나.

마지막까지 길을 잃다니.

이 여행에서 배운 게 없는 걸까...

b8027de05bb72971cbe1a896aa7bd2eb.png

<신기하다고 해야하나, 저수지 한 쪽은 이렇게 수면과 도로가 닿게 되어있었다. 그래서 물이 불면 통행금지.>


-------------------------------------------------


한가로운 시골길과,

산길을 넘는다.

국도를 사이에 두고,

굴다리를 넘나든다.

국도는 터널로 들어가버리고,

나는 옆으로 난 산길을 오르내린다.

어느 새 콘크리트 길은 흙길로 변하고,

흙길은 다시 아스팔트길과 이어진다.

그렇게 길을 내려오니,

나는 어느 새 여수에 들어오게 되었다.

7fb3b018c9b277eee3ede02e0d9ebcc9.png

<여수 산수리 지석묘군. 행정구역상으로는 명확하게 여수에 들어왔다. 물론 시내까지는 20km는 가야 한다.>


-------------------------------------


시골의 공동화현상은 어쩔 수 없는 건지,

아니면 원래 그랬어야 했는데 이제서야 된 건지,

지나가다 보니

폐교가 된 시골분교가 나타났다.

1c8a37d224a2c5b0cf30d9c70bb22f00.png

<율촌초등학교 산수분교. 21년 3월 1일 부로 폐교가 되었다고 써 있다. 본교까지의 거리는 단 3km.>


좀 찾아보니 2016년 기준 3학급, 12명의 학생이 있었다고 한다. 

아마 저 학생들이 모두 졸업하고 난 뒤에 자연스럽게 폐교가 된 것으로 보인다.


놀라운 것은 분교가 있어야 할 정도로

예전에는 학생이 많았다는 것,

그리고 학생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요즘에

차로 10분도 채 안되는 거리에 본교가 있음에도

분교가 운영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학생 수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분교를 유지하려는

교육청과 학부모의 의지가 아니라면

효율성을 중시하는 요즘 세태에 바로 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아직 남아있는 분교도 비슷한 절차를 밟게 되겠지.

이제 분교라는 이름은 시대의 흐름 속에

교과서로만 접해볼 수 있는 명칭이 될 지도 모르겠다.


-------------------------------------


길을 쭉 가는데

누가 질문을 한다.

"이거 끝나면 뭐하실 건가요?"

뭘 할까?

아무것도 할 생각이 없는데.

처음에는 여러가지 생각이 있었다.

집에서 떠나고 싶다,

여행을 하고 싶다.

마음을 정리하고 싶다.

살을 빼고 싶다.

하지만 이런 큰 목표와 동기들은

하루하루 여행을 갈 수록 점점 희미해져 가고

지금은 그냥 하루의 목표에 맞춰서

걸어갈 뿐이다.

아무것도 배우고 느낀 건 없이,

그냥 그렇게 걸어갈 뿐이다.

난 이 여행을 통해 뭘 배웠을까?

아니,

뭘 배우려고 이걸 시작했던가?

뭔가 하고 싶어서 이걸 시작했었나?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아진다.

9772234dbdf3ef43a2beb7c774bea981.jpg

<그냥, 걸어가다 보니 걸어가는 게 좋아졌을 뿐이다.>


---------------------------------------


어느 새 17번 국도를 따라 걷게 된다.

그리고

이 길을 쭉 걷다 보면,

여수공항이 나온다.

ad225e102d30f7ef98af415251d55b72.jpg

<수풀 뒤로 공항 건물과 활주로가 보인다. 전봇대의 작은 화살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 길은 놀랍게도 남파랑길이다.>


잠시 버스정류장에서 휴식을 취한다.

어제 너무 무리를 한 건 아닐까,

발바닥이 생각보다 많이 아프다.

산행의 여파인지 종아리쪽의 근육도 말썽이다.

파스라도 잔뜩 뿌려주는게 답이지만,

그걸 위해 양말까지 벗었다가 다시 신는 것도 귀찮다.

차라리 10분이라도 더 쉬고 나아가는 게 낫다.

진짜 걷지 못할 정도로 아파오면,

그때 뿌려도 늦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다.


----------------------------------


여수공항 옆으로 난 길.

