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언제나 멀쩡하다. 그녀는 아팠던 기억을 쉽게 잊는 편이었다. 아팠던 적이 있었던가?
그래도 그녀는 어떤 병에 걸렸었는지는 기억을 한다. 뭐 그것 또한 기억 못할 때도 있다. 아무튼 그녀는 다양한 병에 걸렸던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녀가 수집해 온 각양각색의 병들은 시간이 지나자 곧 고유의 색을 잃고 잿빛으로 남아버렸다. 잿빛의 병들을 보고있자면 앨범 속 빛바랜 사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러다 그녀는 그 때 그 병은 어떤 병이었나? 하는 생각에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앨범 속에 있던 사진 하나가 사라져 뻥 뚫린 빈자리가 생긴 것 처럼 그녀의 어떤 병 또한 그 잿빛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있었다. 사라진게 아니라 그나마의 잿빛 마저 잃고 끝내 투명해져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분명, 하여튼, 아무튼, 병에 걸렸긴 했었는데, 어떤 아픔이 있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뭔가 있었던 빈자리만 남았을 뿐
그래서 그녀는 멀쩡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도 그녀가 멀쩡하다고 생각했다. 뭐 다들 그녀가 멀쩡하다고들 하니까, 진짜 자기가 멀쩡하다고 믿었던 그녀는 그 빈자리에 있었던 사진이 뭔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녀는 어떤 환자의 앨범을 훔쳐보았다
그녀는 곧 후회했다. 사진도 사진이지만 그 본연의 색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 환자의 앨범 속 사진들은 이상하게 너무나도 선명했다. 보고있자면 눈이 시려 눈물이 날 정도였다. 그녀는 다시 병에 걸려버린 것만 같았다. 아니 사실 병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고, 잊었던 아픔이 되살아난 것이겠지. 가엽게도
그녀가 당장에 할 수 있는 것은 약을 먹으면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 되돌아온 그 아픔이 다시 잿빛이 되고, 투명해지기를 바라고 버티며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언제나 멀쩡하다. 그녀는 아팠던 기억을 쉽게 잊는 편이었다. 아팠던 적이 있었던가?
아픔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