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목록 :
탑의 시장, 사람들은 모여 자신들이 사고 싶은 물건들과 팔고 싶은 물건들을 가득 내놓으며 서로서로 흥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대부분의 워록들은 명상이나 연구를 위해 시장에서 자주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아이코라 레이는 오히려 시장 한 구석에 자신의 연구실을 두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모여 있기에 자신이 원하는 정보들을 더 쉽고 빠르게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얻은 정보들 중 대부분은 미심쩍고 진위가 수상하기 짝이 없지만, 아이코라에게는 은신자라는 자신만의 수호자 부대가 있었다. 그들을 통해 정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별하면 그만이었다.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아이코라는 종종 평범한 사람들이나 수호자들 중 일부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었다. 그녀가 정보들을 모아 어디에 쓰일지는 그녀만이 알기 때문에, 그들은 아이코라가 언젠가 그녀의 스승이었던 오시리스처럼 최후의 도시 상대로 이단 행위를 저지를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아이코라는 그러한 음모론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자신의 스승의 사례를 보았기 때문에 그녀는 잘못 대응했다간 모든 것을 잃는다는 교훈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의심들을 불태우며 열띤 토론을 벌이다가 막상 아무 일도 안 일어나면 관심을 끊고 살 것 또한 간파했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고 자기가 얻어온 정보들을 자발라와 공유하는 일을 했다.
오늘도 아이코라 레이는 자신의 열린 연구소에서, 저 멀리 이오에서 머무는 친구인 애셔 미르가 가져온 토양 샘플들과 자료들을 훑어 보았다. 그가 건네준 글들에 따르면 최근 이오에서 굴복자들의 활동량이 눈에 띄게 증가되었다고 했다고 적혀 있었다. 굴복자들의 지속적인 피라미디온 침공, 작전명 ‘부패한 핵’ 즉 사바툰의 굴복자 군대가 이오의 벡스 메인 컴퓨터 시설 침입 사건 등등을 통해 전의 기록들보다 월등히 높다는 것이다.
아이코라 레이는 이러한 애셔 미르의 결과 보고서를 그저 의미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깨우친 자연의 섭리에 따르면 어느 특정한 종 하나가 가끔씩 비정상적인 활동이나 사건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군체의 신이자 굴복자들의 왕인 오릭스의 태양계 침공, 기갑단의 갑작스러운 붉은 전쟁의 사건, 최근에는 붉은 군단의 최후의 발악인 전능자를 통째로 최후의 도시로 추락을 시도했던 것, 그리고... 그리고… 타락한 망자들인 경멸자들의 준동과 함께 벌여진 자신의 옛 동료인 케이드-6의 충격적인 사망까지…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지자 아이코라 레이는 머리를 몇 번 흔들어 그 슬픈 기억을 잊으려 했다. 3분이 지나고 격양된 감정이 진정되자 아이코라는 머리를 흔들면서 감았던 눈을 뜨며 다시 한 번 애셔 미르의 자료들을 살펴보았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헛기침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그 소리가 자신을 봐 달라는 신호임을 알았고 그 신호를 자주 써먹는 친구가 누군지 알았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뒤를 돌아보며 아이코라 레이는 자신을 부른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굳이 나에게 말 걸고 싶다면 그냥 말로 해도 되네. 헛기침할 필요가 없어, 방랑자.”
“오우 그러신가, 선봉대 나으리? 하지만 당신은 이 탑의 워록들의 사실상 지도자이며 대표자잖아? 나도 워록인데 그냥 ‘어이, 아이코라~~!’하고 부르면 너무 예의가 없는 거 아니겠어?”
“자네가 워록이 아니라는 거 쯤은 이미 다 알고 있네, 방랑자. 나하고 있을 땐 그런 흉내놀이를 안 해도 되네.”
“허어, 그러셔? 뭐 자기 믿고 싶은대로 살아야지. 하지만 난 워록인 걸 어떡하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어서 하게, 난 지금 애셔 미르가 준 자료들 때문에 좀 바쁘니깐.”
“하고 싶은 말이란 게 말이야, 바로 그거거든. 선봉대 나으리.”
“그게 무슨 소리지?”
“지금 거기에 적혀 있는 거, 지금 이오인가 하는 곳에서 굴복자들이 난리 피운다는 거 아냐?”
“단단히 잘못 알고 있군. 세간에는 일명 만물상이라 할 정도의 정보들을 가지고 있다던데 아무래도 그 소문은 사실이 아닌 거 같군.”
