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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여행 [작은여행기] 8. 35km보다 더 힘든 20km

Broadcaster 리르리안
2021-11-04 16:25:08 36 0 0

[본 여행기는 개인적인 관점에서 편한 작성을 위해 반말로 작성되었습니다.]

[내용의 시점이 3주 가량 된 이야기라, 사실이 약간 왜곡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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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16일, 토요일.


아침 7시에 기상. 일주일만이다.

어제 밀린 작업(?)도 해 주고

휴식도 충분히 해 주었다.

오늘은 편한 날이니까.

거기에 원래 오늘 하기로 했던 군산 관광도

어제 몇 개는 끝내지 않았는가.

이 정도면 더 늦게 출발해도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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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작업"은 저 PC로 다시보기를 하이라이트로 저장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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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목적지는 비응항.

정확하게는 새만금수산시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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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km도 되지 않는 짧은 길.



사실, 오늘의 문제는

토요일이어서 숙소가 비싸다는 점이었다.

비응항 안에 있는 숙소들은

도저히 내가 감당하기 힘든 비용의 숙소만 있었다.

전날 PC로 이리저리 모텔을 찾아보면서,

방법을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시점과 종점만 맞추자"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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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가 애매할 땐 이 방법을 아주 추천한다. 왕복 3천원으로 최소 만원은 싼 모텔을 구할 수 있다.>


비응항 앞에서, 버스로 되돌아가 숙소에서 자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버스로 이동해서

새만금방조제 앞에서 출발.

사실, "군" 지역이라면 배차간격을 세밀하게 따져야 해서 힘들었을 수도 있지만,

여긴 그래도 군산"시"가 아니던가.


그렇게 목적지와 숙소를 정하고

아침으로 컵라면을 먹은 뒤

어제 먹던 치킨을 주섬주섬 배낭에 넣은 다음

오늘은 무려 9시에 숙소를 나선다.

예약한 숙소가 체크인이 오후 6시고, 20km는 천천히 가도 7시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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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부터 쭉 생각해오던 바가 있었다.

18박 19일... 너무 길지 않을까?

조금 더 고생해서라도, 날짜를 줄여야 하지 않을까?

마침 PC가 있으니 지도를 좀 펴서 경로를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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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나주로 해서 돌아가는 방법을 바꾸기로 한다. 순창-곡성-구례-순천. 산 지형이지만 하루를 줄일 수 있다.> 

열심히 주요 지점(시내/읍내/역세권)을 찍어보며 날짜를 세 보니,

원래 계획이었던 광주를 거치는 것보다

고창-곡성-구례로 가는 길이 

산 지형을 지나가는 것만 빼면 하루를 줄일 수 있는 길이었다.

흠...

이제 슬슬 적응되기도 했고,

어쨌든 하루를 줄일 수 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경로를 바꾸기로 한다.

구체적인 경로는 새만금을 건넌 뒤에 정해도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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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는 예정대로 관광을

하기 전에 먼저 다이소를 들리기로 한다.

며칠 전에 부러진 삼각대를 대신해서

삼각대 하나를 사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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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원. 다이소 치고는 꽤 튼튼하고, 다리도 늘어나고, 모든 상하단 연결부가 1/4인치 나사여서 기존 촬영 장비와 호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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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이렇게 길고 아름답게 연결해서 다닐 수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된다면 그건 며칠 뒤에 바뀐다.>


삼각대를 사고 나와서 셀카봉에 연결하고,

관광객 모드가 되어

군산 시내를 둘러보았다.


계획도시에만 살아본 나로서는 

이런 오래된 시내의 풍경은 낯설다.

아기자기 한 도로변의 오래 된 듯한 건물들과

그 분위기를 맞추려고 하는 많은 신식 건물들의 조화.

그리고 그 사이에 스며들어 이제는 잘 보이지 않는 슬픈 역사.

이 도시는 그렇게 옛날의 화려함과 상처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군산에 오면 가보고 싶었던 곳 중 몇 군데를

천천히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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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느낌의 간판을 많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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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맑아져서, 초원사진관을 다시 들렸다. 어제랑은 다르면서도 같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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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쓰가옥"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신흥동 일본식 가옥. 내부가 익숙하다면 영화에서 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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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길을 나서기로 한다.

