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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새해맞이 단편소설 - 달빛을 닮은 소원과 옥토끼

Broadcaster 하늘_나루폴라_리스
2023-01-13 23:20:48 74 0 0

하늘 끝에 뉘엿뉘엿 걸쳐 있던 해가 모습을 감추고, 깜빡이던 가로등이 온전히 빛을 발하는 시간.


올해의 마지막 낮을 마무리하고, 마지막 밤을 맞이하기 위해 사람들은 바삐 발을 움직였다.


드르륵-


마찬가지로 올해 마지막 장사를 끝낸 청년은 굳건히 닫힌 셔터 위에 팻말을 걸었다.


[그간의 성원에 감사드리며, '둥근 달떡'은 내년 1월 2일부터 찾아뵙겠습니다.]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손수 쓴 팻말을 보며 미소를 짓는 청년 뒤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허허, 지극정성인게 참 보기 좋구만."


거칠거칠한 수염이 잔뜩 자라 있는 중년의 사내는 청년의 옆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사장님이었다.


2년 전에 '둥근 달떡'이라는 이름으로 장사를 시작한 청년에게 먼저 말을 걸고 관심을 주었던 사람이며, 청년의 떡집이 호황을 이루는 것을 보며 진심으로 기뻐해주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일찍 찾아왔다가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잔잔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청년을 보며 옆집 사장님은 호탕한 웃음과 함께 청년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걸쳤다.


"젊은 사람이 참 생각도 깊어! 하하하!! 그러니 내가 자네를 참 좋아한다니까?"


서스럼없이 다가 온 옆집 사장님의 어깨동무에 청년은 흔들리는 몸의 중심을 겨우 잡으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하, 하하… 사장님은 올해도 가시나요?"


청년의 질문에 옆집 사장님은 불이 꺼진 자신의 가게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연하지. 맨날 밤늦게 들아가서 딸내미 얼굴도 제대로 못 보는데, 이런 날에는 좀 쉬어도 뭐라할 손님은 없을 거다."


옆집 사장님은 언제나 12월 31일에는 장사를 하지 않았다.친한 이들과 함께 연말을 보내고 싶어하는 단골들은 아쉬워했지만, 사장님은 연말과 연초라도 딸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어했다.


"자네는? 올해도 잠깐 고향에 갔다 오려고?"


"네. 이제 집에 가서 채비해야 되는데, 가는 길이 참 걱정이네요."


"그렇지. 요즘은 교통이 참 좋아서 시간 내서 갔다 오려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자네도 차 한 대 장만하지 그래? 올해도 꽤 짭짤했잖아."


옆집 사장님이 손가락을 비비며 묻자 청년은 곤란하다는 듯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제가 차 멀미가 있어서 말이죠. 맞다, 참. 여기, 받으세요."


청년은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건지 말을 돌리기 위해 비닐 봉투를 옆집 사장님에게 건내주었다.


"아유, 뭘 또 이런 걸 다…."


"올해 마지막으로 한 떡이에요. 해돋이 보러 가시면서 드세요."


"그럼, 염치불구하지만…."


옆집 사장님은 사양하는 기색을 보이면서도 냉큼 청년이 내민 떡을 받아들었다.


늘상 이렇게 떡을 주는 청년에게 약간 미안하긴 하면서도, 딸아이가 청년이 만든 떡을 참 좋아하는 터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공짜로 먹는 게 더 맛있기도 하고.


"그럼!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멀어져가는 옆집 사장님의 차를 보며 손을 흔들던 청년은 손을 내리고서 시간을 확인했다.


"후우- 시간 맞춰서 도착하려면 좀 빠듯하겠는데?"


그렇게까지 늦은 시간은 아니지만, 청년은 다급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위가 잠잠하게 가라앉은 어투컴컴한 동굴.깡총~밖에서 들어오는 빛이 채 끝까지 닿지 않는 동굴 깊숙한 곳에서 자그마한 형체가 바닥에 뚫린 구멍에서 뛰어나왔다.


"아우~ 내 이럴 줄 알았어. 다들 생각은 비슷비슷해서 원."


