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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디어 그녀의 하이힐에 관한 9cm의 짧은 고찰

Broadcaster 로페릭의_매콤달콤
2020-03-13 05:47:08 284 0 0

KBS무대 <그녀의 하이힐에 관한 9cm의 짧은 고찰>

김희진


[기획의도]


하이힐의 마법을 경험해본 여자일수록 

자신을 당당하게 빛내줄 유리구두를 기다릴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의 발걸음은 ‘구두’가 아닌 ‘마음’이 움직이는 것처럼, 

현 시대의 유리구두라고 할 수 있는 명품구두에 환장하는 여자 주인공이 

왕자가 아닌 구두수선공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사랑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고 싶었다.

 

[등장인물]

최주미 (여, 32세)

하이힐 마니아로 짧은 다리에도 늘 캣워크를 구사하는 

당당함과 도도함을 겸비하고 있다. 

신분상승을 시켜줄 남자를 만나고 싶은 욕망이 있으며, 

작은 여성잡지사의 5년 차 에디터로서 나름의 긍지를 가지고 있다.

 

김홍일 (남, 32세)

집 없고, 차 없고, 직장 없고, 걱정 또한 없는 실업자로 

아버지의 구두수선집에서 일을 돕기 시작했다. 

시시껄렁하게 농담을 잘해 능글맞게 보이지만 

마음 가는대로 행동하는 단순함과 진솔함이 있다.

 

황민재 (남, 37세)

종합병원 내과 의사로 대중에게도 잘 알려진 스타다. 

잘난 만큼 겉모습이나 조건으로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배진영 (여, 33세)

잡지사의 차장이자, 주미의 선배. 

언제나 운동화를 신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주미에게 친언니 같이 훈계도 종종 한다.

 

송도희 (여, 28세)

주미의 잡지사 후배. 맞는 말만 따박따박 하며 주미의 신경을 긁어놓는 하극상.

 

김덕재 (남, 58세)

홍일의 아버지. 구두수선공으로서 투철한 직업정신을 발휘하며 홍일과 티격태격한다.

 

그 외 인물

박국장, 민재 친구 1, 2 / 여자 

 

*대본 하실 때 편의를 위해 약간의 수정이 있었습니다

몇몇 도희대사 → 동료대사로 수정

여자 1,2여자로 통합

진영 대사 하나 삭제


[여자]

주미 

진영 도희 여자


[남자]

홍일 친구1 동료

민재 덕재 친구2 박국장


[Ctrl과 F] 혹은 [F3]를 누르시고 자기 역할 자음을 넣으시면 쉽게 대본하실 수 있습니다!



(E) 교차로 위의 차들이 클락션을 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겹쳐지는 거리 한복판.

   그 사이로 또각또각 울려 퍼지는 구두 굽 소리.


 

진영(F): 황민재 만날 준비는 다 된 거야? 

보통 까다로운 게 아니라던데~


주미: 그럼~ 오늘을 위해서 반짝 다이어트까지 했는데! 

바디라인 살려주는 타이트한 원피스 입어 주고, 

머리는 발랄하게 살짝 말아주고, 다리가 가장 예뻐 보인다는 

9 센티 하이힐까지 준비 완료야. 이정도면 아무리 까다로운 황민재도 문제없다고.


진영(F):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황민재랑 선보러 가니? 

너 지금 닥터황 인터뷰하러 가는 거야. 정신 차려 최주미.


주미: 그래서 선배가 나이 서른셋에 잡지사 차장은 될 수 있어도 

아직 노처녀 딱지는 못 떼는 거야. 

기자라면 매 순간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것처럼 

결혼 못한 여자라면 매 순간 방심하면 안 되는 거라고. 

것도 두 번 오기 힘든 이런 기회엔!

 

진영(F): 그래, 인터뷰 잘 하고 기사만 잘 써준다면 

9 센티 하이힐을 신든, 15 센티 킬 힐을 신든 상관없는데 

너 구덩이 조심해라~ 하이힐 그거 한 방에 훅 간다.


주미: 구더기 무서우면 애초에 장맛을 보지 말았어야지. 

매일 운동화 끈 질끈 매고 몸소 기자 정신 보여주는 선배가 어찌 알겠어…. 


(E)그러나 그 순간 삐걱하며, 한쪽 발을 접질리며 넘어졌다. 


주미: 악!!


진영(F): 여보세요? 주미야, 야 최주미!!


주미: (혼잣말로) 어떡해… 부러졌잖아.


홍일: 저기요, 이리 줘 봐요.


주미: (경계하는) 뭐예요?

 

홍일: 글쎄 이리 줘 봐요.


(E) 그 남자는 주미의 구두를 가져가 바닥에 쾅쾅 내려쳤다.

 

홍일: 자요~ 됐죠? (걸어가며) 하이힐 그거 치명적이에요. 

원래 높은 데서 떨어지면 더 처참한 법이거든.

 

주미: 저기요~!!

 

구두수리점 

(E) “탕탕” 망치로 구두 굽 박는 소리.


덕재: 어떤 놈인지 실하게도 박아놨네.


주미: 수명이 다 됐는지 자꾸 홱까닥 하네요.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비싸게 주고 산 건데….


덕재: 그래도 영영 꼴까닥 할 정도는 아니야. 

잘만 관리하면 앞으로 삼사년은 더 신을 수 있겠어. 어떻게, 리폼 좀 해 줘?


주미: 구두도 리폼이 돼요?


덕재: 그럼~ 옷처럼 찢었다 붙일 수도 있고 머리처럼 염색할 수도 있어.

 

주미: 그래요? 음… 그럼 그렇게 해주세요. 

이 촌스러운 리본 장식 떼버리고 굽도 더 가는 걸로 해서 섹시하게요. 

내일 다른 구두 신고 와서 맡길게요.


덕재: 이 녀석은 주인 잘 만나 회춘하겠네.

 

(E) 가게 문이 드르륵 열렸다.


홍일: (하품)흐아아암~

 

덕재: 첫 날부터 지각이야? 그러려면 그냥 집에 들어앉아서 취직 궁리나 해!


ㄱㄷ주미, 홍일: (알아보고) 어!


홍일: 다리 괜찮아요?

 

덕재: 뭐야? 둘이 벌써 대면 한 거야?


홍일: 그런 게 있어요. 제가 몇 번을 말해요.

