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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입니당 내맘일세 글

내맘일세
2020-05-06 19:50:12 165 0 0

오늘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에게 건넨 마지막 말은 ‘우직하게 자라라’였다. 산들바람이 불든, 태풍이 몰아붙이든 묵묵하게 자라는 남산의 소나무가 되라 하셨다. 그 말을 듣고선 난 할아버지의 마른 손을 꼬옥 붙잡고 ‘당연하죠’라고 말했다. 숨소리가 옅어질수록 서로 맞잡은 손은 힘을 잃어갔다. 난 마지막으로 받는 외조부의 온기를 느끼며 조심히 고갤 숙일 수밖에 없었다.

어렸을 때 날 키워준 건 외조부모였다. 매일 회의니 컨펌이니 바쁘던 어머니와 평생 우정을 일 순위로 여겨 온 아버지에게 딸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홀몸인 친조부에게 날 맡기긴 죄송하니 외조부모에게 부탁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할아버진 딱딱하고 기둥 같은 사람이었다. 아끼던 사위가 도망갔을 때도,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했을 때도 흔들리거나 뽑히지 않고 언제나 굳건히 자기 자릴 지켰다. 그런 할아버지는 내성적이고 울음이 많은 나에게 단단해지는 법을 가르치곤 했다. ‘떳떳하다면 고갤 들어라’, ‘잘못한 게 아니면 울지마라’ 할아버지가 회초릴 들고 내게 말할 때마다 냉정함과 매정함에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속상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틀렸다는 걸 깨닫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그건 바로 목침이었다.

할아버진 매일 밤 목침을 베고 주무셨다. 매끈한 라텍스나 푹신한 솜 대신 목침을 사용하는 이유는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선대의 유품이며 호흡기 질환 완화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몰랐던 내겐 놀이감일 뿐이었다. 하루는 때리면 통통 소리가 나는 게 재밌어 목침을 던지며 논 적이 있었는데, 벽에 부딪힌 후 손을 향해 날라와 손가락을 부서트린 적이 있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손가락을 움켜잡곤 엄마야- 아빠야- 소리를 지르는데 티비를 보던 할아버지가 달려와 날 달래주셨다. 그 뒤로 할아버진 목침을 사용하지 않으셨다. 내가 치료를 받고 온 날, 방에 있던 목침은 창고 깊숙한 곳에 처박혔다. 매일 마른 수건으로 닦던 것이기에 깜짝 놀랐다. 그러나 나를 위해 소중한 것을 포기한 할아버지를 보며 감사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 후로는 할아버지가 달리 보였다. 날 아낀다는 걸 깨달으니 전보다 많은 걸 볼 수 있었다. 특히 할아버지의 슬픔을 알아채게 되었는데, 혼자 찡그리며 담배를 피우실 때가 그랬다. 난 할아버지가 담배를 피우시면 옆으로 조용히 다가가 사탕을 건네드리곤 했다. 나는 그렇게 오해하고, 이해하고, 위로하며 나이가 들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어머니의 격앙된 목소릴 기억한다.

“곰팡이 때문이래? 그러게 내가 다시 목침 쓰라고 했잖아. 얘 손가락 부러진 게 언젠데 아직도 그러셨어? 내가 못 살아 진짜. 아버지….”

내 방문 틈 사이로 보이던 어머니의 작은 등, 새어 나오는 한숨, 떨리는 손. 목침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이 중환자실에 갈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나로 인해 문제가 생겼다는 그 죄책감에 숨이 막혀 가슴을 몇 번이고 두들겼다.

그 후 우리 가족은 급히 병실을 찾았다. 병원 침대에 누워 힘겹게 호흡하는 할아버질 보자 예전의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딱딱하고 우직한 나의 거목은 바닥에 떨어진 낙엽보다 초라했다. 할아버진 목침을 베고 계셨다. 몇 년 동안 나오지 않던 목침이 마지막을 함께하고 있었다. 그 순간 목침에 새겨진 나와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떠올라 눈동자를 위로 아래로 연신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장례식을 마친 후 유품을 정리하는 시간이 왔다. 차례차례 골라가다 내 차례가 왔을 때, 망설임 없이 목침을 집어 들었다. 부모님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매끈하고 시원한 목침을 보니 할아버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단하고 차가운 나무에 쓰러지지 않는 기둥이 보였다. 난 그런 목침을 깊게 끌어안고 흐르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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