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이불문예] 6번

Broadcaster 세인님
2017-05-14 10:43:28 645 0 0

꽃은 피어도 봄은 내 것이 아니다.

어느 3월, 제대 이후 새 학년을 맞이한 내 심정은 복잡했다. 등록금은 장학금으로 해결했지만, 기숙사비, 교재비, 실습비 등을 해결해야하다 보니 1주일에 3일은 뼛가루를 뒤집어쓰고. 피 묻은 도마를 씻어가며 정육점에서 보냈다. ‘졸업만 하자.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그게 나의 목표였었다.


그리고 너를 만났다.

‘애들 들어오는 거 봐서 뭐하려고?, 안 갈거다.’


‘가자~ 너 어차피 애들하고 같이 과제하고 훈련 들어가려면 안면도 터 놔야하는데. 고집피우지 말고, 얼른!’

친구의 말에 고집을 꺾고 결국 신입생 입학식에 따라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보았다.


자기 몸집만한 가방 몇 개를 바닥에 놓고 두리번거리는 그 아이를 보면 누구든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지만, 나는 눈길과 함께 손이 먼저 나갔다.

‘너 우리 과 1학년 맞니? 저쪽에 짐 놔두는 곳 있으니까 그거만 매고 와, 저기 둬도 누가 훔쳐가지 않으니 걱정은 말고’


당황하며 따라오던 너의 모습, 너의 짐을 들며 앞서가던 그 짧은 통로를 걷는 몇 걸음 동안 태어나 처음으로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누군가에게 오롯이 빠진다는 신비한 경험을 처음 하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때부터 너의 주위를 알듯, 모를 듯 맴돌기 시작했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 참석하면, 한 번쯤은 네 모습을 더 보았고. 다른 후배들 연락처는 비상연락망이면 충분하다면서도 너의 번호만큼은 유일한 여학생의 번호로 저장해 두는 그 정성만큼.


‘너 다른 애들 볼 때랑 저 애 볼 때랑 표정이 완전히 다른 건 아냐? 너 이런 적 여태 없었잖아? 학교 다니면서 여자친구 한 번 없었던 놈이, 소개시켜준다 해도 거절하던 놈이 무슨 일이래?’

‘나도 나를 모르겠다. 어쩌겠니, 눈이 먼저 가는 걸 내가 막을 수는 없잖아?’


처음에는 장난기 담긴 웃음을 보내며 말하던 친구마저 신기하게 쳐다 볼 만큼. 그 만큼 너에게 빠졌었고. 네가 나를 보고 웃는 모습 또한 좋았다.

‘선배는 노란 색이 잘 어울려요’ 라는 너의 말에 친구에게 미친놈이란 이야기 까지 들으며 노란색 옷에, 신발, 모자까지 맞춰 입은 내 모습을 보고 한참을 웃던 너의 모습을 바라보며 즐거웠고.

살면서 처음으로 누군가의 답장을 기다리며 전화기의 배터리를 떨어뜨리지 않게 신경 쓴 것도 네가 처음이었다.


‘내가 너 많이 좋아하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해주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남들보다 모자라지 않게 할게.’

라는 고백을 꺼내게 한 것도. 너의 당황해 하는 거절의 말을 듣고 나서

‘아니다 네가 미안할 필요는 없지, 내가 괜한 말을 했나보다. 어차피 난 학교에 자주 나오지 않으니까 못 들은 걸로 하고 부담 갖지 마라. 미안하다.’


라고 쓰리게 돌아서야하는 감정을 느끼게 했던 것도 네가 처음이었다.

여태껏 살면서 무서운 게 없었던 내게 그 날 유독 네가 거절과 함께 보내는 시린 눈빛은 정말로 두려웠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너는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졌고. 나는 가끔 너희의 모습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다가 졸업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전 다른 후배에게 네가 그 사람과 이별해서 많이 울고 힘들어 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너무 아팠다. 내가 아팠던 만큼 너는 행복해야하는데, 어쩌다 그랬니.

삶의 바닥만 보며 고개 숙인 채 앞으로 가던 내가 처음 용기 내서 고개를 들어 길 옆을 보았을 때, 너라는 꽃이 피어 있었고. 나는 네가 가진 아름다움이 나를 향해 웃는 것만 같은 착각에 잠시나마 행복했다.

비록 그 아름다운 향기와 예쁜 웃음이 다른 사람을 위한 것임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겨울만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내 삶에 있어 처음으로 봄이란 것을 잠시나마 알게 해 준 너에게 너무나 고마웠다. 내겐 봄은 타인의 이야기지만, 너의 봄은 아름다운 이야기 이길 바래. 그러니 많이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꼭 행복했으면 좋겠어.



후원댓글 0
댓글 0개  
이전 댓글 더 보기
TWIP 잔액: 확인중
▲윗글 7번 세인님
▼아랫글 5번 세인님
[자유&잡담][공지&일정][정보&TIP][사연&후기][클립박제][팬아트&선물][스포츠][이벤트][이불문예]
0
[이불문예]
19번
Broadcaster 세인님
05-14
0
[이불문예]
18번
Broadcaster 세인님
05-14
1
[이불문예]
17번
Broadcaster 세인님
05-14
0
[이불문예]
16번
Broadcaster 세인님
05-14
0
[이불문예]
15번
Broadcaster 세인님
05-14
0
[이불문예]
14번
Broadcaster 세인님
05-14
0
[이불문예]
13번
Broadcaster 세인님
05-14
1
[이불문예]
12번
Broadcaster 세인님
05-14
0
[이불문예]
11번
Broadcaster 세인님
05-14
0
[이불문예]
10번
Broadcaster 세인님
05-14
1
[이불문예]
9번
Broadcaster 세인님
05-14
2
[이불문예]
8번
Broadcaster 세인님
05-14
0
[이불문예]
7번
Broadcaster 세인님
05-14
»
[이불문예]
6번
Broadcaster 세인님
05-14
0
[이불문예]
5번
Broadcaster 세인님
05-14
0
[이불문예]
4번
Broadcaster 세인님
05-14
0
[이불문예]
3번
Broadcaster 세인님
05-14
0
[이불문예]
2번
Broadcaster 세인님
05-14
0
[이불문예]
1번
Broadcaster 세인님
05-14
인기글 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