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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고민/일상 아내와의 대화

覆水不返盆3ca8b
2018-02-16 00:40:41 1009 2 1

오후 9시가 되면 아내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 안으로 들어온다. 나는 손님을 맞이하듯 현관으로 달려간다. 아내가 주는 겉옷을 받는다. 벽장으로 리모델링된 옷장에 아내 옷을 세심히 정리해 넣으면 다시 소파로 돌아간다. 아내는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와인셀러에 있는 와인 하나를 들고 온다. 낭만적일 것 같지 않게 글라스에 가득 와인을 따른다. 글라스에 담긴 와인을 포도 주스처럼 마시는 아내도, 나도 쇼파에 누워 TV를 바라본다. 정치 성향이 전혀 담겨있지 않은 예능 프로그램을 돌려보다 문득 내가 입을 연다.

"여보. 당신도 인터넷 방송 알아?"

아내는 와인 자국이 남은 글라스를 작은 탁자에 내려놓는다. 소녀처럼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 아프리카? 그거 말하는 거야?"

"응. 맞는데, 요즘은 트위치라는 곳도 있더라고."

내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아내는 풉, 하며 입을 손으로 가린다.

"이름 웃기네. 경련? 인터넷 방송국 이름이 경련이야?" (twitch ; 씰룩거리다, 경련하다 ; 홱 잡아채다, 홱 당겨지다 ; 씰룩거림, 경련)

"그렇게 따지면 아프리카도 똑같지. 나라 이름이잖아."

아내는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연예인의 우스꽝스러운 언행과 행동에 밝은 웃음을 터뜨린다. 글라스 표면에 젖은 와인 방울이 떨어진다.

"근데 그건 왜? 당신 방송하려고?"

"방송은 무슨 방송. 그냥 당신도 알고 있나 싶어서 물어본거야."

"알기야 알지. 음, 뭐. 집안 사정 때문에 그런 매체를 접할 기회는 없었지만."

"그렇지. 당신 엄청 가난했잖아. 필기구 살 돈도 없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지. 그때 생각하면 참 웃겨. 집세 낼 돈도 없어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녔거든. 폐가에 몰래 산 적도 있고."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일이다. 애초에 자라온 환경부터 다르지 않은가. 그저 나는 '아내가 많이 힘들었다.'고 생각할 뿐이다. 물론 아내도 내가 공감하지 못하는 것에 크게 뭐라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당신도 참 대단해. 그렇게 힘든 환경에서도 명문대에 들어간 거 보면."

"그냥.. 엄청 노력했지. 명문대에 들어가야 산다고 아버지가 늘 말씀하셨거든. 동생들 챙겨야하니까 취업하라고 하셨을 법도 한데."

나는 고개를 절로 끄덕였다. 아내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각각 하나씩 있는데, 첫째라는 이유와 여자라는 점 때문에 공부 말고 취업전선에 뛰어들게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래도 나와 내 아내의 부모님들은 늙었다고 생각한 우리보다 훨씬 길게 늙었으니. 하지만 나는 끔찍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대로 취업했으면 내가 당신을 못 만났겠지."

"그러게. 아쉽다."

"뭐?"

"아니야."

아내는 멍한 내 얼굴을 바라보며 싱긋 웃어보였다. 나도 너털웃음을 지었다. TV에선 여전히 연예인들이 신나는 쇼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아내는 연예인들이 하는 말 하나하나에 박수까지 쳐가며 TV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이 다시 아내에게 돌아갔다.

"당신은 이상형이 뭐야?"

아내는 입술을 쑥 내밀더니 다시 밀어넣었다. '그게 왜 궁금하냐?' 라는 의미였다.

"왜?"

"그냥. 궁금해서. 이상형을 알면 내가 거기에 맞춰갈 수 있잖아."

"엥, 그럴 필요 없네요. 그냥 이대로만 살아도 내게 맞춰주는 거야."

잠시 TV 소리마저 잠겨버릴 정도로 깊은 침묵이 흘렀다. 아내는 방금 전 핀잔처럼 했던 말이 무안했던 것인지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사실 대학을 다니면서 돈 많은 남자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은 했어. 너무 힘들었거든. 나도 다른 얘들처럼 공부도 하고, 때로는 놀기도 하고, 남자친구도 사귀면서 대학 다니고 싶었어. 근데 녹록치 않더라. 대학 등록금도 벌어야지, 계절 학기 비용도 벌어야지, 교재 비용에 자취비까지. 거기다 공부도 나 혼자 해야했고. 남들이 흔히 가지는 일상이 나는 특별한 일이었거든. 그래서 어느 날은 자취방에 누워서 다짐했었어. '아, 돈 많은 남자를 만나고 싶다. 남자가 돈 벌어오고, 난 집에서 편히 쉬고 싶다.' 이런 식으로."

