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일전 새벽에 비가 많이 왔다.
집안에서 빗소리를 들으니 불현듯 친구 생각에 우산을 들고 골목길을 나섰다.
친구가 생각나면 전화하면 되는 2019년에 무슨 우산을 들고 나가는가 싶겠지만,
녀석은 증발해 버리듯 모든 연락을 두절한채 없어져 버렸다.
오르막길 끝에 있는 공원에 올라, 야경을 덮은 비를 바라 보며
친구 생각을 했다.
친구는 비가 오는 날이면 가끔씩 나를 불러내 술을 마시자고 했다.
그러다 술이 어느 정도 올라오면 늘 같은 이야기를 했다.
"비가 존나 오는날에 한적한 강가에 차를 세워 놓고 커피를 마시는거야..."
20대 중반에 이 이야기를 들었을땐 친구에게 면박을 줬다.
"너 아직 사춘기 안끝났냐?"
내 앞가림에 급급했던 나는 친구가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어느새 30대가 되고 친구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여느때 처럼 비가 오는날 친구는 나를 불러냈다.
그러고는 몇년전과 같은 이야기를 했다.
"비가 오는날 강가에 차를 세우고 커피를 마시는거야. 빗소리를 들으면서... 그게 꿈이야."
"너 그 이야기 술만 먹으면 하는거 아냐?"
"어? 내가 그랬냐? 시발놈... 뭔 말만 하면 다 기억하고 있냐."
"베트남도 갔다와, 일본도 갔다와, 대만도 갔다와, 그렇게 빨빨대며 돌아다니면서 또 비를 맞으러 가신다고?"
"그거랑 달라 이새끼야."
"가시면 되잖아요. 뭐가 문젭니까? 그걸 말해보라고."
"…. 몰라 씨발.. 모르겠어."
친구는 언제나 내면을 파고드는 이야기를 피했다.
나는 언제나 친구의 삶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이야기 했고
친구는 그게 아니라고 반박했지만, 몇마디가 오고가면 늘
"아 몰라 이 새끼야" 라며 대답을 회피했다.
잔소리 전문가인 나는 친구를 이해하기는 커녕 구석으로 몰고가는 말을 자주 했다.
"아니 봐바. 나는 하지도 못한 결혼을 하셨어, 예쁜 딸있어, 부모님 살아 계셔, 직장있어,
대체 어디가 문제냐고."
"또 그 소리냐…. 시끄럽고 술잔 비었다."
생각해 보면 친구는 언제나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것 같았다.
20대 초반에는 강원도에 가서 살고 싶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고, 강원도에 있는 대학에 다니기 위해 부모님 몰래 입학준비를 하다 걸려서 모든것이 무산 되기도 했다.
이상향인 강원도.
이상적인 여행인 비오는날의 커피.
친구가 이런 이상적인것에 강하게 집착하는 것을 보고, 나는 친구를 마음대로 생각해 버리기에 이르렀다.
'현실을 버리고 이상을 향해 여행 하고 싶었지만, 욕망의 족쇄를 한쪽 발목에 스스로 묶고. 족쇄 반대편은 현실의 바닥에 못박아 그 자리에 머물러 버린 사람' 으로 정의해 버렸다.
이런 편견가득한 정의로 인해 나는 친구를 보면 못마땅해 하거나, 잔소리 할 거리를 찾는 인간이 되었다.
또. 친구에게 편견이 생겼다는것을 인지 했지만 부숴버리지 못했고, 우리는 그저 얼굴이 익숙해서 만나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그런 관계가 녀석도 지겨웠던 것일까? 친구는 어떤 연락도 되지 않는다.
나는 친구가 연락이 되지 않자, 호들갑을 떨며 여기저기 연락을 돌렸었다.
다른 친구 최가놈은 녀석이 제수씨와 함께 출국했고, 그대로 떠난게 아닌가 하는 가설을 세웠다.
친구 어머니는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말하시고는 여느때와 다르게 성급히 전화를 끊으셨다.
친구집 근처에서 치킨가게를 하는 치킨맨은 최근에 일어난 범죄사건에 연루된거 아니냐고 했다.
DM이나 보내보려던 제수씨의 페이스북은 폐쇄 되었고, 전화번호도 바뀌어 버렸다.
모든 끈은 끊겨 있었고, 할수 있는건 그저 그리워 하는 일 뿐이었다.
몇일전 늦은 새벽. 오르막길 끝에 있는 공원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친구를 생각했다.
어딘가에서 현실에 못박힌 족쇄의 못을 뽑아버리고, 빗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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