구멍에서 뛰어나온 검은 토끼는 털에 묻은 먼지를 손으로 툭툭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예전에는 다들 자기가 먼저 좋은 자리 선점하려고 바쁘게 뛰어다녔을 텐데 말이야."


이제는 거의 잊혀져 그저 옛날 이야기로 알고 있지만, 배곪고 힘든 이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주던 이들은 여전히 그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물론, 너무나 번영한 탓에 자신들을 잊은 대가로 그들에게서 대가를 받긴 하지만.


그런 그들을, 옛 사람들은 '옥토끼', 혹은 '달토끼'라고 불렀다.


"에휴- 다들 팔자가 좋아졌어. 잊혀진다는 게 좋은 일이 아닌데 말이야."


현재 지구에서 '둥근 달떡'을 운영하고 있는 검은 옥토끼는 점점 나태해져만 가는 동족들을 떠올리며 불평을 늘여놓았다.


검은 옥토끼가 달로 향하기 위해 토끼굴에 들어갔을 때만 봐도, 이미 모두가 바삐 지나가 한산했어야 할 토끼굴이 묘산묘해를 이루었던 것을 보면 다들 예전같지 않다는 것이 훤히 보였다.


동굴 입구 앞으로 걸어나오며 투덜거리던 검은 옥토끼는 한숨을 내쉬었다."후우- 뭐,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긴 하지."


속으로 '난 옆집 사장님이 붙잡아서…'라고 변명하긴 했지만, 어쨌든 자신도 예전과는 달라졌다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옛날이었다면, 가게고 뭐고 12월 31일 아침부터 달에 와서 다음 해를 기다리고 있었을 테니까.


"뭔가, 점점 인간을 닮아가는 듯한 기분이네."


인간 세상이 세월을 따라 바뀌어가며, 달에서 음식을 만들어 나눠주던 옥토끼들은 인간 세상에 내려와 음식을 팔 가게를 차리게 되었다.


배곪을 적의 인간들이야 의심하지 않았지만, 요즘처럼 배곪을 걱정 없는 시대의 인간들은 아무런 대가 없이 주는 음식은 의심하고 먹지 않았다.


더 이상 하늘을 향해 자신이 이룰 수 없는 소원을 빌지 않는 세상, 누구나 노력하면 자신의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된 세상, 더 이상 옥토끼들이 필요하지 않는 세상.


천 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너무나 달리 바뀌어버린 세상처럼, 검은 옥토끼 스스로도 처음 배곪는 인간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던 자신과 많이 달라졌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야, 벌써 여기까지 왔구나.'


하지만, 저 광경을 보고 있자면, 인간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샘솟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동굴 입구에 등을 기댄 검은 옥토끼는 웃는 얼굴로 달의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풀 한포기 물 한 줌 없는 매마른 달의 표면, 그와 대조적으로 푸르른 빛을 발하는 지구.


달의 하늘에 보이는 커다란 지구에서부터 날아온 수많은 광채들이, 눈이 내리듯이 달의 표면 위로 떨어지는 광경은 눈과 비교한 것이 미안할 정도로 무척 아름답고 신비한 광경이었다.


따뜻한 광채를 발하는 광원들이 매마른 달표면에 살포시 내려앉는 모습을 보며 검은 옥토끼는 다시 한 번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검은 옥토끼가 살아온 시간만큼 많은 세월이 흘러갔지만,


인간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바램을 하늘을 향해 말했고, 그 소원은 이렇게 아름다운 광원이 되어 옥토끼들이 사는 달에 다다랐다.


아마 점점 변해가는 옥토끼들이, 그럼에도 여전히 새해가 되면 달로 향하는 이유가 아마 이것 때문이 아닐까라고, 검은 옥토끼는 생각했다.


"아차차, 지금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구나. 빨리빨리!"


잠시 넋을 놓고 눈 앞의 광경을 보고 있던 검은 옥토끼는 황급히 동굴 안으로 뛰어 들어가 절구통과 바구니를 꺼내들었다.


절구통의 상태를 확인한 검은 옥토끼는 검은 옥토끼는 짚으로 된 바구니를 어깨에 걸쳐 매며 중얼거렸다.


