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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문예] 3번

Broadcaster 세인님
2017-05-14 10:41:03 698 0 0

혁명

담요를 덮었다. 주전자가 끓었다. 개들은 짖었다. 남자들은 죽었다. 여자들은 잡혔고 그 애들은 울었다. 혁명가와 나는 지하 골방에 틀어박혀 잠을 청했다. 잠들지 못했다. 나는 콘크리트 벽에 기대어 양 같은 걸 상상하곤 했는데. 라텍스 베갯잇 같은 양들. 그것들은 풀 대신에 내 몸뚱이를 뜯어 먹었다. 나는 수시로 눈을 떴고. 세 번의 총성이 울렸고. 혁명가는 소파 위에 누워 소리에 예민한 개처럼 몸을 뒤척였다. 소모된 총알 수와 동일하게 누군가 죽어 나갔을 것이었다.

혁명가와 나는 놋쇠 컵에 커피를 따르고 버터를 녹여 한 모금씩 나눠 마셨다. 빛. 우리는 빛을 본 지가 오래되었다. 혁명가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회의. 작전. 우리는 의미 있는 일을 하기 위해 레드오크 원형 탁자에 앉았는데. 둘 중 누구도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우리는 주로 탁자를 두드리거나 팔을 뻗어 서로를 더듬었다. 지점토를 주무르듯이 광대뼈와 콧대를 만지며 시가를 피우는 러시아 마피아를 상상했다. 그건 때로 작은 위안이 되기도 했다.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농담에 아무도 웃지 않았고. 웃는 대신에 자주 울었다. 울다 보면 총성이 울렸다. 비릿한 화약 내음을 삼켰다.

결국엔 꽃이 필걸세. 혁명가는 풀 죽지 않았다. 모든 혁명가는 대체로 풀죽지 않는 편이었다. 예예. 꽃이 핍니다. 꽃이 핍니다. 나는 그가 쥐여준 성경책을 문질렀다. 코끼리 거죽을 쓰다듬는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혁명가는 그에 힘입어 “오늘 우리가 죽어도 내일 자손들이 보게 될 것은 5월의 꽃이요.” 노래를 불렀다. 개소리였다. 노래를 부르고 난 뒤엔 배가 고픈지 눅진한 비스킷을 먹어치웠다. 식욕이 부쩍 늘었다. 혁명가는 여느 지하 골방의 쥐새끼처럼. 힘을 비축하려는 짐승처럼. 남아있는 식량을 해치우고 잠도 잘 잤다. 꿈도 꿀 것이었다. 나는 혁명가가 꾸게 될 꿈을 상상했는데. 예외 없이 이전의 양들이 등장했다. 그것들은 나를 뜯어 먹고 꽃을 뜯어 먹고 뜯어 먹은 것을 게워내 다시 먹었다. 얼굴을 쓸어내렸다. 바닥을 짚고 있던 손마디가 간지러웠다. 긁다 보면 피부가 벗겨지기도 했는데 아프거나 하지 않았다. 손바닥으로 벽을 두드리면 썩은 고목 소리가 났다.

혁명가가 죽었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배가 부풀고 있다고 했다. 먹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것은 혁명일세. 혁명이야. 혁명가는 만삭의 여인처럼 제 배를 끌어안았다. 따듯하다고 했다. 그러다 배가 터져 죽었다. 잡 벌레들이 혁명가의 뱃속에 알을 깠다. 나는 지하 골방에서 나오기로 마음먹었다.

문을 열었다. 겨울이 끝나지 않았다. 군밤 모자 눌러쓴 소년이 자선냄비를 흔드는 겨울. 종소리에 맞춰 눈이 흩날렸다. 거지들의 얼굴에 열꽃이 피었다. 살아남은 남자들은 술에 찌들었다. 여자와 아이들은 구석에 모여 기도를 드렸다. 문을 닫았다. 잠을 좀 더 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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