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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가 빛나는 밤에 종착지 (終着地)

역마살6dc93
2019-11-19 00:33:26 479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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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2월 - 런던, 여행의 시작


벌써 2번째로 맞이하는 런던의 겨울이지만, 쓸쓸하고 우울하기는 작년과 마찬가지다. 아침 9시 정도가 되야 흐릿한 해가 뜨고, 거의 매일 부슬비가 내리고, 오후 3시 정도면 다시 어둑해지는 런던의 겨울은 타지에서의 설렘도 금새 움츠러들게 만든다.

'아... 오늘도 비 오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몇몇 외국인 친구들을 만나러 옆 동네의 펍으로 걸어간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그곳에서 맥주 한잔을 들고 영어로 쓸데 없는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그녀가 홀로 펍에 들어왔다. 외국인들이 볼 땐 전혀 알 수 없겠지만, 한국인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나에게는 익숙한 그녀의 옷차림과 몸짓. 짙은듯 연한듯 세심하게 한 화장. 그녀는 펍 이쪽 저쪽을 긴장된 듯 돌아본 후 꽤나 긴 시간을 붐비는 바 앞에서 뭔가 곤란한듯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친구에게 맥주잔을 잠시 맡기고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한국분이시죠? 뭐 도와드려요?"
"네?!?! 아, 안녕하세요! 기네스를 주문하고 싶은데 바텐더가 안 와서요..."
"너무 사람이 많으면 가끔 그러더라구요... 일부러 그러는 것 같지는 않은데. 어차피 저도 주문해야 하는데 기네스 파인트로 주문하면 될까요?"
"정말요?? 네! 그래주면 너무 좋죠. 도와줘서 고마워요."


바텐더에게 페일 에일과 기네스를 한잔씩 주문하고 따라주기를 기다리는 중 나눈 짧은 대화에서, 그녀가 런던에 온 지 3달이 되었고, 시각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으며, 이 근처에 사는데 영국 펍은 처음와본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맥주가 나오고 내가 한번에 돈을 내려는데, 그녀가 나를 제지했다.

"아 안돼요! 도와주셨으니까 맥주는 제가 살게요! (바텐더를 향해 큰 목소리로) I pay for both!"

그녀의 귀여운 행동에 놀란 나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혼자 왔으면 같이 마시자고 제안했고, 그녀도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우리는 펍 한쪽에 앉아 어색하게 '짠'을 했고, 그녀는 부드러운면서도 진한 기네스를 한번에 거의 1/3을 마셨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에 도는 안도감.

"와 진짜 맛있어요! 아까 사실 그냥 나가려고 했는데 안 그러길 정말 잘했어요. 고마워요"

그리고 우리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친구들은 다들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며 이쪽을 지켜만 보다 우리가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눈 것 같자, 와서 인사를 하고 분위기를 약간 업시키고 떠났다. 지금 생각하면, 국적도 모두 달랐지만 참 의리있는 사내놈들이었다.



금방 한잔을 비운 우리는, 다음 잔은 서로가 산다는 핑계로 계속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금새 지났고, 밖에 나온 우리는 동네를 산책했다. 이때 나는 런던의 밤거리도 파리의 밤거리 못지 않게 낭만적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그리 늦지 않은 시간이라, 동네의 작은 타파스 바에 들어간 우리는 햄, 치즈, 올리브 그리고 작은 구이 요리 등 간단한 요깃거리를 나눠먹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만난 런던이라는 도시, 각자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 앞으로 어디로 떠나고 싶은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웨이터가 눈치 주는 것을 무시하며 타파스 바가 문을 닫기 직전까지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우리는 밖으로 나왔고, 함께 너의 동네까지 근처까지 걷기로 했다. 조용한 겨울 밤거리의 평화로움에 취한 우리는 점점 더 가까이, 발을 맞추어 걷게 되었고, 나는 아까 2시간 전 타파스 바에 앉았을 때부터 계속 생각하던 그 문장을 용기내어 말했다.



"아 근데 좀 속이 느끼하지 않아? 짜고 기름진 것만 계속 먹었더니 조금 그런 것 같은데. 나 집에 라면은 없는데, 떡볶이는 있어. 같이 먹을래?"
...
...
...
"응! 나 떡볶이 너무 먹고 싶었어! 영국 온 이후로 계속 먹고 싶었는데 한번도 못 먹었었어!"
...
...
...
그날 밤 우리는 매콤한 떡볶이와 적당히 달콤한 화이트 와인을 나눠 먹었다. 그 이후 두번 더 찾아온 런던의 겨울은 더 이상 쓸쓸하고 우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2017년 12월 - 서울, 여행의 끝

서울의 겨울은 아무리 옷을 껴입어도, 마치 벌거벗은 것처럼 춥다. 가을 내내 말라버린 잎새는 매서운 바람과 함께 저 멀리 회색빛 배경 속으로 흩어져 날아가고, 도시의 나무들은 앙상한 가지만을 흔들며 기나긴 겨울을 견뎌낸다.

작년 봄, 서울로 돌아온 우리는 운이 좋게도 각자 원하던 일을 하기 시작했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살며 서로의 거처를 오가며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의 리듬에 맞춰 살아가고 있었다. 주말에 힙한 동네의 맛집과 안 가본 동네를 가던 것도 잠시, 우리는 서울에서 어딘가를 구경 가는 일에 금새 흥미를 잃었다.

"주말에 어디갈까? 그 시립미술관에서 독일 디자인 전시한다던데"
"음... 사람 너무 많을 것 같아. 주차도 힘들고"

"우리 다음 주말에는 동해안 쪽 갔다 올까? 금요일 밤에서 가서 이틀 푹 쉬고, 바람도 쐬고"
"추운데 고생만 할 것 같은데. 나 회 별로 안 좋아하는거 알잖아"

"서울에는 왜 이렇게 갈 데가 없지? 할 것도 먹는 것 밖에 없고"
"그러게..."

"저녁 때 즉떡 먹으러 갈까?"
"아니, 어제 회사에서 먹었다고 했잖아"



우리가 런던에서 돌아와서였을까? 서울의 일상 속으로 순식간에 불시착한 우리는 일상의 반복 속에서 점차 생기를 잃어갔다. 여행의 설렘은 끝난지 오래였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가끔 함께 누워 마치 오래 전처럼 느껴지는 런던에서 찍은 사진을 돌려봤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서울을 탓하고 있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고, 우리의 여행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연말, 우연인지 아닌지 그녀와 나 모두 특히나 회사 일과 모임이 많았고, 우리는 연남동의 한 맥주 가게에서 시시한 이별을 했다.



이렇게 두번째로 맞는 서울의 겨울. 나는 아직 지난 여행에서의 짐을 정리하지 못했다. 우리는 언제쯤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신청곡은 쓸쓸한 겨울날 잘 어울리는 '결 KYUL - Silence'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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