"에휴, 빨리 돌아다니면서 질 좋은 소원들을 골라야 되는데."


떡의 재료로 사용할 질 좋은 소원들을 찾기 위해, 검은 옥토끼는 동굴 안 쪽으로 깡총깡총 뛰어들어갔다.


쏘옥-


동굴 바닥에 나 있는 자그마한 토끼구멍 안으로 몸을 던진 검은 옥토끼는 빠른 발걸음으로 굴을 내달렸다.


잠시 후, 토끼굴의 끝에 다다라 밖으로 빠져나온 검은 옥토끼는 눈 앞에 보이는 광경에 혀를 찼다.


"쯧, 다들 아닌 척 하더니 옥토끼인 건 못 숨기나 보네."


검은 옥토끼가 토끼굴을 통해 도착한 곳은 원래라면 어둠에 잠겨 있어야 되는, 하지만 오늘만큼은 소원이 내는 따스한 빛으로 달의 앞면만큼 밝게 빛나고 있는 달의 뒷면이었다.


발 디딜 틈 없이 바닥을 가득 매운 소원들 사이로, 다양한 색의 옥토끼들이 소원들을 줍고 있었다.


"경상도에 있는 김 씨에, 제주도로 간 성 씨, 올해는 미국 간 박 씨도 있네. 아, 이제는 사무엘이라고 해야 되나?"


토끼굴에 걸터 앉아 아는 옥토끼들을 확인하던 검은 옥토끼는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원밭으로 발을 내딛었다.


"어디보자~ 올해는 어떤 소원들이려나~"


검은 옥토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양한 크기의 소원들을 살펴보았다.


소원은 소원을 빌 때 얼마나 간절하냐에 따라 크기가 달라졌다.


그리고, 크기가 클 수록 음식을 만들 때 양도 많아지고, 소원의 맛도 풍부해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옥토끼들은 큰 소원들을 먼저 챙기는 편이었다.


"오, 이건 좀 많이 간절했나 본데?"


마침 눈에 띄게 큰 소원 하나를 발견한 검은 옥토끼는 총총걸음으로 다가가 소원을 주워들었다.


농구공 정도의 크기를 한 소원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던 검은 옥토끼는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에는 이것보다 훨씬 큰 것들도 많았지만, 요즘은 이것만 해도 감사하지."


먼 옛날, 사람 크기만한 소원이 달을 향해 떨어지던 것을 떠올리던 검은 옥토끼는 상념을 잠시 밀어두고 소원을 양 손으로 받쳐 들었다.


"그럼, 이 소원은 어떤 소원이려나?"


검은 옥토끼의 말과 함께 소원의 중심이 일렁거리더니, 소원의 중심에서 무언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소원의 중심에서 점점 선명함이 갖추어진 장면이 처음으로 보여준 것은 편의점의 입구였다.


딸랑~


편의점 문이 열리며 나온 건 삶의 고됨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는 직장인이었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직장인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았다.


"하아- 새해네…."


핸드폰 화면에 찍힌 '1월 1일'이라는 날짜에 직장인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라면 친구들하고 술집에서 부어라 마셔라하며 맞이했어야 할 1월 1일을, 회사에 갑작스럽게 비상이 걸려 잠깐 생긴 휴식 시간에 야식을 사러 나왔을 때 맞이해 버렸다.


"아아… 이대로 집에 돌아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고 싶다. 비상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 "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직장인은 쉬고 쉬어도 끝이 나질 않는 한숨을 또 내쉬었다.


편의점 야외테이블에 힘없이 앉은 직장인은 손에 들린 비닐 봉투를 뒤적여 맥주 한 캔을 꺼냈다.


칙-!


쌀쌀한 날씨임에도 직장인은 맥주 캔을 손에 쥐고서 꿀꺽꿀꺽 들이켰다.


"크으~ 달다 달아~"


달다는 말과는 달리 얼굴은 잔뜩 인상을 쓴 직장인은 맥주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직장인이 주머니에서 꺼내 든 건 고이 접혀 있던 로또 세 장과 복권 한 장이었다.


"이게 전부 다 당첨되면 얼마려나…."