“날 그렇게도 못 믿는 건가, 아이코라 레이? 너가 은신자라는 첩보원들이 있듯이, 나한테도 내 정보망들이 있다고. 그만 나에게 숨기지 말라고, 어?”
“왜 그렇게 나에게서 그 정보를 들으려고 하는 이유부터 말해준다면, 더는 숨기지 않겠네.”
“호오 그러시겠다? 좋아, 그렇다면 먼저 이 쪽 패 하나를 보여주지. 너가 잘 아는 친구인 자발라가 나에게 와서 말했어. ‘방랑자, 그대가 굴복자에 대해선 가장 잘 아는 수호자이니, 가서 아이코라 레이에게 조언 혹은 정보를 말해주게.’ ”
“거짓말 하지 말고 어서 가보게, 이번 무례함은 눈 감아줄테니.”
“그렇게 못 믿겠으면 그 잘난 사령관님한테 직접 물어보면 되잖아, 안 그래? 지금 해봐, 난 내 넓고도 넓은 인내심으로 기다려주지.”
아이코라는 방랑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그를 전혀 믿지 못했다. 하지만 가끔씩 그가 말하는 말들 중에는 분명히 쓸모있고 대단히 중요한 정보들이 있었다. 만약 지금 상황의 방랑자의 말이 확실하다면…
“좋아, 자발라 사령관님께 연락해보지. 자넨 그 인내심으로 좀 기다려주게.”
“얼마든지, 워록 나으리.”
자발라와 연락한 후 아이코라는 방랑자의 말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잠시 머리를 흔든 뒤 여유만만하게 자신을 기다리는 방랑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대의 말이 맞았군. 처음부터 의심만 해서 미안하네, 방랑자. 자, 그렇다면 자네가 나한테 줄 정보들은 뭐지?”
“주기 전에, 먼저 아이코라 당신이 나한테 줄 게 있지 않나? 그 책상 위에 올려진 유리병들이며 패드들, 종이 문서들까지… 저기에 있는 물음들과 정보들을 내가 알아야지 너의 머릿 속을 헤집는 해충 같은 의문들을 해결할 답들을 제시할 수 있다고.”
“좋아… 그렇다면… 여기 애셔 미르가 준 최신 자료들에 따르면은 최근 들어 굴복자들의 활동량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고 하네. 거기에 이오를 다녀온 몇몇 수호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오 곳곳에서 눈 같아 보이는, 굴복자들의 힘으로 이루어진 어떤 물체들을 보았다는군.”
“눈처럼 보이는 무언가들? 비명자들을 말하는 거 아니야? 이젠 굴복자가 되버린 비명자라니, 참 웃기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닐세. 진짜로 눈의 형태를 띈 무언가일세. 여기 어느 수호자가 고스트로 촬영한 영상일세.”
방랑자는 아이코라가 건네준 패드를 받고 영상을 재생해봤다. 정말이었다. 그것은 아주 큰 형태의 눈이었다. 게다가 굴복자 특유의 검은색과 청록색의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게다가 더욱 특이한 것은… 그 눈은 영상을 촬영한 고스트와 수호자를 제대로 응시하듯이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눈을 움직였다.
“자넨 이것이 굴복자라고 생각하나? 굴복자라면 많이 알고 있다고 하던데… 우리 쪽에선 모르는 종류의 것이거든, 그 눈이.”
“미안하지만 나도 모르겠군. 이건 어찌보면 진짜로 죽은 오릭스의 힘으로 이루어진 눈일지도 모르겠어. 한 마디로 살아있는 도구란 거야.”
“살아있는 도구라고? 그렇다면 누가 이런 눈들을 만들어낸 거지? 보통 눈이라는 것은 뭔가를 보고 감시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분명히 감시할 대상은 우리들일텐데...”
“난들 아나, 선봉대 양반? 당신의 그 절친한 벗이라는 에리스 몬한테 가서 물어봐. 그렇다면 그 군체같은 여잔 이렇게 말하겠지, ‘이것 또한 마녀 여왕이 꾸민 수많은 음모들 중 하나에 불과해요. 장담할 순 없지만요.’ ”
“마치 에리스 몬을 못 믿겠다는 의미가 담긴 발언 같군, 방랑자.”
“당연하지, 맨날 저기 저 떠 있는 달에서 온갖 불길한 기운 내뿜으면서 재수 없는 말들만 중얼거리지 않나?”
“우리가 자네를 볼 때 느끼는 기분이 딱 그렇다네. 둘이 같은 유형의 사람들인 거 같으니 서로 잘 어울리겠는걸?”