나는 아내 말이 끝나자마자 입꼬리를 비쭉 올렸다.

"당신 방금 한 말 되게 소설투였던거 알아?"

"눈치 챘어? 원래 가방끈이 긴 사람이 말을 유도리있게 잘하거든."

"무슨 소리야. 오글거린다는 의미였는데."

아내는 내 등짝을 세게 내리쳤다. 파리채로 파리를 잡을 때 그 소리가 내 양 귀에 뭉그적 들어왔다. 꽤 쓰라렸다.

"아프잖아!"

"남자가 이 정도로 엄살은 무슨!"

아내는 콧방귀를 흥 뀌며 TV로 시선을 돌렸다. 그 사이 와인을 따랐는지 큰 글라스를 입술에 가져다댔다.

"여보"

"왜 불러."

목소리가 딱딱했다. 약간 화가 난 듯 했다.

"사랑해."

아내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래."

나는 이마에 내 천 자를 그리며 과거를 더듬었다.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다. 평소 이렇게 말이 잘 끊기지 않는 것도 있었다.

"당신은 처음에 내가 사귀자고 했을 때 어떤 생각 들었어?"

"내가 당신 전임비서였을 때?"

나는 손가락 2개를 부딪쳐 소리를 냈다. 일종의 습관이지만, 상대방 말이 맞을 때 주로 나오는 버릇이기도 했다.

"응. 그때. 그때 당신은 나랑 사무적인 만남만 있었잖아."

"당연하지. 그래서 그때도 장난이 도졌다고 생각했어. 무슨.. 그 뭐지, 아이언맨? 거기에 나오는 여자도 아니고."

나올 듯 시위하는 헛기침을 다시 목구멍 속으로 밀어넣었다.

"그래도 그때나 지금이나 난 진심인데."

"당신이 진심인지 내가 어떻게 알아. 막말로 재미 한번 보려고 말 걸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헛웃음을 두 세번 터뜨렸다.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막상 돈 많은 남자가 나에게 오니까 부담되긴 하더라. 자존감이 없어서 그런가, '이 사람이 왜 나한테 오지? 내가 뭔데?'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 그래서 거부했던 거고."

"장인께서도 처음에는 반대하셨잖아."

아내는 그때 생각을 재생하듯 천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렇지. 신기했어. 돈이 많으면 당장 시집가라고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아빠가 먼저 반대하셨으니까. 한편으론 되게 고맙기도 했는데, 그때는 나도 당신이 진심인지 알고 있으니까 당황스럽더라고."

솔직히 아내에게 내가 진심이라는 것을 믿게 하는 것보다 결혼을 허락 받는 게 더 힘들었다. 아내는 내 손을 두 손으로 포개어 잡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은 무릇 보일러 때문은 아니었다.

"그래도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있어."

"뭔데?"

아내는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잡았던 손을 내게 던지듯 놓았다. 새침데기 여고생을 보는 듯 했다.

"일은 여전히 내가 한다는 거."

그리고는 아내는 TV를 끄고 안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잘 시간이야. 빨리 들어와."

나는 아내 뒤를 따라가면서 억울한 투로 말했다.

"당신이 나보다 일을 더 잘할 뿐이야."

아내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나도 덜렁 누웠다. 부드러운 실크 이불이 내 몸을 감싸고 돌았다. 아내는 내 옆에서 잠자리를 뒤척이다 나에게 돌아누웠다.

"여보. 나도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응."

"왜 당신은 대리인을 나로 고른거야? 나보다 경영을 잘하는 사람은 훨씬 많잖아."

나는 아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등 중반까지 내려온 머리칼이 참으로 부드러웠다.

"내 주변에서 경영을 정말 잘하는 사람은 당신밖에 없어. 다른 사람은 말짱 꽝이더라고. 당연히 나도 마찬가지고."

아내는 눈을 살짝 껌벅거렸다. 많이 피곤한 눈치였다.

"당신은 돈 욕심 없어?"

"내가 돈 욕심이 왜 없어. 나도 돈 욕심 있지. 근데 일 욕심이 없을 뿐이야."

"명답이네."

"그렇지? 이제 자자. 당신 항상 일찍 자도 피곤하다고 하잖아."

들썩이던 이불마저 잠잠해지고, 그리고 별마저 어두워졌다.


[ 진담 ]

Q: 올라오는 이야기 중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가짜입니까?

A: 저는 거짓말을 할 정도로는 똑똑하지만, 이야기를 꾸며낼 정도로 머리가 똑똑하지는 않습니다.


신청곡

: B*witched - Mick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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