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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킹 상식! 설탕 그 달달하고도 빛나는 녀석 - 3부

Moderator 김화궁
2021-02-07 09:22:12 882 10 6

안녕하세요 설탕수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돌아온 부갤주 김화궁입니다

1~2부는 설탕과 감미료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버터, 바닐라 편에서도 그러했듯이 오늘 3부수업은 심화편입니다

설탕에 대해서 달달하게 찐하게 알아봅시다!




1부 - 설탕이란?  <==== 1부 링크

2부 - 설탕? 감미료? <=== 2부 링크

3부 - 설탕 심화편





설탕의 역사도 버터만큼이나 상당히 탄탄한데요

설탕의 원료가 되는 사탕수수 같은 작물은 이미 기원전부터 재배되고 있었습니다 

최초의 지역은 동남아에서 재배를 시작했고 서로간의 교류와 침략이 일어나면서 작물들이 타 지역에서도 재배되기 시작했는데요

동남아를 시작으로 인도 -> 중국 -> 중동지방 -> 아메리카와 유럽 등지로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기원전에는 설탕 자체를 추출하는 것이 아닌 작물들을 잘게 잘라 씹어서 단맛을 느끼거나

사탕수수를 압착해서 즙을 짜내어 사탕수수액을 먹는 정도였죠 

(비슷한 작물인 사탕무에서 설탕을 추출하는건 좀 더 뒤의 이야기입니다 역사가 짧아요)



[ 승우아빠님 유튜브 - 설탕은 사드세요 제발 ]


그러다 기원전 인도에서 사탕수수액에서 설탕 알갱이를 추출하는 법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지금의 정제당이 아닌 당밀이 포함된 검은색의 비정제당 상태였습니다  ( 2부 오키나와 흑설탕 참조 )

그렇게 인도 내부에서만 설탕 제조법이 돌고돌며 점점 연구를 통해 더 나은 품질의 설탕들을 만들어갔는데요

중간중간 교류와 침략을 거치며 인도에서 설탕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서양에도 알려지게 됩니다

당시의 서양사람들은 인도에서 만들어진 설탕을 가리켜 돌꿀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요 

단순히 사탕수수액을 끓여서 말리고 굳힌것이기에 상당히 단단했지만 단맛은 꿀만큼 나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시간이 흘러 교류를 통해 중국이나 페르시아 등 여러국가에 사탕수수와 제조법이 유입되었고

그 중 페르시아가 엄청난 정복전쟁을 벌이며 세계 여기저기에 사탕수수를 뿌려놓게 됩니다 (좋은건가 나쁜건가..)

그러면서 페르시아의 정복지 중 하나였던 이집트는 본인들의 농업기술과 당시 굉장히 높은 수준이였던 화학적 지식들을 통해

작물의 재배법부터 설탕의 결정화, 정제 등등 설탕 제조기술발전에 큰 기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재배법과 기술들은 정복전쟁의 바톤을 넘겨받은 아랍인들에게 의해 드디어 유럽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 아랍인의 스페인 정복을 발단으로 특히나 십자군 전쟁같은 굵직한 사건들이 전파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하네요 )


사탕수수를 넘겨받은 유럽인들은 이거 돈이 되겠다! 싶었는지 사탕수수의 재배와 설탕 제조법을 열심히 배우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마침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좋은 지역이였던 지중해는 15세기까지 유럽전역에 설탕을 공급하는 지역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이 등장하면서 설탕의 역사가 한 번 크게 흔들리게 되는데요 

바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입니다.. (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자 & 토착 원주민 학살자 )



[ 중세시대 설탕 제작법 ]  => 많은 사탕수수액을 끓이고 끓여 농축시킨 후 압착한 다음 굳혀서 덩어리를 깨어먹는 방식


콜럼버스가 사탕수수를 아메리카로 들여가며 초반에는 부진했으나 점차 재배가 수월한 지역들을 찾아내며

더 많은 설탕이 공급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해도 설탕은 굉장한 사치품목이였는데요

위의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설탕 약간을 생산하기 위해선 엄청난 양의 사탕수수가 필요했고

또한 재배나 제조과정에서 인력이 엄청나게 들어갔기에 결코 싼 가격이 아니였는데요

그런데 양초 사용을 위해 밀랍을  생산하던  달달한 꿀을 주로 생산하던 수도원들이 

16세기경 마틴 루터에 의한 수도원들이 종교 개혁을 맞이하며 그 수가 급격히 줄어들게 됩니다

꿀의 생산이 줄며 사람들은 대체할 단맛을 찾게 되었고 그렇게 설탕 사업이 급작스럽게 호황을 맞이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 호황은 다른 누구에게는 비극의 시작이기도 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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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경 노예 삼각무역 사진 ] 


설탕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부족한 노동력을 채워야했고 초반에는 본토의 흉악범이나 정치사범들을 잡아들여 충당했으나

계속해서 늘어만 가는 수요는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설탕 생산자들은 노동력을 충당할 방법을 찾던 중

아프리카로 눈을 돌렸고 아무 죄없는 그 곳 사람들을 잡아들이며 검은 화물이라 불리던 흑인 노예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노동력을 충당하고 원재료를 생산해 유럽으로 제품을 생산해 판매한 돈으로 다시 아프리카의 노예들을 사들이는

끔찍한 무역이 계속되면서 일부 국가들과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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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무 아니고 사탕무입니다 김치만들어 드시면 안됩니다 ] 


그 사람들은 사탕수수 하나로만 설탕을 생산하니 자연파괴는 물론이고 끔찍한 인신매매가 계속되고 있다

이 악순환을 끊어낼 방법은 다른 작물에서 설탕을 뽑아낼 방법을 찾아야한다  라는 생각을 했고

18세기경 잠깐 스치듯 지나갔던 마르크그라프라는 한 연구자의 발표에 주목하게 됩니다

[ 무에서도 설탕을 뽑아낼 수 있습니다! 사탕수수가 아닌 사탕무라구요!  무야호! ]

( 참고로 저 연구가 나오기전까지는 사탕무는 그냥 약으로 쓰이거나 대부분 가축의 사료로 취급되었습니다 )


그렇게 프러시아의 왕 프레드리히 4세가 그 연구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며 토지와 자금등 여러모로 엄청난 지원을 해주었고

연구는 드디어 결실을 맺게되어 사탕무 설탕이 본격적으로 생산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생산에 비해 널리 퍼지지 못하고 아직 기술적으로 보완할 점이 많이 남아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와중 유럽에 많은 양의 설탕을 공급하던 영국이 프랑스와 마찰을 빚고 곧 전쟁이 일어나며 유럽과의 무역을 단절했는데요

프랑스를 필두로한 유럽연합의 주인공이였던 나폴레옹은 어떻게든 설탕의 수요를 맞춰야했기에 

사탕무 설탕에 대해 적극적인 지원을 펼쳤고 그렇게 유럽에 사탕무 설탕을 널리 퍼트리며 새로운 막을 열게 됩니다





[ 설탕 심화편을 마치며 ] 


설탕 3부작이 끝났습니다 재밌게 읽으셨는지요

댓글로 궁금하신점을 달아주신다면 저도 열심히 조사해서 글 작성해보겠습니다

이 시리즈 시작하면서 스트레스가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 심지어 시켜서 한것도 아니도 본인이 시작함 )

그래도 새로 알아가는것도 배우는것도 엄청 많고 특히나 여러분들이 재밌게 보고있습니다 하는 그 한마디가 참 기쁘네요

허술한 글 읽어주시느라 늘 감사합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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