“퍽이나 같겠군, 그래. 뭐 그게 지금 중요한 게 아니고 그 눈들이라든지 굴복자라든지 결국은 지금 계속해서 우리쪽으로 오고 있다는 그 ‘어둠 놈들’이랑 크게 연관되어 있지 않겠나? 나는 일명 굴복자 전문가라고. 나한테선 그다지 질 좋은 정보들은 못 얻을 꺼야.”
“흐음… 그렇다면 아주 좋은 방법이 있겠군. 내가 자발라 사령관님한테 말해볼 제안이 있네. 자넨 굴복자 전문가이고 에리스 몬은 알다시피 군체 전문가이니…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해결해보면 되지 않겠나?”
“… 잠깐 지금 나 보고 그 반은 군체, 반은 인간 아니면 수호자인 처녀랑 같이 데이트하라고? 일부분이 박살이 나고 군체들이랑 악몽들이 우글대는 달에서? 내가 왜?!”
“전문가 두 명이 함께 고민하면 쉽게 답이 나오지 않겠는가? 게다가 난 선봉대라는 엄연한 직책이 있는 워록이야. 난 이거말고도 다른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네. 갬빗이 문제된다면 걱정하지 말게, 자네의 그 친한 친구인 족서란 타이탄에게 대신 맡겨주면 될 걸세.”
자기 전용 우주선을 타고 달에 도착한 방랑자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일단 수호자들에게 일명 ‘안식처’라 불리는 곳은 이름답게 달에서 가장 안전한 지역이었다. 선봉대 소속 프레임 로봇들이 곳곳을 경계 서서 지키고 있었고 태양계 각지에서 온 수호자들이 각자 모여 춤을 추거나 타이어 게임인지 모를 괴상한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저 높은 곳 위에서 에리스 몬이 기이한 서적들을 뒤적이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저런 여자랑 일해야 한다니’란 생각하며 방랑자는 호주머니에서 패드를 꺼낸 후 에리스 몬에게 말을 걸었다.
“어이, 안녕하쇼. 에리스 몬...양…?”
“그냥 에리스라 불러. 자네가 바로 그 방랑자란 워록인가?”
“그래, 맞아. 망할 선봉대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온 거지. 자, 여기 그 놈들의 말이 적혀 있는 패드야. 내가 여기에 온 이유이기도 하지.”
“그래, 한 번 읽어보겠다. 내가 읽는 동안 여기 안식처에 있는 저 수호자들이랑 말 좀 나눠봐라.”
에리스 몬은 패드를 집어든 채 잠시 어디론가 떠났다. 그녀가 읽고 있는 동안 방랑자는 안식처 곳곳을 둘러보고 저 멀리 보이는 달의 풍경을 보았다. 그러던 그는 이 곳 달에 새로운 갬빗 전장을 개설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대담한 사업구상을 했다. 그런 그의 생각은 에리스 몬의 말에 의해 끊어지고 사라져버렸다.
“너의 말이 맞는 거 같군. 방랑자, 와서 나와 본격적으로 같이 연구하지.”
시간이 어느정도 지났고 에리스 몬이 말한 의견에 방랑자는 신기하다는 듯이 그녀에게 물었다.
“… 그래서, 에리스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굴복자 눈들은 저 피라미드들이 관여해서 만들어진 것들이 아니다, 그런 말인가?”
“그래, 여기에서 계속 저 피라미드들을 관찰한 결과 피라미드는 적어도 오릭스의 힘, 즉 굴복자의 힘을 쓰지는 못하는 거 같다. 저것은 저것만의 힘을 이용해 우리들의 가장 두려워하는 과거나 기억을 악몽으로 실체화시키지. 그리고 내가 이곳에 있으면서 알아낸 건, 달에는 저런 눈들 따윈 없다.”
“그렇다면 이젠 누가 이런 것들을 만들었다는 거겠네. 혹시 큐리아라는 굴복자가 된 벡스 정신일려나?”
“너가 어떻게 큐리아를 아는 거지, 방랑자? 그건 선봉대에서도 기밀 사항으로 다루는 정보인걸로 아는데?”
“그러면 너는? 너도 선봉대가 아닌데 그런 걸 알고 있는거지?”
“난 한때 아이코라의 은신자들 한 명이었지. 지금도 종종 아이코라로부터 각종 중요한 정보들을 받고 있다. 그래서 알고 있는 거다, 그러면 넌 어떻게 아는건지 설명해봐라, 방랑자.”
“나한테도… 아이코라의 은신자랑 비슷한 정보원들이 있지. 오직 나를 위해서 일하는 친구들이야. 걔네들은 내 돈에 엄청 환장해 있거든.”