어디에 취직을 해야 하는 지, 어떻게 해야 떼돈은 버는 지 

이런 건 백 날 고민해봤자 시간 낭비에요. 

요즘 세상에는 어떻게 해야 백수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게 훨씬 현명한 거라니까요. 

이런 게 바로 시대가 요구하는 심미안이란 거예요.


덕재: 아이고 그러십니까? 그럼 그 심미안으로 봤을 때, 

오늘 니가 내 손에 맞아 죽을 것 같냐, 밟혀 죽을 거 같냐?

 

홍일: 팔 대 이 정도로 퉁 치겠죠.


덕재: 틀렸어 녀석아, 오 대 오다!

 

(E) 구두 밑창이 날아와 홍일의 뒤통수를 가격한다.

 

홍일: (괴로워하는) 아~!


(M) 병원


주미: (한껏 교태스럽게) 아~


민재: 이제 됐어요. 내려오세요. 다행히 뼈에는 무리가 없어요. 

갑자기 근육이 좀 놀랐을 거예요. 

진통제랑 연고 줄 테니까 통증 있을 때마다 발라줘요.


주미: 고마워요. 황 선생님 아니었으면 병원 근처도 못 왔을 거예요. 

인터뷰 해주신 것도 감사한데 이렇게 치료까지….


민재: 이러면서 미인 얼굴 한 번 더 보는 거죠. 

다리는 이제 됐고, 구두는 치료 했어요?


주미: 그냥 응급 처방만요.


민재: (쇼핑백을 주미에게 내밀며) 자! 나 만나러 오다가 그렇게 된 거니까 

치료는 확실히 해둬야겠죠?


주미: 이게 뭐예요?


(E) 쇼핑백에서 부스럭부스럭 상자를 꺼내 연다.

 

주미: 어머… 황선생님…. 이거, 구두잖아요. 이걸 왜…

 

민재: 하이힐 신는 사람은 하이힐만 신는다면서요? 

혹시 마음에 안 드시면…


주미: 아뇨, 마음에 들어요. 아주 쏙 들어요! 

(하다가 아차 싶어) 그래도 제가 받기에는 좀…

 

민재: 아, 부담 갖지 마시고 받아 주세요. 

친구 녀석이 매장을 하나 오픈해서 안 그래도 기회만 보고 있었거든요. 

제 기사 잘 써달라는 뇌물이기도 하고요.

  

(M) 회사


도희: 선배님 꿀단지 숨겨 놓으셨어요? 

하루 종일 책상 앞에서 꼼짝을 안 하시네요?

 

주미: 고작 꿀단지가 비교가 돼?


도희: 뭔데요? 

(가까이 와서 보고) 어머머, 이거 마놀로블라닉 신상 아니에요? 

와~ 감쪽같다. 에이급인가 봐요?


주미: (도희의 손을 탁치고) 자기 보는 눈 영 꽝이네…. 이거 진품이야~


도희: 에이 선배! 다 알만 한 사람끼리….


주미: 진짜야! 

대한민국에 딱 열 켤레 밖에 없는 한정판 중 하나라니까? 보증서 보여줘?


도희: 치~ (뾰로통해서) 인터뷰 다녀오겠습니다!


(E) 도희 나가는 발걸음 소리.

 

주미: (하하하 기분 좋게 웃어재낀다)


진영: 쯧쯧, 기획안으로는 맨날 발리면서 

그깟 명품 구두로 기죽이니까 그리 좋아? 암튼 여자들이란….


주미: 선배는 여자 아닌 것처럼 말 하지 마. (은밀하게) 선배, 스포츠 브라지?


진영: (진지하게) 왜? 비춰!?

 

주미: 운동화만 신고 다니는 여자가 속옷이라고 다르겠어?


진영: 참나, 난 또... 지금 구두 얘기 하지, 누가 속옷 얘기 하재?


주미: 그니까, 속옷이나 구두나 여자의 자존심인 건 마찬가지라고. 

근데 속옷은 까서 보여 줄 수 없으니까 더더욱 이 구두에 목매는 거지.


진영: 그래서 명품 구두 신으니까 

삼십 이년 동안 줄기차게 상해 왔던 자존심이 회복이 돼?

 

주미: 꼴랑 구두 하나로 되겠어?


진영: 그럼, 또 받아내겠다고?


주미: 아니, 이제 진짜배기 명품 구두를 내 걸로 만들어야지.

  

(M) 회사복도

 

(E) 복도에 울려 퍼지는 주미의 또각또각 구두굽 소리.  그리고 맞은편에서 휘파람을 불며 걸어오는 홍일.

 

주미: 어! 아저씨는요?


홍일: 잠깐 나가셔서 제가 대신 왔어요. 

요즘 이렇게 구두 수거하는 데가 어딨다고…. 안 그래요?

 

주미: 이걸 하루도 안 거르고 이십 년 동안 해오셨으니 

아저씨가 인물이시라는 거죠. 참, 제 책상 밑에 보면 구두 하나 있거든요? 

그거 앞에 달린 장식 떼고… 어..

아니다, 그냥 아저씨 가져다드리면 아실 거예요.


홍일: 네, 책상 밑이요~


(E) 사무실 문이 “끼익” 열렸다 “쾅” 닫히는 소리.

 

홍일: 여기가 최기자님 책상 맞아요? 구두 하나 있을 거라고 하던데…

 

도희: 치~ 한 번 신어보지도 않고 벌써 광을 내시겠다? 이거예요~

 

홍일: 여자들은 이래서 문제야. 

새 거 같구만… 이게 벌써 싫증나면 어쩌자는 거야?


(M) 구두수리점

(E) 미닫이문이 거칠게 열렸다.


주미: 잠깐!!!


홍일: 어! 마침 잘 오셨네. 지금 막 따끈따끈한 구두가 완성됐습니다!


주미: (망연자실한) 세상에… 당신 미쳤어?


홍일: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스러운) 예?


주미: 헌 구두 가져가랬더니 

한 번 신어보지도 못한 구두를 가져가서 이 꼴로 만들어 놔? 

하루 종일 구두 보고 사는 사람이 딱 보면 이게 얼마짜린 줄 모르겠어? 

내가 설마 명품 구두를 이런 동네 구멍가게에 맡겼겠냐고!


홍일: (은근히 기분 나쁜) 동네 구멍가게나 지키고 있는 사람이 

불량식품하고 명품을 구분할 수나 있겠습니까? 