현재시각은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

커피를 파는 곳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해매다

다시 초원사진관으로 돌아왔지만,

오늘은 이동거리도 그렇게 길지 않을 것이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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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비싸지만 예상보다는 상당히 싸서 기분이 좋았다. 양도 좋고.>


오늘은 밴드를 안 붙이고 출발했기 때문에,

혹시라도 물집이 다시 잡히면 어떻게 할까 하는

불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며칠 동안 계속 밴드 4개씩 붙이고 아웅다웅 싸우며 가던 발들 덕분에

신발이 늘어났는지 발들이 편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오늘은 적당한 시간에 잘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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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비상.

또 화장실이 급하다.

어쩔 수 없이 지도를 펴고,

혹시라도 화장실이 있을만한 곳을 찾아본다.

다행히도,

아파트 상가건물이 4km 앞에 있었다.

잠겨있을 수도 있지만,

이 정도는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면서 해결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점점 힘이 풀리는 느낌을 가지고

겨우겨우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다.

10분,

20분,

30분,


어느새 1시간.

...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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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에 들어갈 때까지 화면을 끄는 걸 깜빡했다. 다행히도 이성이 돌아와서 바로 껐다.>


정신없이 일을 보고 나오니,

웬지 허전하다.

잠시 편의점 앞에서 쉬기로 한다.

한 무리의 초등학생 친구들이

주말 라이딩을 즐기고 온 건지

다들 자전거를 하나씩 끌고 온다.

한 해 한 해 점점 나이를 먹어가는 게 느껴진다.

초등학생을 보면 초등학교 시절이, 고등학생을 보면 고등학교 시절이 생각난다.

몇 년 전에 "고등학교 졸업한 지 10년이 넘었네." 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먹었지만,

이젠 "초등학교 졸업한 지 20년" 이라고 말해야 하는 나이가 되어가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초등학교 때 기억이 별로 없다.

아니, 일부러 잊어버린 척 하고 있다.

다들 그렇지만, 안 좋은 기억은 그 충격으로, 혹은 일부러라도

기억하지 않게 되고

그 자리를 좋은 기억들로 왜곡하여 채우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여 "추억"이라는 이름이 되어

우리의 과거를 좋은 시절로만 느끼게 하지.

저 친구들도 지금의 기억을

20년 뒤에는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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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에 가린 뒤로 초등학생 친구가 "Zero Two Dance"를 추고 있었다. 얘, 아쉽지만 여긴 보는 사람이 없는 방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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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항이 있다 보니,

그리고 군산 쪽 새만금도 산업단지로 개발되고 있다 보니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오늘 경로는 상당 부분을 공업지대와 함께 한다.

끝없는 공장들의 향연.

그렇게 되니, 아무리 인도가 있어도

온갖 잡풀들이 갈라진 도보 사이로 튀어나와

각자의 질긴 인생을 자랑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람이 다니지 않아 망가진 인도는

차라리 차도 갓길로 다니는 게 더 나을 정도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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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걷는 길의 건너편에는 공장, 공장, 공장. 오늘 20km 중 10km는 이런 풍경만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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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있는 땅에서 자기 주장을 하러 나온 수많은 풀들. 이 정도는 그래도 지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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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개발 이전에는 농어촌 마을이었을까? 왼쪽에는 무너진 건물들이 한가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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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아까 상가에서 처리를 하고 나왔는데

또 화장실이 생각난다.

오늘따라 유난히 화장실이 계속 급하다.

"작은 것"이지만, 빈도가 잦으니 스트레스를 받는다.

예보대로 비가 온 뒤에 기온이 뚝 떨어져서

그리고 바닷가라 바람이 많이 불어서

그리고 종일 잔뜩 낀 구름 때문에

오늘 나지 않은 땀방울들이 모두 방광에 모여서

내보내달라고 시위를 하나보다.

끊임없이 참고

앓는 소리도 내고

얼굴도 찡그려가며

이따금씩 쏙 들어가는 타이밍에 맞춰

어떻게든 속도를 내본다.

혹시라도 가는 길에 화장실이 나오길 기도하면서

쭉 나아간다.


"하... 어쩔 수 없네요...

저기 앞에 철길이거든요?

저기 넘어가면 아~무 것도 없으니까

여기 횡단보도 건너서 풀숲..."

체념을 하고 담벼락을 슥 도니

나타나는 주유소

그리고 화장실 문.

"어, 잠깐만..."

앞에 마침 직원분인지 사장님인지 모를 아저씨 한 분이

주유를 하고 있다.

"저기... 사장님 죄송한데 화장실 한 번만 써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가...가..감사합니다!"

오늘은 그래도 운은 좋은 날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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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급한 정도. 두 시간을 이 표정으로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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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걸어간다.