피로로 인해 멍해진 정신으로 당첨금액을 계산하던 직장인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당첨은 무슨. 요걸로 본전이나 찾을 수 있으면 다행이겠지."


아직 긁지 않은 복권을 팔랑팔랑 흔들던 직장인은 복권을 쥔 채 양손을 모으며 중얼거렸다.


"안 될 거 알고 있지만, 제발, 제에발, 당첨되게 해주세요. 그냥 1등으로 당첨되서 당장에 회사 때려치우게 해주세요."


말과는 달리 간절해 보이는 표정으로 소원을 빈 직장인은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꺼내들었다.





복권을 긁는 장면으로 장면이 끝난 걸 확인한 옥토끼는 잠시 입을 오물거리며 생각에 잠기더니, 아쉬움이 담긴 표정으로 소원을 다시 땅에 내려놓았다.


"크기는 참 마음에 드는데, 떡 재료로 쓸 맛은 아니겠다."


소원을 빌 때 담기는 열망의 크기가 광원의 크기와 비례한다면, 소원에 담기는 감정은 재료의 맛을 결정했다.


그리고 소원을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 옥토끼들은 이렇게 소원을 빌 때의 상황과 그 안의 감정을 보고 그 소원이 어떤 맛을 낼 지 알 수 있었다.


기쁨, 즐거움과 같이 밝은 감정이 담긴 소원은 떡을 만들었을 때 기분 좋은 단맛이 나지만, 방금 소원에 담긴 짜증의 경우에는 짭짤한 맛을 만들어 내었다.


"중국에 있는 황 씨는 좋다고 하겠지만, 내가 쓰기에는 무리겠네."


인간들이 가장 소원을 많이 비는 오늘 거의 1년치 양의 떡을 만들어야 하기에 양이 많은 소원은 참 편한 재료이긴 하지만, 양에 욕심을 부려 질을 포기하기에는 옥토끼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없었다.


직장인의 소원을 두고서 다시 주변을 두리번 거리던 검은 옥토끼는 방금 본 소원과 비슷한 크기의 소원을 발견하고 뛰어갔다.


"어디보자. 이건 어떠려나."







이번 소원이 처음으로 비춘 장면은 커다란 쓰레기 봉투 세 봉지가 현관 앞에 놓여 있는 원룸이었다.


"끄응~!!"


소원의 주인으로 보이는 여성은 마지막 쓰레기 봉투를 다른 봉투들 옆에 내려놓고는 자리에 주저 앉았다.


"휴우- 드디어 끝났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쓰레기와 먼지로 가득하던 원룸은 꼬박 하루가 걸려서야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루종일 움직이느라 지끈거리는 어깨를 손으로 주무르던 여성은 시선을 돌려 현관 앞에 둔 쓰레기 봉투들을 보았다.


먼지와 쓰레기, 과하게 산 과자며 냉동식품, 곰팡이가 펴서 이제 입지 못하는 옷, 충동적으로 사고 마구잡이로 쓰다가 망가져 버린 물건들.


1년 동안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만 같아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건 좀 너무 심하긴 했네."


이렇게 살고 있었으니까 엄마가 보자마자 펑펑 우셨던 거지, 그녀는 현관 앞에 주저 앉아 눈물을 흘리던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대학을 졸업하고 난 뒤 곧바로 시작한 취업활동.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 달리 그녀를 원하는 회사는 그 어느 곳도 없었고, 그녀가 가지고 있던 커다란 기대는 전부 실망으로 바뀌어버렸다.


결과에 대한 실망이 자신을 뽑아주지 않은 회사에 대한 분노로 바뀌고, 그 분노가 부족한 자신에 대한 자책으로 바뀌며, 자책이 자신은 안 될 거라는 체념으로 변하게 되었을 때,


어느새 그녀는 자신의 원룸을 스스로를 가두는 울타리로 바꾸어놓았다.


이 안에서는 자신이 부족함에 실망할 필요 없으니까, 그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쓸 필요 없으니까, 다른 누군가와 비교할 필요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던 그녀였지만,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자신은 그저 피하고 있었을 뿐이었다는 것을.