나는 그냥 아가씨가 책상 밑에 구두 가져가서 

장식 떼 달라기에 그렇게 한 죄밖에 없어요. 

만약 마음에 안 들면 도로 물어주면 되는 거고……


주미: 뭐? 물어내? 아니! 당신은 못 물어내. 

이 회사 사람들 구두를 몽땅 닦아준다고 해도 

여기 붙어 있던 장식 값 하나도 안 돼. 알아?


홍일: 우리 집 노인네가 나 무시 한다고 

아가씨까지 그래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인데, 사람 잘못 봤어요. 

줘 봐요. 장식 아직 안 버렸으니까 도로 붙여 줄게요.


주미: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는) 이거 못 놔?!

 

(M) 회사


진영: 구두 굽 좀 갈아. 바닥에 끌리는 소리 듣기 싫어 죽겠어. 

망사스타킹 사이로 다리 털 삐져나온 거랑 뭐가 다르냐?


주미: 양심도 없다. 

어제까지 기사 안올리면 잡아먹을 것처럼 군사람이 누군데? 

이거 갈 짬도 안 나는 게 잡지사 기자의 현실이야.


진영: 그래서 한 번씩 수거 도시잖아. 출 퇴근 길에 잠깐 들려도 되고.


주미: 미쳤다고 저길 또 가? 

아무리 아저씨한테 죄송해도 내가 저길 또 가면 최주미가 아니다!

 

(E) 휴대폰 울리는 소리.


주미: 네, 황 선생님~ 기사는 처음 방향에서 수정되는 거 없어 갈 거예요. 

네. 점심이요? 저희 회사 앞으로요? 네 그럴게요. 이따 봬요.

 

진영: 점심 먹재?


주미: (환희에 차 발을 세게 구르며) 으~

 

진영: 얼씨구?


주미: 나 오늘 화장 어때? 

이럴 줄 알았으면 새로 산 원피스 입고 나오는 건데…. 

(심각하게) 나 오늘 속옷은 뭐 입었더라?


진영: 점심 먹자는데 속옷까지 체크하는 건 뭔데? 아무튼 오버는~


주미: (숨을 후 내쉬다가 깜짝 놀라) 아! 구두 굽! 다리터얼~!!


(M) 구두수리점

 

(E) 조심스럽게 미닫이문 열리는 소리.

 

덕재: (반색하며) 이게 누구야? 아들놈이 실수 했단 얘긴 내 들었어. 

그렇다고 발길을 뚝 끊으면 이 늙은이 섭섭하지….


주미: 죄송해요. 요 며칠 손가락만 살아 움직였다는 말이 맞을 거예요. 

근데… 아드님은 아직 안 나오셨나 봐요?


덕재: 같이 있으려니 군내가 나서 밀린 구두 배달 보냈어.


주미: 이거… 구두 굽 좀 갈고 깨끗하게 손질하려고 하는데 

점심시간 전에 될까요? 급한 약속이 생겼거든요….


덕재: 누구 부탁인데 안 돼? 한 트럭이 쌓였어도 먼저 해줘야지!


주미: 감사합니다. 그럼 그 전에 찾으러 올게요.


(E) 미닫이문 열리고 닫히는 소리.

 

홍일: 웬일이에요? 구멍가게에 발걸음을 다 하시고?


주미: 구멍가게도 누가 지키고 있으냐에 따라 다르거든요. 

내 구두 손도 대지 말아요~ 이번엔 용서 못해요!


홍일: (약올리 듯이 혼잣말로) 두고 보면 알겠죠~


(E) 미닫이문 열리고 닫히는 소리.

 

덕재: 또 누구 발을 조몰락거리다 왔기에 실실대?


홍일: 있어요. 무 다리에 무좀균이 득실대는 여자.

 

덕재: 그래, 네놈은 그런 여잘 만나야 돼. 

자고로 발은 거짓말 안 하거든. 

종아리에 알이 쨍하니 박히고, 발에 무좀이 꽃폈으면 

뛰어 다니고 또 뛰어다니면서 열심히 산 여자야. 그거면 됐지 뭘 더 바래?


홍일: 그러는 아버지는 왜 그거에 만족 못 하고 

매끈한 다리를 찾아 평생을 헤매셨을까? 

우리 엄마 종아리 알만큼 짱짱한 것도 드물지 않았어요?

 

덕재: 저놈이! 이익! (신발 밑창을 던진다)

 

(E) 덕재가 신발 밑창을 힘껏 던졌지만 홍일은 턱하니 잡아낸다.


홍일: 헤헤, 천호동 말발굽 실력이 다 어디로 가셨나?


덕재: (가슴에 통증이 느껴지는) 흡, 아이고…


홍일: 그만 합시다. (하다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아버지?!, 괜찮으세요?

 

덕재: (힘없이) 천호동 말발굽 실력이 어디가겠냐…


홍일: 아버지! 안 되겠어요. 병원으로 가요.

 

덕재: (가슴을 부여잡고) 점심시간까지 해주기로 한게 한 트럭이야.

 

홍일: 지금 저깟 구두가 문제예요? 어서요!

 

(M) 회사

(E) 주미는 급하게 뛰어 들어와 헉헉거렸다.

 

도희: 선배, 점심 약속 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주미: (숨을 쌕쌕거리며) 송기, 나 구두 좀 빌려줘.


도희: 갑자기 웬 구두요?


주미: 갑자기 구둣방이 문이 꿈쩍도 안 하니까 그렇지. 

(절박한) 내가 이 은혜는 잊지 앉을게. 

그래, 신 대표 인터뷰 그거 내가 한다!


도희: 그래도 사이즈가 안 맞는데 어떻게 빌려드려요? 옷도 아니고….


주미: 사이즈가 왜 안 맞아? 송기 삼백오십이잖아. 나도 삼백오십이야.


도희: 삼백오십이라도 저는 삼백에 가까운 작은 삼백오십이고, 

선배님은 사백에 가까운 큰 삼백오십이잖아요. 

구두는 금방 늘어난단 말이에요. 차장님한테 부탁해 보세요.


(M) 레스토랑

(E) 레스토랑에 흐르는 우아한 경음악 소리.

 

주미: 하...개자식….

 

(E) 민재가 칼질하다 접시를 긁는소리에 정신을 차린 주미.

