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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고민/일상 소설가들의 이야기

覆水不返盆7d871
2018-01-07 01:49:42 994 4 0

나는 소설가다. 물론 채식주의자를 낸 한강 작가님만큼은 아니지만, 책 팔아먹은 돈으로 내 삶을 영위할 만큼은 되는 소설가다. 그 삶이 끔찍하게 검소하지만. 당연히 내가 누군지 밝힐 생각은 내 집에 있는 값비싼 물건만큼도 없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집에서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며 지내다, 동료 작가에게 전화가 왔다.

"내일이면 새해인데 축하연이라도 열어야하지 않겠는가?"

난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낮다는 것을 느꼈다. 잠시 침묵을 지키다 알겠노라고 했다. 꼭 가야하나. 회의감도 들었지만 갔다. 가끔씩은 얼굴을 봐야 살아있다는 것을 알 사이일 테니. 차도 없어 걸어서 불러준 장소에 도착하니, 사방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조촐한 고깃집이었다. 다들 흔히 말하는, 뱃속을 기름칠하기 위해 오는 곳이 우리같은 사람들에겐 큰 자리를 만들기 위해 오는 곳이다. 겨우 자리를 찾아 앉으니 자리를 마련한 동료가 말했다.

"오랜만이야."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모두들 약속한 것처럼, 지글거리며 익어가는 돼지 껍데기를 바라보았다. 그 흔한 삼겹살도 못 시키는 관계, 그게 우리였다. 모두에게 술잔이 돌아갔고, 모두가 쓰디쓴 소주를 들이켰다. 별일 없냐는 말에, 그저 다들 소주만 들이켰다. 알싸한 알코올 향내가 물씬 풍길 즈음, 한 동료 작가가 역정을 냈다.

"빌어먹을. 매일같이 고민해도 결국 돌아오는 건 클리셰, 클리셰, 클리셰. 지금까지 나온 소설이 지구에 사는 사람들보다 많은데 어떻게 클리셰가 없겠냐!"

벌써 취한 것인지, 동료 작가는 술잔을 부술 듯이 탁자에 내리쳤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저런 행위가 혐오스럽다. 그렇지만 적어도 우리는 공감했다. 모두가 겪는 문제였다. 동료 작가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글을 이따위로 쓰고 싶어서 써? 우리가 뭐 산업스파이야? 작품성과 대중성을 다 잡는 글을 나라고 안 쓰고 싶겠냐고. 근데 나는 그런 능력이 없단 말이야. 적어도 이런 곳에서 나는 불가능한데.."

말끝이 흐려지고 다시 따라진 술이 동료 작가 입 속으로 떨어졌다. 나는 콩가루를 살짝 묻힌 돼지 껍데기를 들어 입에 넣고 씹었다. 고무와 껌을 섞어놓은 것처럼 역겨웠다. 이런 곳. 대한민국을 의미했다. 결국 축하연은 하소연으로 이어졌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사실이잖아. 애초에 다른 나라가 문학 분야 문화가 워낙 크고."

"망할! 10만 권만 팔려도 베스트 셀러인 마당에!"

어쩌면 저 자는 책을 자주 읽지 않는 국민을 욕하고 싶을 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요새 추세는 빠르게 생산되고, 빠르게 소비되는 성향이 크다. 천천히, 그리고 길게, 심지어 그것을 반복하여 곱씹는 행위를 포함하는 독서를 일부러 시간 내서 누가 할까. 생각해보면 답은 당연하게 나온다.

물론, 책을 하루만에 다 읽어야 한다거나, 하루에 몇 장은 읽어야 한다거나, 한 달동안 몇 권은 사야한다는 규칙은 없다. 사놓았다가 시간이 날 때 잠깐씩 짬을 내서 읽으면 되는 일이다. 결국 시간이 없어서 책을 읽지 않는다는 말은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우리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짬짬이 책을 읽을 정도로 재밌거나, 큰 의미가 담겨있거나, 대단히 신선한 소재나 요소가 담긴 책을 써내지 못한 우리 탓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쇠퇴해가는 문학 산업에서 누가 더 잘못인가 따져보면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일 뿐이었다.

푸념하는 동료 작가를 위로하던 다른 동료 작가가 멋쩍어하며 한 마디 내뱉었다.

"그래도 세상에 우리같이 합리적인 무능력자가 또 있을까 싶다."

푸념하던 동료 작가도, 콩가루에 돼지 껍데기를 씹어먹던 나도, 말을 꺼냈던 스스로도 호탕하게 웃었다. 그래, 맞다. 우리는 합리적인 무능력자다.

내 직업. 가슴이 저릿해졌다. 문득 든 생각이, 예술가들은 하나같이 속물적이면 좋지 않은 시선을 받는다는 점이 그것이었다. 이상하다. 예술가가 돈을 추구하는 점이 어떠한가? 앤디 워홀조차도 대놓고 대중적인 것을 노리지 않았나. '현대 문학'이라는 것이 언제부터 배고파야했고, 언제부터 작품성만 따졌던 것인가. 우리같은 존재는 언제부터 골골대는 배를 움켜쥐며 타자기를 두드렸나.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누가 강요했는가?

집에 돌아가면서 축하연 자리를 생각했다. 올 한 해를 잘 보냈다는 의미가 아닌, 다음 해에도 살아있을지 내기하는 자리. 마치 러시안 룰렛처럼. 씁쓸한 생각이었다. 그래서인지, 쌉싸름한 소주 향 내음이 입 안에서 잔뜩 풍겼다.


신청곡

: 이문세 - 옛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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