자신에 대한 실망과 자책에서 그저 눈을 돌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 사실을 올 한 해가 끝나갈 즈음에야 알게 되었다는 사실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자책을 하고 말았다.


"아니지. 그나마 올해 깨달았다는 거에 감사해야지."


부정적으로 흘러가는 생각을 다시 붙잡은 그녀는 1월 1일이 되었다는 알람이 들리자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빌었다.


"일단 다이어트부터 하고, 올해는 꼭 취업할 수 있게 해주세요."


더 이상 상처 받기 싫다는 이유로 숨지 않도록, 사랑하는 엄마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딸이 되지 않도록.


세상이라는 물길에 휩쓸려 가라앉지 않고 당당하게 떠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음…… 과자 몇 개는 둘까?"


쓰레기 봉투 안에 담은 과자에 약간은 흔들리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소원에 담긴 장면은 끝이 났다.





"흐으음…."


검은 옥토끼는 소원이 보여준 장면과 감정들을 음미하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후회, 간절함, 그리고 미안함이 섞인 사랑이라…."


과거의 자신에 대한 후회는 씁쓸한 맛을, 현재를 나아가기 위한 각오에 담긴 간절함은 뒷맛에 약간의 텁텁함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두 감정의 배경에 있는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이 섞인 사랑이 무겁게 가라앉은 단맛을 만들어 내어 두 감정의 맛이 깔끔한 마무리가 될 수 있게 해주었다.


"좋아, 이건 사용하자."


잠시 고민하던 끝에 고개를 끄덕인 검은 옥토끼는 손에 들린 소원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부디 그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좋은 재료를 주었다는 감사를 담아, 검은 옥토끼는 앞으로 용기를 내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소원의 주인을 향해 마음으로나마 응원을 보냈다.


소원을 바구니에 넣고 주변을 둘러보던 검은 옥토끼는, 때마침 발치에 굴러 온 소원을 향해 손을 뻗었다.


"흐음?"


검은 옥토끼의 손에 들린 소원은 한 손으로도 가볍게 들 수 있는 사과 크기 정도의 작은 소원이었다.


1년치 재료를 위해 큰 재료를 중심으로 찾아야 하는 지금 고려하기에는 너무나 작은 크기였지만, 그 소원을 보고 있는 검은 옥토끼는 양쪽 귀를 쫑긋거리며 소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옥토끼의 감이 이 소원을 놓치면 후회할 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옥토끼로 살며 떡을 만들어 온 지 어언 몇 천년, 그 세월에 의해 쌓인 감이 '이 소원은 꼭 필요한 소원이야'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근데, 내 감은 잘 안 맞았던 것 같은데…… 에이, 몰라. 일단 보고 생각하면 되지."


자신의 감이 부디 정답이기를 바라며, 검은 옥토끼는 소원을 들여다 보았다.






새해가 밝기까지 5분 전, 소원의 주인인 아이는 부모님과 함께 소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었다.


[올해의 대상! 그 영광의 수상자는…!!]


티비에서는 한창 연기대상의 하이라이트인 대상 시상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누가 받을까요, 여보? 역시 주상웅이 받겠죠?"


"글쎄, 난 안승기가 받을 것 같은데?"


아이의 부모님은 화면에 나온 다섯 명의 후보를 보며 과연 누가 대상을 받을지를 얘기하며 이목을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에 딱히 관심없는 아이는 소파에 몸을 기댄 채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초등학교 친구들과 사용하는 단체 톡방에는 새해가 되며 한 살 더 먹게 된다는 사실에 잔뜩 들떠 있는 친구들의 메세지가 빠르게 올라오고 있었다.


"허어. 벌써 한 해가 다 갔다니, 시간 참 빨라."


넌지시 운을 띄운 아이의 아버지는 슬쩍 시선을 돌려 아이를 바라보았다.


"형수야."


"네? 왜요?"


아이는 아버지의 말에 무성의하게 대답하며 단체 톡방에 메세지를 보냈다.


[그럼 곧 있으면 졸업식이겠네?]


단체톡방에 메세지를 보낸 아이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근엄한 표정을 하며 말했다.