 

주미: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싶은) 아, 아니요. 

황 선생님한테 한 소리가 아니라…


민재: 주미씨 오늘 딴 사람 같아요.


주미: 기사 때문에 요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민재: 원래 그렇게 기사 한 번 쓰려면 며칠씩이나 밤새고 그래야 돼요?

 

주미: 그래도 이건 양호한 거예요. 

마감 때 오면 죽어요, 죽어. 

(하다가 경박스런 말에 아차 싶은) 아니, 다들 죽지 못해 쓰죠.

 

민재: 야근에, 외근에, 걸핏하면 밤새고…. 월급은 많이 받아요?

 

주미: 많이 받기는요, 이 업종 쓰리딘 거 다 아는데...


민재: (음식을 씹으며) 그렇게 받아가면서 뭐 하러 그 고생을 합니까?


주미: 네? 

(약간 언짢은) 뭐 일을 꼭 돈으로만 하는 건 아니니까요…. 

(황급히 화제를 바꾸려) 황 선생님 기사는 

이번 달 특집으로 스무 페이지가 실릴 거예요.

 

민재: 네, 주미씨가 알아서 해주세요.


주미: (어렵게 말 꺼내는) 마감 끝나면 제가 밥 한 번 살게요. 다음주…

 

민재: 이거 어쩌죠? 들어가 봐야겠는데…. 

워낙 시간을 기약할 수 없는 일이라, 그냥 제가 오프 때 연락드릴게요.


주미: (애써 표정 관리 하며) 네, 그러세요.


(E) 의자 끄는 소리.


민재: 근데, 주미씨 키가 이렇게 작았어요? 

여자들 화장빨 보다 더 무서운 게 하이힐 빨이라더니...

  

(M) 구두수리점

(E) 주미는 굳게 닫힌 문을 힘껏 걷어찼다.


주미: 너 때문에, 너 때문에!!


홍일: 남의 가게에 뭐 하는 짓이에요? 아 이거 흠집 다 났네.


주미: 허! 그쪽이야 말로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제 구두 저 안에 있는 거 안 보여요?


홍일: 아~ 저거요? 그게… 사정이 좀 있었어요.


주미: 아~ 저거요?? 그게 지금 말이에요? 

그쪽이 무슨 사정이 있었든 그런 건 하나도 안 중요해요. 

중요한 건, 난 그쪽 때문에 두 번이나 물 먹었다는 거고, 

무엇으로도 보상이 안 될 엄청난 기회가 날아갈 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홍일: 거 되게 빡빡하게 구네. 사정이 있었다고 안 합니까. 

사람 얘기는 들어 보지도 않고 자기 기회 날린 것만 중요해요? 

무슨 여자가 이렇게 퍽퍽해?


주미: 세상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백수 날건달하고 상종을 하는 내가 등신이다! 등신!!


(E) “쾅” 미닫이문 열리는 소리.

(E) 홍일은 주미의 구두를 가지고 나와 바닥에 툭 던졌다. 



 주미: 이봐요! 지금 뭐하는 거예요?


홍일: 가지고 가세요. 

구두를 아무리 깨끗이 닦으면 뭐 합니까, 당신 인격이 이 모양인데….


주미: (황당하고 분한) 야!!


(M) 회사


주미: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날라리, 양아치, 백수 날건달, 한심한 놈, 머리에 든 거 없는 놈…

 

진영: 아~ 본드냄새~ 점심까지 거르고 해야 하는 일이 이거야?


주미: 천하의 최주미를 물로 봤다 이거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물에는 물이야.
너 오늘 이 구두 굽 빼려면 힘 꽤나 써야할 거다.


진영: 그만 해.


주미: 아직 시작도 안 했어. 지깟 게 나를 얼마나 무시했음 번번이!


진영: 아저씨 간암이시래.

 

주미: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진영: 아침에 가게 들렸더니 홍일씨가 그러더라. 

왜 요 며칠 안 보이셨잖아. 지금 병원에 계시다나 봐.


주미: 아니… 왜… 멀쩡 하셨잖아.


진영: 그러니까, 고집부리고 일 하시다 쓰러지신 거지. 

그래서 저번에 그렇게 문 닫았던 거고….


주미: 뭐? 그 얘길 왜 지금 해!


진영: 기지배, 휴지까지 갖다줬음 코는 니가 좀 풀지?


(M) 구두수리점 앞


(E) 후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주미 (난처한) 비온다는 소리 없었는데….

 

(E) 미닫이문 열리는 소리.


홍일: 우산 없어요?


주미: (괜히 헛기침 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홍일: 들어가요.


주미: 됐어요. 소나긴데요 뭐.

 

홍일: 누굴 기다리는지 모르겠지만 들어가서 기다리라고요. 

그 구두 엄~청 비싼 거라면서요. 비싼 가죽도 비 맞으면 대책 없어요.


(E) 미닫이 문소리. 빗소리가 작아진다.

 


홍일: 앉아요. 아버지가 이 무좀패치 전해주라네요. 

어렵게 구하셨다는데, 효과는 아주 직빵이래요. 

(쯧쯧 혀를 차며) 여자가 무좀이 웬…

 

주미: 부탁한지 오래 돼서 까먹으신 줄 알았는데~ 

역시 아저씨 꼼꼼하신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쭈뼛대다) 진작 그렇게 말했음 되잖아요.


홍일: 내 사정 같은 건 안 중요하다면서요.


주미: 그게 그쪽 사정인가? 주인아저씨 사정이지? 아저씬 좀 어떠세요?


홍일: 신장개업으로 바쁘세요.


주미: 네? 입원하신 거 아니었어요?


홍일: 거기도 구둣방을 하나 차린 거 같아요. 

환자들 의사들 손님들 할 거 없이 구두를 죄 다 닦아나서 

병원이 아주 반짝반짝 빛이 나요.

 

주미: (작게 웃으며) 아무튼 아저씨도….

 

홍일: 어, 웃을 줄도 아네요?


주미: 이거 귀한 거예요. 

왕년에는 남자들이 이거 한 번 보려고 줄을 서서 웃기고 그랬는데?


홍일: 그런 여자가 왜 남자한테 바람이나 맞고 다니실까?


주미: 누가 바람을 맞아요?


 

(E) 이때 울리는 전화벨 소리.


주미: (들으라는 듯 크게) 네, 민재씨. 벌써 도착 했어요? 