....

....

갑자기 열이 받기 시작한다.

당시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발에 차이는 풀떼기들 때문에 짜증이 났던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영상을 보니

왜 짜증났는지 이해는 간다.

날은 계속 먹구름이 낀 상태

갈수록 바다와 가까워지며 바람이 계속 불어오고

앞에 보이는 건 계속 똑같은 공장, 공장, 공장.

길 위에는 세단, 트럭, 트럭, SUV, 트럭, SUV. 사람은 나뿐이고

버스정류장은 의자 없는 간이정류장이라 쉴 공간이 없어서 땅바닥에서 쉬고

가방에는 평소보다 줄어들지 않는 물병에 먹다 남은 치킨을 그대로 싸와 더 무거운 상태고

거기에 유난히 계속 찾게 되는 화장실까지.

그 상태에서 풀들이 씨앗을 신발에, 바지에 흩뿌리고

거기에 가시와 덩굴이 내 발목을 잡기까지.

거리만 20km지 나머지는 그냥 최악의 날보다도 더 최악의 날이었다.

아산까지 가던 그 폭우를 걷던 날보다 

오늘이 더 짜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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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공단 건너편 "마을" 사람들을 위해 칸막이가 있는 정류장이 있었다. 문제는 바람은 못 피한다는 것.>


갑자기 진짜 포기하고

집에 가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군산 정도면

기차역도 있고 고속터미널도 있으니까

집에는 편하게 갈 수 있잖아?

점점 멘탈이 바스라지는 느낌이었다.

시간은 3시가 넘어가는데

아직도 새만금이라는 글자는 단 하나도 보이지 않으니

이게 내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가늠조차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때 다시 생각이 난다.

"그러려니"

...

가자.

그냥 가자.

뭐, 어떻게든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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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정리된 도로가 나를 반겨주니, 안 갈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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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저찌 새만금에 가까워지고 있다.

새만금개발청.

새만금개발공사.

새만금산업단지 안내 간판.

표지판에는 새만금수산시장과 새만금방조제.

여기서부터 5km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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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개발공사와 새만금개발청 건물.>


사람이 없는 길을 쭉 걷다 보니,

응원을 하러 온 사람도 있고,

한국의 풍경이 궁금한 외국인도 들어와서 말을 걸어준다.

35km보다 더 힘든 20km를 걷고 있어서 그런지,

저렇게 와서 말 걸어주는 사람이 더 고마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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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텔이랑 이것저것 상점들이 모여있는 지역. 여기에 숙소가 있지만 나는 비응항을 찍고 돌아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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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걷기를 또 한 시간,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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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두 이름, 새만금과 비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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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끝은 여기다. 새만금수산시장 앞.>


수산시장 앞에서 방송을 끄고,

버스정류장으로 간다.

타야 할 버스는 지도 어플로 찾았지만, 

내일 제 시간에 나오려면 오늘 들어가서 시간표를 좀 찾아봐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정류장에 들어서니

내 생각보다 자세한 버스 정보에 놀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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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거점 별 시간이 나와있다. 그리고 신빙성도 있다.>


내가 탈 버스를 기다리다 보니,

군산 버스는, 적어도 비응항 같은 관광지에서는

저 시간표에 적힌 대로 출발한다는 것이었다.

일찍 도착하면 도착한 대로 시간을 기다렸다가 출발.

내가 탈 버스가 생각보다 늦게 온 듯 했는데, 그럼에도 정시에 온 것이었다.

내일은 이 시간표만 지켜서 나가면

시간 맞춰서 버스를 타고 출발할 수 있을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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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를 타고, 내가 묵을 모텔이 있는 곳으로 간다.

버스는 내가 걸어왔던 길을 반대로 가고 있었다.

창 밖으로 내가 걸어온 길을 이렇게 보고 있으니,

이보다 더 허무한 게 또 없는 것 같다.

내가 고생해서 1시간 가까이 걸어온 이 길을

버스는 단 5분만에 쌩 지나가버렸다.


나중에 집에 갈때는 어떤 느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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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버스를 타고 와서 숙소에 도착하니 딱 체크인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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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예상 : 19.7km

실제 : 23.3km

화장실 때문에 좀 돈 거리고 있고, 비응항 근처에서도 사진을 찍는다고 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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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

내가 생각한 것보다

비응항은 더 컸고, 더 화려했다.e4ed691ac3124469da94fcd090c3399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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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편 이어보기

https://tgd.kr/s/rillyan_sj/59186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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