"내년에는 형수도 중학생이니까,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으으, 알겠어요. 열심히 할거라니까요?"


아이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말이 또다시 시작되자 질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이제 중학생인데 무슨 공부냐고 따졌었지만, 저기서 말대답하면 잔소리가 더 길어진다는 걸 잘 아는 지금은 그저 아버지가 저 말만 하고 넘어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이의 대답은 중요하지 않았던 건지 이미 몇 번이고 반복한 레파토리를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네 엄마 친구 아들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조기교육 한다고 하는데, 넌 엄마 아빠가 편하게 보내게 해줬잖니? 이제부터라도 공부 열심히 해야 그 친구들을 따라갈 수 있지 않겠니? 그리고 중학교 때부터 공부 습관을 잘 들여놔야, 앞으로 고등학교, 대학교 가서도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법이야. 뭐, 그렇게 공부가 싫으면, 차라리 내일부터 아빠 밑에서 기술이라도 배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잔소리에 아이는 얼굴을 자꾸 찡그린 채 티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긋지긋한 잔소리를 듣는 건 올해면 충분했다.


[오! 사! 삼! 이! 일!]


시상식 진행자들의 큰 목소리와 함께 카운트가 진행되었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진행자들의 새해 인사와 함께 새해를 축하하는 화면 효과가 티비를 가득 채웠다.


새해가 됐다는 소리에 곧장 화색이 된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엄마아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자러 갈게요!"


"그래, 우리 아들도 새해 복 많이 받고~"


"아들! 올해는 꼭 공부 열심히…."


"아, 알겠어요!"


아이는 아버지의 말을 끊은 채 대답하며 자신의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방문을 닫고 침대에 몸을 던진 아이는 핸드폰을 들어 단톡방을 보았다.


자신이 보낸 메세지에 많은 친구들이 '그러게', '헤어지기 싫다'와 같은 메세지를 보냈다.


메세지를 보고 있던 아이는 이윽고 핸드폰을 끄고 배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헤어지기 싫은데…."


새해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졸업식도 하게 될 것이었다.


새해가 되고 나니 더 이상 친구들과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현실로 다가온 것만 같았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친해진 친구들과의 이별은 아이라 하더라도 큰 아쉬움과 슬픔을 느끼게 하였다.


"음… 중학교는 어떤 곳이려나?"


하지만, 순수한 아이의 생각은 금세 슬픔에서 빠져나와 그 다음으로 향하였다.


"중학교에 가면, 다른 친구들도 만날 수 있겠지?"


얼마 뒤면 찾아 올 새로운 학교, 새로운 반, 그리고 그 안에서 만나게 될 새로운 친구.


새롭게 사귈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뛰어노는 상상하며 아이는 헤실헤실 웃음을 지었다.


"아참, 새해 소원!"


많은 친구들과 함께하는 중학교 생활을 실현시키기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을 떠올린 아이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양 손을 모았다.


"음…… 제가 교회는 안 다니지만, 만약 제 기도도 들어주신다면… 으음… 중학교에 가서어, 으음, 친구를… 많이! 많이 사귀게 해주세요!"


나이도 한 살 더 먹었겠다, 나름 멋들어지게 소원을 빌어보려고 한 아이는 결국 꾸미지 않은 솔직함을 담아 소원을 빌었다.


"꼭! 꼭 저랑 오래오래 함께 놀 수 있는 친구들을! 많이 사귈 수 있게 해주세요!!"


바라는 것 없이, 그저 즐겁게 놀고 싶다는 순수한 감정을 가득 담아서, 아이는 달에 있는 누군가에게 닿을 소원을 빌었다.





"하하, 귀여운 소원이네."


얼굴에 흐뭇한 미소를 띄운 채 소원을 보고 있던 검은 옥토끼는 아이의 소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런 맑고 순수한 소원을 놓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다른 감정이 섞이지 않고 한 가지 감정만을 품은 소원은 그 감정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깊은 맛을 냈다.


아이가 소원을 빌 때 담았던 행복이라는 감정, 작은 소원 안에 가득 불어 넣은 그 감정은 분명 훌륭한 단맛을 낼 것이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검은 옥토끼는 때묻지 않은 이 아이의 소원을 볼 수 있게 되어, 그리고 이 소원으로 떡을 만들 수 있게 되서 정말 기뻤다.