아… 그래요? (목소리가 작아지는) 할 수 없죠. 

뭐. 아니에요~ 일하느라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된지도 몰랐네요. 네. 네.

 

홍일: 쯧쯧쯧. 바람 아니라 비바람을 맞고 다니시네. 

나한테는 잘만 쏘아붙이더니 그 입도 사람을 가리나 봐요?

 

(E) 주미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홍일: 그 나이에는 밥심 아니면 못 버텨요.


주미: 그 나이라뇨? 

저는 아직 이십 대라 끓어 넘치는 열정으로 버텨요.

 

홍일: (코웃음 치며) 서른 둘 최기자의 죽이는 연애칼럼. 

나 이래봬도 정기 구독자니까 너무 무시하지 말아요. 

나이도 내가 한 살 많은데 까짓 거 퉁쳐서 말 놓게 해줄게요.

 

주미: 나는 우리가 동갑이라고 들은 거 같은데? 아저씨한테?


홍일: 생일이 빨라요. 

그쪽도 나한테 사과할 일 있으니까 진짜 맛있는 밥 한 끼로 퉁 칠래요?


(M) 구두점 안 조촐한 상차림

 

주미: 진짜 맛있는 밥이라는 게 컵라면에 캔맥주?


홍일: 비오는 날에는 이 컵라면에 시원한 생맥주만한 게 없던데? 

(맥주를 꿀꺽꿀꺽 삼키고) 왜? 지금쯤 분위기 좋은 데서 칼질 해야 하는데 

고작 이런 구둣방에서 고무냄새 맡으려니 비위가 상해?


주미: 누구를 진짜 속물로 알아?

 

홍일: 여자들은 의사 나부랭이가 그렇게 좋나?


주미: 어떻게 알았어?


홍일: 나 정기 구독자라니까~

 

주미: (딸꾹질을 하고) 의사 좋지~ 근데 것보다 더 좋은 건… 

32년 만에 처음으로 명품 구두를 신은 내 모습이고.


홍일: 이러니 여자는 속물이라는 말이 안 나와?


주미: 여자들은, 저마다 가슴 속에 

예쁜 유리 구두 하나씩을 가지고 있거든…. 

아무리 별 볼일 없는 나라도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줄 구두를. 

(슬퍼지는) 근데 그 구두가 나한테 맞지 않는 건가 봐.

 

홍일: 내 발이 다 짓물러 터지는데 그깟 예쁜 신발이 다 무슨 소용이야~


주미: 뭐하는 거야~ 남의 발을 왜 만지고 그래~


홍일: 이리 내 봐~ 나 이래봬도 마사지 자격증까지 있는 사람이야. 

이거 봐. 여자들은 자기 화장하는 건 중요하면서

발이 퉁퉁 붓는 건 신경 안 쓴다니까?


주미: 됐어. (일어나다 발이 엉키는) 어~ 어~


(E) 두 사람이 함께 넘어지며 의자가 넘어졌다


주미: (무거운) 뭐 하는 거야?! 안 일어나고 뭐해!


홍일: 내가 경고 했지? 하이힐 그거 치명적이라니까~

 

(E) 주미에게 입을 맞추는 홍일.


(M) 회사


주미: (혼잣말로 나직이) 미쳤어, 미쳤어.

 

박국장: 저번 달 황민재가 끌어올린 판매 부수 절반만 유지하자.


진영: 황민재도 황민재였지만, 콘셉트가 좋았어요. 

성공을 넘어 여러 가지 활동으로 재밌게 사는 인생이 이십대 독자들한테 먹혔죠. 

그래서 이번에도 거기에 초점을 맞춰보는 게 어떨까 해요.


동료: 황민재니까 그게 먹혔죠. 

요즘같이 청년실업자니, 

팔십팔만 원 세대니 하는 이런 때에 그런 게 호응을 얻겠어요?

 

진영: 바로 그거야. 

호응, 공감 그걸 얻으려면 그 주체가 그들이 되면 되지 않겠어?


동료: 그들? 청년실업자요? 


박국장: 청년실업자라고 인생 즐기지 말란 법 없다?

 

진영: 그렇죠!


박국장: 근데, 진짜 그렇게 건강한 사고를 가진 사람을 찾기 쉽겠어?

음, 최기자 생각은 어때? (주미가 대답이 없자) 최기자!


주미: (혼잣말로) 괜찮아. 최주미, 괜찮아! 별 거 아냐!


박국장: 오호~ 그래 최기자. 누구 있어?


주미: (그제야 상황 파악이 되는) 네?

 

(M) 병원


홍일: 인터뷰는 무슨…. 내가 잡지에 나올 군번이 되냐?


주미: 너가 어디가 어때서? 

자기 일 귀한 줄 알고 열심히 하는 모습이 얼마나 멋있는데~ 

(절박한) 나 한 번만 살려주라. 

이렇게 황금 같은 주말에 병원까지 온 성의를 봐서라도….


홍일: 어떻게 하면 되는데….


주미: 자세히 얘기 좀 해 봐. 그럼 회사원 생활도 했던 거네?

 

홍일: 응. 아, 그렇게 되면 인터뷰 자격 미달인가?


주미: 아니, 더 잘됐어. 자기 의지로 청년실업자의 길을 택한 거니까. 

그럼 진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어? 

멀쩡히 회사까지 다녔으면 부모님의 기대나 

주위의 만류 같은 게 있었을 거 아니야.

 

홍일: 한동안 미친놈이었지. 

근데 이게 참 재밌는 게 그러고 나니까 처음에는 날 미친놈 취급하던 친구들이 

하나 둘 나한테 상담을 해 오게 되더라고. 

근데 웃긴 게 결국 이놈 저놈 할 거 없이 

내가 했던 거랑 똑같은 고민을 하더라는 거야. 

그걸 보면서 난 내 선택이 옳았구나 생각한다.


주미: 그래서 아저씨 구둣방에서 일 하게 된 거고?

 

홍일: 사실 그게 먼저야. 

옛날부터 종종 아버지 일 도와드리곤 했는데 

회사 다니면서 내 일 바쁘니까 안 하게 되더라고. 

그러고 나니까 길을 걷다가도, 회사에서도, 사람들 신발밖에 눈에 안 들어오는 거야. 

