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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창작물의 어스퀘이크

유혈목이
2019-04-25 22:47:31 20 0 0

이번에도 전편과 이어지는 시리즈...  











아직은 평온함이 맴도는 전철 안. 가까스로 어제와 같은 시간, 같은 칸에 몸을 실은 나는 느긋하게 좌석에 앉아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잔잔한 음악이 귓속을 파고들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얼굴을 쓰다듬자 졸음이 밀려들 정도로 안락한 기분이 나를 삼킨다. 이대로 눈을 감으면 곧바로 잠이 들 정도의 몽롱함이 사정없이 뇌를 흔들어놓는 느낌. 나는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눈을 뜨니 보이는 광경은 코앞까지 다가온 어떤 아저씨의 부담스러운 하체. 그 거북한 모습에 퍼뜩 정신이 든 나는 어느덧 사람들로 들어차 있는 전철의 내부를 이리저리 훑었다. 다행스럽게도 전철은 아직 종각역을 지나기 전.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여전히 음악을 토해내고 있는 이어폰을 거둬들였다. 종각역까진 아직 두 개의 역이 남은 상황. 나는 괜스레 긴장되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아직 가시지 않은 잠기운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흔들어댔다.


전철이 역 두 개를 지나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5분 정도의 시간. 순식간에 종각역에 도착한 전철의 문이 열리자 늘 그렇듯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듬성듬성 서 있는 사람들 틈 사이로 그녀가 언제 나타날까 가슴 졸이며 출입문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 그녀다. 어제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아름다운 그녀. 하얀색 블라우스와 짧은 청바지를 입고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그녀. 그러고 보니 어제도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좋아하는 색이 하얀색인 걸까? 


어제처럼 그녀를 천천히 관찰한다. 처음 봤을 때처럼 여전히 짙게 느껴지는 차분한 분위기. 아마도 새까만 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때문이겠지? 뭘 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스마트폰 액정에 집중하며 옅게 띠는 미소가 무척이나 아름답다. 아니, 아름답다는 표현은 뭔가 어색하다. 좀 더, 좀 더 진하고 꽉 찬 표현이 없을까?


「하아….」


한숨과 함께 흘러나오는 아쉬운 감정. 조금 더 그녀를 가까이서 보고 싶지만 내리지도 않는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가는 것도 뭔가 이상한 그림이 될 것 같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라도 나타나면 자리를 양보해주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면 되는데 그것도 안 되는 상황이고….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렇게 멀찍이서 그녀를 바라보기만 하는 것뿐일까?


머릿속에선 자연스럽게 말을 걸며 연락처를 얻어내는 상황이 끊임없이 시뮬레이션 되면서 상상의 세계가 점점 만들어진다. 그 속에서 나는 그녀에게 퇴짜를 맞기도 하고, 운 좋게도 함께 카페로 동행하기도 했으며, 연락처를 얻어내 밤새 문자를 주고받기도 했다. 치한으로 몰려 낭패를 본 일도 다수. 나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따라 달라지는 그녀의 반응과 이후의 일들이 반복되고 축적되고 새겨지면서 내 상상은 걷잡을 수 없이 부풀려진다.


그렇게 한참이나 내 세상에 빠져 허우적대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덧 열차는 신이문역을 지나고 있었다. 그녀가 내리는 곳은 월계역. 그녀와 내가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너무나 아쉬워 가슴이 욱신대는 느낌이 들 정도다. 


오늘도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저 멀찍이서 바라만 보기만 하는 게 전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고작 변태처럼 이상한 상상이나 떠올리는 게 끝이라고?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곁으로 다가섰다. 내가 우려했던 것과 달리 사람들로 북적대는 전철 안에서 나의 행동은 이목을 끌 정도로 튀는 행동이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바로 옆까지 다가가 곁눈질로 그녀를 내 시야에 새겨갔다.


요동치는 심장과 이마를 적시는 식은땀. 혹여나 내가 그녀를 훔쳐보고 있다는 사실이 들킬까 마음을 졸이며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서서 끝까지 그녀를 관찰했다.


【이번 역은 월계. 월계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오지 않길 바라던 시간은 매정하게도 다가왔고 그녀와 나의 잠시뿐이었던 접점은 끝나려 하고 있다. 그녀는 좋은 일이 있는지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검은색의 가방을 어깨에 고쳐 메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전철을 빠져나간다. 


어떡하지? 그냥 따라서 내려버릴까? 아니, 내려서 뭘 하려고? 미행이라도 할 작정이냐? 하지만 이렇게 끝나는 건 너무 아쉽잖아? 아냐 아냐. 시간은 충분하고 내일은 또 돌아오게 돼 있어. 그러니까 오늘은 여기서 끝내자. 너무 조급해할 필요 없잖아?



――――――



방으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침대 위로 쓰러졌다. 어떻게 집까지 돌아왔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머리를 한 손으로 부여잡고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변태가 따로 없네.」


정작 그땐 몰랐지만 모든 게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오니 나의 행동들이 하나하나 떠오르며 나를 쿡쿡 찌르기 시작한다. 자신에 대한 경멸과 역겨움이 밀려들어 자꾸만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 평소 찌질하다고 비난하던 그런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해버린 나 자신이 너무도 초라해져 견딜 수가 없다.


「젠장.」


욕을 뱉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새삼 이렇게 누운 채 빨아대는 담배가 오래간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선 무심코 옛 추억을 떠올려버렸다.


나도 그런 때가 있었지. 그땐 정말로 모든 게 즐겁고 행복했었는데…. 지금의 나는 왜 이렇게 돼버린 걸까? 어디서부터 어떻게,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내가 내린 어떤 선택이 시발점일까? 그게 아니면 다른 사람 때문에 내 인생이 틀어져 버린 걸까? 서서히, 그러나 치명적으로 부식되어간 내 삶은 이미 눈치를 챘을 땐 너무 망가져 버려 손쓸 도리가 없었다. 도대체 지금 난 왜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걸까?


담뱃재가 볼에 떨어진다. 뜨겁긴 하지만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니다. 나는 반쯤 타들어간 담배를 재떨이에 던져놓고선 눈을 감았다. 그간의 경험으로 터득한 것이 있다면 이토록 더러운 기분이 들 때는 그냥 잠을 청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 나는 아직 폐 속에 남아 있는 담배 연기를 쭉 내뱉은 후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자고 일어나면 한층 나은 기분이 돼 있을 것이다. 그래, 분명히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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