로드뷰에서는 그냥 농기계 통행로라고만 봤는데,

알고 보니 남파랑길이다.

역시, 걷기 좋은 길은

이미 다 알고 해 놓은 듯 하다.


길을 따라 쭉 지나가는데,

굴다리 밑에서 어떤 아저씨가 말을 건다.

"이야, 여기 남파랑길인데, 길 따라 쭉 가시는 겁니까?"

"예... 사실 여기 남파랑길인 줄 몰랐어요...흐흐"

그리고 이어지는 그 대화.

이제는 출발지보다 목적지가 가까워져서,

고생이 많으시다는 말보다는

와 고생 많이 하셨네라는 말이 더 많아진다.

공항공사 직원이신데, 순찰하다가 마주친 거라고 하셨다.

여러가지 이야기를 좀 나누고,

사진도 한 장 찍혔다.

물도 주시겠다고 하는 걸 한사코 거절하고

갈 길이 바쁘다며 인사를 드렸다.

사실...

뭐라도 받으면 고마운데

그러기에는 지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385affb784a96027d5d62dffac3b805c.png

<항상 말하지만, 이런 대화는 항상 기분을 좋게 한다.>


----------------------------------


공항 주변을 빠져나와,

길을 계속 걷는다.

끝이 없어 보이는 농로.

남파랑길을 따라 가다 분기점에서 갈라져 지름길로 향한다.

그늘 하나 없는, 끝이 보이지 않는 듯한 농로.

물론 끝이 있다는 걸 이제는 알기에,

한 걸음 분명하게 내딛으며 앞으로 나간다.

77a4be60b2077e0c4e941b2184ff9902.png

<그늘 하나 없는 끝없는 논길. 이 풍경도 이게 정말 마지막이지.>


그러다 지쳐

반쯤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는다.

55de5317fc185d8158c0ed894e3a0888.png

<배낭 풀기 귀찮으니 배낭을 등에 지고 그대로 누워버린다. 솔직히 편하긴 해.>


배낭에 기댄 채 누워서

하늘을 바라본다.

이게,

내가 여행을 하고 싶었던 이유가 아닐까?

자유.

행복.

그리고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그냥 이런 걸 보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19ef63e4f9d6193f5c1286e60b1c71da.jpg

<필터를 먹여서 더 파래졌지만, 내가 본 하늘은 진짜 이런 느낌이었다.>


쉴 때는 하늘이 좋아서,

걸을 때는 걷는 게 좋아서,

밥을 먹을 때는 맛있는 게 먹고 싶어서,

잘 때는 새로운 곳에서 자고 싶어서,

시골에서는 풍경이 좋아서,

도시에서는 불빛이 좋아서.

그냥 그 때 그 것이 하고 싶어서.

그게 좋아서.

그냥.


저 그냥이라는 한 마디 안에

이번 여행의 모든 의미를 담을 수 있었다.


----------------------------------


한참 시골길을 걸어가다 보니,

어느 새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9587d88af0c75d985713436addd17b2b.png

<덕양역(폐역) 근처. 여기는 철길이 사라지고 조성된 "여수 옛 철길공원" 이다.>


산책로가 나오니

오르막과 내리막도 사라지고

그냥 평지를 쭉 걷는 느낌.,

옛 철길공원이라는 이름에 맞게

철도가 다니기 편하게 평평한 땅이었다.

주변에 산이 나오든, 도로가 나오든, 마을이 나오든

아랑곳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평평하게 길이 이어졌다.


그런데 내 발은

이렇게 편한 길을 둔 채로

점점 더 큰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결국 또 아파서 벤치도 아닌 그냥 땅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7f82a831482e1d13d181a93d15c70a28.png

<여기까지 왔는데 파스를 뿌리기도 아깝다.>


양말을 갈아 신고,

신발을 다시 매준다.

내일이면 끝이기에, 가능한 한 모든 노력을 쏟아야 한다.


그리고 출발한 지 5분,

왜 그러는지 발가락에 또 물집이 잡히려고 한다.

이제는 여행도 끝나가는데 물집이라고?

아직 완전히 잡힌 것도 아니고, 발가락이 쓸린 느낌만 나서

급하게 밴드를 감아주고 출발한다.