부장님은 사모님하고 사별하신 뒤로 똑같은 구두만 신으시기에 

하나 선물해 드리게 되고, 팀장님은 현장에서 뛰어다니시느라 

먼지투성이가 되기 일쑤니까 회사에 구두약 하나 챙겨 놓았다가 닦아드리게 되고…. 

그러니까 좀 사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회사 그만 둔 거야. 

이거 우리 노인네한테는 비밀이다. (잠시 후) 왜 그렇게 봐?


주미: 아, 아니야. 그 선택을 후회해본 적은 없고?


홍일: 근데… 요즘 들어 후회될라 그런다. 

나도 수재 소리 꽤 들었는데 의사가 됐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주미: ....그게 무슨 소리야?


민재: 주미씨!


주미: 어머, 민재씨~


민재: 주미씨가 병원에는 어쩐 일이에요?


주미: 인터뷰 하러 왔어요. 

건강한 청년 실업… 아니, 청년들을 주인공으로 기획기사 쓰고 있거든요. 

이쪽은 인터뷰 주인공이고요.

 

민재: 안녕하세요. 황민잽니다.

 

홍일: 아~ 그 유리구두? 

허구헌날 여자는 바람맞히면서 차 마실 여유는 있으신가 봐요?


주미: 야!! (이를 악물고 홍일에게 웃으며) 조심해서 올라가라.

 

홍일: (가면서) 나는 항상 대기 중이다~

 

(E) 홍일은 슬리퍼를 질질 끌며 가버렸다.



주미: 민재씨, 저 친군 신경 쓰실 거 없어요.

 

민재: 알아요. 

주미씨가 저런 수준 떨어지는 사람이랑 

뭐 특별한 관계일 거라고 생각 안 해요. 다만, 좀 화가 나네요. 

주미씨가 어떻게 보였기에 저런 사람하고 얽혔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 사람의 품격은 주변 사람들에 의해 가장 먼저 판가름이 나는 거예요.


주미: 저기 민재씨, 저 친구 자기 일에 긍지 가지고 열심히 사는 친구에요~ 

보기에 좀 껄렁해보여서 그렇지 배울 점도 많고요.

 

민재: 점점 더 신경이 쓰이는데요? 제가 너무 긴장을 안 하고 있었나 보네요. 

제 눈에 예쁜 건 남의 눈에도 그런 법인데.

 

주미: 그런 거 아니에요….


(M) 회사 

(E) 빠르게 타이핑하는 주미.

(E) 녹음기에선 인터뷰를 했던 홍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주미(F): 선택을 후회해본 적은 없고요?


홍일(F): 근데… 요즘 들어 후회될라 그런다. 

나도 수재 소리 꽤 들었는데 의사가 됐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E) 열심히 타이핑하다가 멈칫하는 주미.

(E) 녹음기 재생 버튼을 삑 누른다.


홍일(F): 요즘 들어 후회될라 그런다. 

나도 수재 소리 꽤 들었는데 의사가 됐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고.


(E) 생각에 잠긴 주미. 그순간 갑자기 누군가 외쳤다.


홍일: 야식 배달 왔습니다~


주미: 엄마 깜짝이야!

 

홍일: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그렇게 놀래?


주미: 누, 누가 놀래? 너는 딸랑 컵라면만 사왔니? 컵라면엔 맥주 몰라?


홍일: (어이가 없는) 이 여자 꾼 됐네.

 

(E) 컵라면을 후 불어 후루룩 먹는 소리.


홍일: (입에 라면을 물고) 구두 안 가져갈 거야?


주미: (홍일 흉내 내며) 구두를 아무리 깨끗이 닦으면 뭐 합니까 

당신 인격이 이 모양인데! 하면서 던지는 구두를 주워 갈 여자가 어딨어?


홍일: 그럼 그냥 내가 가진다?

 

주미: 여자 구두 가져가서 뭐하게? 혹시… 페티쉬 같은 거 있어?


홍일: 페티쉬가 있다 해도 무좀균 득실득실한 구두는 사양입니다~ 

맨날 그렇게 앞이 뾰족한 하이힐만 신고 다니니까 

무좀이 낫겠어? 저거 발 퉁퉁 부은 것 봐.

 

주미: 내 발 진짜 못생겼지….


홍일: 그나마 너한테서 가장 예쁜 게 발이야.

제일 너답고 솔직하잖아.얼굴은 다소 인위적인 티가 나지만…. 

따지고 보면 그 발 때문에 우리가 가까워지기도 했고.

 

주미: 저… 의사가 될 걸 그랬다는 말… 그거 무슨 뜻이야?


홍일: 기자가 이렇게 촉이 무뎌서야 되겠어? 그게 무슨 뜻이겠냐?


(E) 이때 울리는 주미의 전화벨.


주미: (목소리를 가다듬고) 네, 민재씨. 밥 먹고 있었어요. 지금요?


(M) 회사 앞


(E) 차 문의 쾅 닫는 소리


주미: 민재씨, 갑자기 연락도 없이 웬일이에요?


민재: 주미씨가 다른 남자랑 저녁 먹을까 봐 왔는데, 제가 한 발 늦었네요. 

혹시 그때 병원에서 만난 그 친구에요?

 

주미: 아, 아니에요~ 맞, 맞아요.


민재: 괜찮아요. 그 친구한테 고마운 것도 있으니까요. 

그 친구 아니었으면 내가 주미씨 얼마나 좋아하는지도 몰랐을 텐데.


주미: (잠시 뜸을 들이고) 저기, 민재씨…. 

저는 머리가 단순해서 어렵고 복잡한 건 딱 질색이에요. 

민재씨가 어떤 마음인지 잘 모르겠어요.

 

민재: 그럴까봐 확실히 말해주려고 왔잖아요.

 

(E) 민재는 자동차 본네트를 열고 주미에게 뭔가를 건냈다.


 주미: 이게… 뭐예요?

 

민재: 우리 진지하게 만나보지 않을래요?

 

(M) 회사


도희: 아싸 가오리~ 못해도 5캐럿은 되겠다! 

쓰디쓴 인고의 세월을 견디고 선배님이 드디어 열매를 맛보시네요!

 

주미: 청혼 받은 거 아니니까 오버하지 마. 아직 대답도 못 했어.


도희: 아~ 뜸을 들이시겠다?


주미: 아니, 진짜 모르겠어서.


도희: 이거 안 보여요?


주미: 보여.