“그다지 신빙성이 없는 말이로군. 그리고 돈으로 고용된 자들은 언젠가 그 돈 때문에 널 쉽게도 배신할 거다, 방랑자.”
“어쩌라고. 결국은 돈이랑 자기 자신이 가장 최고잖아, 안 그래? 만약에 배신할 녀석들이 나타난다면 나에게도 대비책 여러 개가 있어. 그 대비책들이 실패한다면 또 다른 대비책들도 있고, 그게 또 안 되면 그땐 이 몸이 직접 나서서 처리하면 그만이야. 그런데 왜 그딴 거에 대해 묻는 거지? 너라면 바로 이 이오에 나타난 눈들의 정체와 목적에 대해 말할 거 같은데 말이야.”
“하기 전에 방랑자, 당신이라는 사람이 어떤 이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나와 충분히 대화를 나눌 만할 수호자인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러 대화 주제에서 벗어난 말들을 한 거지.”
“변명 한번 그럴 듯하네. 확인한 결과 너랑 대화할 만할 수호자인가, 난?”
“넌 완전히 속물 그 자체이지만 말로만 들어봤을 땐 여러 개의 갈랫길들을 생각할 수 있는 자 같다. 어찌보면 나랑 대화하는데 큰 문제는 없을 거 같다.”
“어우, 감동이여라.”
“그렇다면 방랑자, 자네의 생각엔 이 눈들이 누가 만든 거라 생각하나?”
“아까 전에도 말했지만, 큐리아란 그 녀석이 만든 거라 생각해. 내가 아는 바로는 현재 이 태양계에서 굴복자들을 만들 수 있는 존재라곤 걔 밖에 없다고.”
“하긴, 지금 리븐은 꿈의 도시에 여전히 갇혀 있기도 하고… 하지만 큐리아 역시 굴복자이다. 오릭스랑 다르게 그 벡스도 결국은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일개 굴복자일 뿐이야. 그렇다면 문제는...”
“큐리아를 조종하는 실세가 누구냐는 거겠군. 그 놈이 큐리아에게 명령을 내려서 그 눈들을 만들어 내도록 시킨 거겠어.”
“큐리아를 현재 조종하고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단 한 명뿐이다. 게다가 놈이 아니지. 그녀이다.”
“그녀라고? 누구지?”
“오릭스의 여동생이자 현재 군체들의 여왕. 마녀 여왕이라 불리는 마법사...”
“… 사바툰인가...”
“그래, 여기 패드에 적혀있는 부패한 핵 작전… 난 그때 자발라에게 말했지만, 저 사건에서도 사바툰이 관여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지금 보아하니 내 생각이 맞는 거 같다. 아무래도 사바툰이 꿈의 도시 사건 이후로 쉬다가 본격적으로 손을 뻗는 거 같군.”
“근데 그 사바툰이란 마녀 여왕말이야, 진짜로 존재하는 마법사가 맞나? 어쩌면… 어쩌면… 군체 여왕이라 하니까… 에리스 몬, 당신이 그 사바툰 아냐?”
“너말고도 다른 이들이 그렇게 의심하지만, 분명히 말해두지. 난 사바툰이 아니다. 나는 나일 뿐이다. 마치 방랑자, 당신이 방랑자인 거 것처럼.”
“그래, 그래 알겠어. 내가 오해했어. 그렇다면 일단 결론으로 사바툰의 뒷공작인 걸로 결론 내리면 되나...”
“그러는 게 좋겠군.”
말을 마친 에리스 몬은 제단 뒤로 있는 거대한 균열을 응시했다. 방랑자는 호기심이 들어 그녀 근처에 다가와 균열에 뭐가 있는지 확인해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방랑자는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물어보기 위해 에리스 몬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뭔가… 슬퍼보였다.
“저 밑에 뭐가 있길래 그렇게 슬픈 표정을 지으며 보는 거지?”
“종종 몇몇 수호자들이 나한테 와서 이 질문을 물어보지. ‘당신은 대체 왜 이 저주받은 곳에서 계속 있는 거죠?’ 라고...”
“나도 그게 궁금한 거였어. 이 부서지고 군체로 가득하며 악몽이란 꺼림착한 것들로 가득한 곳에 있기를 왜 원하는 거지?”
“이곳엔… 나의 오만함 때문에 죽은 내 화력팀원들이 묻힌 곳이기 때문이다. 나의 만용과 무지 때문에… 에리아나-3, 오마르 아가 등등의 실력 있고 선한 수호자들이 억울하게 죽었어. 그리고 피라미드는 그걸 이용해 내 화력팀원들을 형상화한 악몽들로 날 괴롭혔다.”