9a8ef4531e7dc6dbec6f72ab4a9ca3e9.png

<그래도 이번엔 벤치가 있었다.>


---------------------------------


원래 경로였으면,

옛 철길공원을 따라 쭉 가면서 

여수엑수포역으로 향하는 것이었는데,

여수시청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중간에 공원을 빠져나왔다.

45d85f64c71fe1c278538d43d3715466.png

<여기가 철길이었다는 흔적은 오래 된 토목의 흔적과 공원 위 다리 난간의 철조망에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진짜" 도시에 도착했다.

5c77665ecd3669c79500990c48abc568.png

<6차선과 4차선의 교차로, 각 도로마다 꽉 찬 차량, 그리고 끝없이 이어져 있는 불 켜진 건물들. 도시다.>


여기까지 오니,

여수에 다 왔다는 생각이 들면서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기쁨도 아니고,

감동도 아니고,

그렇다고 허무함도 아니고.

뭔지 모르겠다.

아직 내가 원하는 그 곳에 도착한 게 아니라서 그런가?


천천히 길을 즐기며 여수시청까지 걸었다.

이어폰 팁이 사라져서, 다이소에서 2천원자리 이어팁도 샀다.

담양 다이소에는 없던 그 4극-3극 젠더도 있다.

도시 한복판이라 다이소도 크고, 물건도 많다.

저렴한 카페도 많다.

너무 좋다.

이게 도시인가?

2bb4094ac77d33c94709de09b5fc1bfb.jpg

 <당연하지만, 해가 지기 전에 도착했다.>


-----------------------------------


마지막 숙소.

오늘 저녁은 아쉽게도 회가 아니다.

여수인데 회를 왜 안 먹냐 하겠지만,

돈이 없다.

대신 검색하면 나오는 시청 근처 유명 중국집에 갔다.

요리부가 맛있다는데, 돈이 없어서 식사만 한다.

8409b19ff175a88774b365cc84949040.jpg

<물론 차돌짬뽕이므로 소주를 마셔준다. 이 날은 내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한 병을 거의 다 마셨다.>


배도 부르고,

오늘도 잠시 밖을 걸어준다.

마지막이라고 배가 부른데도 자연스럽게 편의점으로 향했다.

내일이면 이 자유도 끝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이라도 더 맛있는 걸 먹고 싶었나보다.


그래 놓고 산 건 

빵이랑 제로콜라었다...

007c7bce8e35d799c8bfe3e9c78b7fc3.jpg

<요즘 띠부띠부씰은 쿠키런이 먹었다. 포켓몬은 이제 안 나오나?>


-------------------------------------


결과

예상 : 30.6km

실제 : 35.16km

뭐지...

b07fa7c01166a44df42dacf9ef69e908.png


------------------------------------

17편 이어보기

https://tgd.kr/s/rillyan_sj/59403943

후원댓글 0
댓글 0개  
이전 댓글 더 보기
TWIP 잔액: 확인중
공지일정잡담사연썰거리도보여행유튜브
0
도보여행
[그리고 도보여행] 14.
Broadcaster 리르리안
06-01
0
도보여행
[그리고 도보여행] 13.
Broadcaster 리르리안
05-26
0
도보여행
[그리고 도보여행] 12.
Broadcaster 리르리안
05-17
0
도보여행
[그리고 도보여행] 11.
Broadcaster 리르리안
05-17
0
도보여행
[그리고 도보여행] 10.
Broadcaster 리르리안
05-08
0
도보여행
[그리고 도보여행] 09.
Broadcaster 리르리안
04-29
0
도보여행
[그리고 도보여행] 08.
Broadcaster 리르리안
04-19
0
도보여행
[그리고 도보여행] 07.
Broadcaster 리르리안
04-19
0
도보여행
[그리고 도보여행] 06.
Broadcaster 리르리안
03-29
0
도보여행
[그리고 도보여행] 05.
Broadcaster 리르리안
03-22
1
도보여행
[그리고 도보여행] 04.
Broadcaster 리르리안
03-15
0
도보여행
[그리고 도보여행] 03.
Broadcaster 리르리안
03-01
0
도보여행
[그리고 도보여행] 02.
Broadcaster 리르리안
02-22
0
도보여행
[그리고 도보여행] 01.
Broadcaster 리르리안
02-16
0
11-08
0
11-06
0
11-04
인기글 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