도희: 근데 모르겠어요?


주미: 응.


도희: 하나님 아버지, 선배님이 긴긴 시간 외로움을 홀로 견디다 눈이 멀어 

결국 똥인지 된장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주미: (괴로운) 진짜 뭐가 똥이고, 뭐가 된장일까?


도희: 그걸 꼭 찍어 먹어봐야 알아요? 

지금 선배님 눈에 보이는 거, 반짝반짝 거리는 거, 이게 진짜죠. 

보이는 것만 믿어요. 괜히 눈에 보이지도 않는 감상에 젖어서 고민 하지 말고요. 

선배님 지금 이거 버리면 두고두고 눈에 안 밟힐 자신 있어요?


주미: 세상에 이 다이아만 있는 건 아니잖아.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내가 선택한 돌덩이가 

나중에 다이아가 될 지 어떻게 알아?

 

도희: 서른둘이면 애를 키워도 빠듯한 나이에 

무슨 돌덩이를 키우고 앉아 있어요?


(E) 빠른 걸음으로 나가는 주미


도희: 어디가세요! 곧 회의 시작하는데~

 

주미: 돌댕이도 두들겨 봐야 알지.


 

(M) 구두수리점

(E) 미닫이문 소리.


홍일: 잘 왔다. 안 그래도 줄 거 있어서 잠깐 들리라고 할 참이었는데.


주미: 십년 후, 아니 오년 후에 뭐하고 있을 거 같아?


홍일: 다짜고짜 쳐들어와서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그렇게 높은 것 좀 신고 다니지 말라니까~ 앉아봐.


주미: 너, 사람들 구두 보고, 만지면서 사는 것 같이 느꼈다 그랬지?


홍일: 대체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건데?


주미: 그런데, 진짜 사는거 답게 산다는 건 그런 게 아니야.

 

홍일: 주미야….


주미: 네 나이의 일반 사람들은 어떻게 사냐면……


홍일: 아침마다 아내가 매주는 넥타이 매고 출근하고, 

아내가 주는 용돈 아껴가며 점심 사먹고, 

주말마다 잘 빠진 차를 끌고 근교로 나들이를 가거나 

잘 차려입고 공연을 보러가고, 가끔은 출장도 가고, 

돌아오는 길에는 아내한테 줄 선물을 잊지 않고… 이게 답 맞아?


주미: 적어도 내 답은 그래.


홍일: 근데, 나 그렇게 못 해.


주미: 뭐?


홍일: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나는, 네 발이 편하길 원해. 

겉으로 보이는 건 아무 상관없으니까 

그냥 네가 편하게 걷고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것뿐이야.

 

(E) 홍일은 단화를 꺼내 입으로 불고는 주미 앞에 내려놓았다.

 

주미: 뭐야 이게?


홍일: 니가 버린 구두 고쳐서 만든 단화야. 

이게 내 마음이야. 이거면 안 되겠어?


주미: (잠시 후) 내가 이 구두를 왜 좋아한 줄 알아? 

내 발에 꼭 맞아서도 아니고, 색깔이 예뻐서도 아니야. 

그건 이 구두가 구 센티 힐이기 때문이었어. 

그 굽이 잘려나간 이상, 이건 나한테 의미가 없는 거야. 

모르겠니? 나… 이거 신기 싫어.

 

(E) 주미는 발을 돌려 미닫이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천천히 걸으며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문자를 하는데 ,

문자를 하는 그녀의 표정은 어딘가 슬퍼보였다.


주미: 엄마... 엄마는 날 왜 이렇게 조그맣게 낳았어? 

(눈물이 차오르는) 오 센티, 아니 삼 센티만 컸어도 좋았잖아.

 

(M) 구두 가게


(E) 주미는 발에 꽉 끼는 구두를 벗겨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민재: 안 되겠네요. 한 치수 큰 걸로 보여주세요.

 

주미: (민망한) 꼭 남자 발 같죠? 기자 생활 7년 하면 이렇게 돼요.

 

민재: 샌들 같은 건 못 신겠네…. 

(점원에게) 여기 그냥 펌프스 스타일로 좀 보여주세요.


주미: 아니요. 저 그냥 샌들 신을게요. 

좀 못생기긴 했지만 숨기고 싶지 않아요.

 

민재: 주미씨는 이제 구멍가게 잡지사 기자가 아니에요. 

근면 성실하게 보이면서 인터뷰 대상들한테 친근하게 보일 필요 없다고요. 

조금 더 고귀하게, 우아하게 보여야 돼요. 그게 황민재의 옆 자리에요.


주미: (씁쓸하게) 네… 그렇겠죠. 

그냥 민재씨가 마음에 드는 걸로 하나 골라주세요.


(M) 삼겹살집

 

(E) 지글지글 삼겹살 구워지는 소리.

 

주미: 참을 거야.

 

도희: 하긴… 

의사 와이프는 참다가 죽어도, 몸에서 사리 아닌 진주가 나올 거예요~


주미: 너까지 너무 그러지 말아라. 내 나이 돼 봐. 

너라고 다를 것 같아? 삼십 대로 꺾이면서 

노아의 방주처럼 열릴 줄 알았던 세상이 같이 꺾이고, 

더 이상 추락할 데가 없어서 하이힐을 신는 날이 온다.

 

진영: 나이 먹으면 다 너처럼 현실적이여진다든? 나는 아니다~ 

너한텐 세상이 지금 발 딛고 있는 곳과 여기 보다 한 계단 높은 곳, 딱 두 군데로 나뉠지 모르지, 

그래서 정해진 고지를 향해 가는 게 니 인생이고 낙일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야. 나는 위가 아닌 앞을 향해 가. 

가다가 언덕을 만날지 늪에 빠질지 모르기 때문에 발에 안 맞는 하이힐 같은 건 애초에 안 필요하다고. 

그러니까 어줍잖은 일반화로 위안 삼을 생각 마. 

너는 그냥 원래부터 그런 애였던 거야.

 

주미: 왜 다들 나한테만 나쁘다 그래~


진영: 니 표정이 지금 되게 나쁜 짓 한 사람 표정이거든. 신경 쓰여?


주미: 누가 신경 쓰여? 아닌 말로 우리가 뭐 연애라도 했어?

 

진영: 누가 홍일씨 신경 쓰이냐 그랬어? 

의사 애인 노릇 하려니까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냐고. 