"꼭, 친구들 많이 사귀게 될 수 있길 바랄게."


검은 옥토끼는 아이가 꼭 행복한 미래를 이룰 수 있기를 바라며 소원을 바구니 안에 넣었다.


"좋아, 나도 힘내서 소원들을 모아보자고!"


바구니 안에 담은 소원만큼, 땅을 박차는 검은 옥토끼의 발은 아까보다 조금 더 가벼워 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열심히 달을 뛰어다니며 자신의 몸만한 바구니에 소원을 가득 담은 검은 옥토끼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신의 동굴로 돌아왔다.


"흐흥~ 좋은 소원이~ 너무나도 많네요~"


잔뜩 신이 난 발걸음으로 동굴 안으로 들어 온 검은 옥토끼는 절구통 앞에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럼, 잠깐 쉬었다가 만들어 볼까~"


소원을 모으러 다니며 좋은 소원들을 들여다보는 건 즐거운 일이었지만, 반나절 가까이 달을 돌아다니는 건 옥토끼라도 힘든 일이었다.


동굴 입구에 자리를 잡고 앉은 검은 옥토끼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달빛을 닮은 소원들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세월이 지나도 인간들은 여전하네."


오랜 세월이 흘러도 인간들은 여전히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그 소원들은 비록 형태는 다를지언정, 모두 어제의 나보다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었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번영할 수 있었던 건 그 수많은 의지가 모이고 모여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라고 검은 옥토끼는 생각했다.


"우리 옥토끼들도 다시 모습을 드러…… 낼 수는 없겠지."


그리고 그 생각에 뒤이어 다른 생각도 살짝 모습을 내밀었지만, 검은 옥토끼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래 전 옥토끼들도 모습을 드러내고서, 저 지구에서 인간들의 소원을 모아 음식을 만들던 시절이 있었다.


인간들이 무리를 이루고, 집단이 커지며, 그 끝에 거대한 나라를 만들었을 때, 그리고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게 되었을 때 그들의 욕심은 옥토끼들에게도 향하게 되었다.


인간의 욕심에 의해 옥토끼들은 수많은 가족과 친우를 잃게 되었고, 그 끝에 달로 도망쳐 올라오게 되었다.


그들에게서 사랑하는 이들을 빼앗은 게 소수의 욕심이라는 건 옥토끼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럼에도 옥토끼들은 앞으로 나아가기를 소원하는 인간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왔다.


하지만, 그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의지가 남아 있는 한 옥토끼들은 인간들의 앞에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에효, 나도 늙긴 늙었나 보다. 요즘 상념에 너무 자주 빠지는 것 같네."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검은 옥토끼는 엉덩이를 툭툭 털고는 떡을 만들기 위해 동굴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툭-


그 순간, 검은 옥토끼의 발에 무언가가 부딪혔다.


"음?"


고개를 숙인 검은 옥토끼는 자신의 발 옆에 작은 소원이 굴러와 있었다.


소원을 집어들어 들여다본 검은 옥토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런 딸이면 딸바보이신 것도 이해가 가네요, 사장님."


'내일도 이렇게 엄마아빠랑 같이 있게 해주세요!'


검게 물들어 있던 바다를 진홍색으로 물들이며 떠오르는 태양.


그리고 그 태양을 가족과 손을 잡고서 보고 있던 아이의 소원은 오늘 보았던 소원 중 가장 작고, 그 안에 담긴 감정 또한 다른 소원에 비해 크지 않았다.


떡의 재료로 사용할 양도 적고, 아마 품고 있는 맛도 미약할 것이었다.


하지만, 검은 옥토끼는 양 손으로 작은 소원을 부드럽게 쥐며 말했다.


"그 소원, 꼭 이뤄졌으면 좋겠다."


언젠가 인간들이 소원하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 그저 내일이 오늘같기만을 바라게 된다면.


그래서 인간들의 소원이 이 아이의 소원만큼 작아진다면.


어쩌면 그 때는 가능할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옥토끼는 절구통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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