“… 그랬군. 나도 그런 기분을 알지. 소중한 이들을 자신의 손으로 지키지 못하고 먼저 떠난 보낸 거에 대한 고통과 슬픔. 그리고 그들과 똑같이 생긴 무언가를 봄으로써 생기는 고통과 그리움… 꽤나 악랄한 고문 그 자체지.”
“그래서 난 내 과오를 씻어내고자 달에 계속 남아있는 것이다. 그들의 목숨을 앗아간 군체 녀석들은 아직도 여기 지하 깊숙한 곳에서 달의 지표면으로 계속 올라오고 있어. 난 놈들의 행동과 목적을 감시할 것이다. 이 군체들도 결국은 사바툰의 명령을 받을 테니 놈들의 행동에서 사바툰의 음모를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참 숭고한 목적이로군. 나와 다르게 말이야.”
바로 그때 달 곳곳에 세워져 있던 라스푸틴의 탑들의 전원이 꺼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타이어 게임을 하던 수호자들도, 서로 대화를 나누던 수호자들도 모두 일제히 멈춰 서 각자의 귀에 손을 댔다. 잠시 후 그들은 서둘러 어딘가로 갈 채비를 갖추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수호자들의 움직임에 에리스 몬은 의문이 들었다.
“무슨 일이기에 모두가 이리 바쁘게 움직이는 거지, 토룬?”
“선봉대 채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에리스 몬. 그대는 지금 저 방랑자와 대화하느라 못 들을 수도 있겠지만, 화성의 아나 브레이가 모든 수호자들에게 연락했습니다. 화성 근처 궤도에서 나타난 피라미드 하나를 라스푸틴이 요격하는데 성공했다는군요.”
“그러면 좋은 소식 아닌가? 근데 왜 그렇게 다들 움직이는거지?”
“그러자 또 다른 피라미드가 나타나 라스푸틴을… 원격으로 파괴했다고 합니다.”
“… 라스푸틴이 파괴당했다고? 도망친 게 아니라?”
“그렇소, 방랑자. 그래서 자발라 사령관께선 모든 수호자들에게 긴급 명령 75호를 발령했습니다. 우린 지금 최후의 도시 쪽으로 집결할 겁니다, 에리스 몬. 그대랑 방랑자도 최후의 도시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알겠다, 그렇게 하겠다.”
토룬은 고개를 끄덕인 후 서둘러 자기 우주선으로 향했다. 방랑자는 에리스 몬을 보며 눈을 끄덕였다. 에리스 몬은 무슨 뜻인지 알았기에 그가 떠나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바로 그때 에리스 몬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누르며 잠시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이상 행동을 유일하게 본 방랑자는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봐, 무슨 일이야? 괜찮나?”
“나는 괜찮다… 나만 들린 건가? 나에게 목소리 하나가 들렸다. 그 목소린… 이오에서 왔다… 지금도 들려… 이오로 와 달라고...”
“이오로? 왜지? 왜 하필 많고 많은 행성들 중에서 이오인 거냐고?”
“이오엔 그 장소가 있다… 여행자의 손길이 마지막으로 닿은 곳… ‘요람’… ”
“요람이라고? 거기엔 뭐가 있기에?”
“정확히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난 그 곳으로 가봐야겠다. 목소리가 날 부르고 있어. 어쩌면… 어쩌면 그 곳엔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의문들에 대한 답 말이다...”
“내가 해줄 건 없나?”
방랑자의 말에 에리스 몬은 놀랍다는 듯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의문 가득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어봤다.
“자네답지 않게 왜 친절을 베푸는 거지, 방랑자?”
“그야… 그야… 선봉대에서도 에리스, 당신의 행적에 깊은 관심을 보내주는데 탑에 안 오면 나한테 따지지 않겠어? 그럴 때 내가 말해야 할 변명들이 있어야지. 난 아무에게나 호의 같은 건 안 베푼다고.”
“그래, 알겠다. 그런 것이 방랑자, 자네다운 거지. 그렇다면 난 이제 이오로 가겠다. 자발라한테 꼭 얘기해라.”
“내 안전을 위해서 꼭 말할 거야, 에리스 몬.”
에리스 몬의 비행선이 이오로 떠나는 걸 본 방랑자는 잠시 동안 안식처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프레임들은 낯선 방문자가 안 떠나는 걸 무신경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후 방랑자는 자신의 우주선에 몸을 실었고 그의 우주선은 최후의 도시로 향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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