이건 신경이 아니라 아예 마음이 그쪽에 가 있고만? 

지금이라도 명품구두 반납하고 신발 갈아 신던가.

 

주미: 싫어. 때려 죽여도 못 벗어.


도희: 잘됐네요. 어차피 선배 갈아 신을 신발도 이제 없어요~


주미: 그게 무슨 소리야?


도희: 홍일씨 가게 옮긴대요.

 

주미: 왜?


진영: 왜겠니? 그게 궁금하면 직접 가서 물어 봐. 뭐 어때. 둘이 뭐 했어? 

같은 건물 세입자끼리 그 정도 인사는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주미: 참을 거라니까.


(M) 바

(E) 재즈 음악.

 

친구1: 과연 어떤 분이신가 했어요. 

대한민국에 열 켤레 뿐인 구두의 주인공이…. 구두는 마음에 드셨어요?


여자: 근데 이 구두… 디자인이 좀 다른데?

언니가 리폼하신 거예요? 스타일 무지 독특하시네~


주미: (난처하게 웃는) 네….


여자: 에디터면 명품 공짜로 얻기도 하고 그런다는데 정말이에요?


주미: 저… (말을 하려는데)


민재: 곧 그만 둘 거예요. 

사실 잡지사 기자라는 게 가십거리나 만들어 내고 

사람들 비위 맞추고 그런 거잖아요. 월급도 차비 수준이고… 

오래 붙어 있다고 해서 경력에 도움 될 곳도 아니고요.


주미: 저… (다시 말을 하려는데)


민재: 공부 조금 더 해서 차라리 신문사 같은데 들어가려고요. 

아, 수진씨가 신문사에 있으니까 도움 좀 줄 수 있지 않아요?


친구1: (끼어들며) 이 자식이 공부까지 시켜줄 심산이가 봐?

 

친구2: 어, 이 자식! 진짠가 보네. 

우와 주미씨 한 몫 제대로 잡으셨네. 

이 자식 어떻게 꼬신 거예요? 보기보다 능력 좋으시네~


친구1: 나이대가 맞으니까 친구 같은 편안한 매력, 그런 거 아닌가?

 

친구2: 사실 옛날부터 이 자식 취향이 좀 올드하긴 해? 

 

(E) 저들끼리 웃어재낀다.


(E) 그러나 주미는 의자를 끌고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따라나오는 민재

 

민재: 주미씨! 어디가요!


주미: 저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아서 먼저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민재: 그럼 주미씨 때문에 모인 제 친구들은 뭐가 돼요?


주미: 민재씨는 지금 자기 체면 구기는 게 더 걱정돼요? 

저는 발에 맞지도 않는 신발 신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겠는데 그건 안 보여요?

 

민재: 정말 경우 없이 왜 그래요? 지금 갈 거면 그 신발 벗어놓고 가요.

 

주미: 하!


(E) 바닥에 내팽겨쳐지는 구두.

 

민재: 주미씨!

 

(M) 길거리


(E) 주미는 크게 한숨 쉬고 돌아서서 터덜터덜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주미: 정신 차려, 최주미. 니가 갈아 신을 신발 이제 없다.

 

(E) 다시 이어 터덜터덜 발걸음을 떼는데 그 순간 


주미: 악!


뭔가에 찔렸는지 발을 다쳐 주저앉았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홍일: 쯧쯧, 저 봐라, 저 봐라…. 나이 서른둘에 반항하는 거야? 

그 좋은 신발 다 어따 갔다 버리고 맨발이야?

 

주미: 너 뭐야? 나 미행하니?


홍일: 길 가다 혼자 자빠져 있는 여자 보면 꼭 너야. 

자~ 내 운동화 냄새는 좀 나지만 그래도 신어.

 

주미: 됐어.

 

홍일: 이제 안 볼 사람한테까지 자존심 부리지 말고 말 들어. 두고 갈 테니까.


주미: 야~ 어디가!


홍일: (멀리서 소리치는) 그거 신상이다!


(E) 주미는 일어나 터덜터덜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그리고 머리속에 멤도는 주변의 목소리

 

진영(E): 나는 위가 아닌 앞을 향해 가. 

가다가 언덕을 만날지 늪에 빠질지 모르기 때문에 

발에 안 맞는 하이힐 같은 건 애초에 안 필요하다고.


홍일(E): 나는, 네 발이 편하길 원해. 

겉으로 보이는 건 아무 상관없으니까 

그냥 네가 편하게 걷고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것뿐이야.

 

(E) 주미는 천천히 걷다가 이내 저만치 가버린 홍일을 잡기위해 뛰기 시작했다. 

  

주미: (헉헉 숨을 몰아쉬며) 야!! 가지마!


홍일: 아무튼 성격 하고는…. 마음에 안 들어도 좀 신고 있으면 되지. 

그걸 못 참고 또 벗어 던진 거 봐. 어디 봐봐. 상처 다 났겠네.

 

주미: 나 더 열심히 달릴 거거든? 

이제 일주일에 한 번이 아니라 삼일에 한 번 꼴로 굽을 갈아야 될 거야. 

거기에 무좀이 심해서 꼬박꼬박 살균 세척도 해줘야 돼. 

단화 신으면 키가 구 센티는 줄어서 내려다보려면 고개가 뻐근할 거야. 

오랫동안 힐을 신어서 발가락은 벌써 휘었고 

여기저기 물집에 굳은살에 상상 이상으로 끔찍할 거야. 

할머니 되면 척추는 휘고 무릎관절은 성한 곳이 없을 거……으읍!

 

(E) 뜨겁게 키스를 나누는 두 사람.

 

홍일: 나 명품구두 못 사준다~


주미: 이제 그런 거 필요 없어. 

어떤 날라리 구두수선공 덕분에 아주 중요한 걸 깨달았거든.

 

홍일: 뭔데?


주미: 9센티의 하이힐이든,  3센티의 단화든, 

중요한 건 그 밑을 바치는 단 2센티의 밑굽이라는 사실. 

세상은 얼마나 높은 굽이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굽을 갈았냐에 따라 길을 열어 준다는 사실!


홍일: 나참 그게 뭔소리야?  푸하핫


(E) 서로를 보고 웃음을 터뜨리는 두 사람.

 이어 주미와 홍일의 함께하는 발걸음 소리는 매우 경쾌했다.

  

(M)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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