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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노니는 구들방 짝사랑. 어쩌면 조금은 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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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5 03:37:44 698 2 2

쌀쌀한, 그러나 나름 따듯한 날씨의 아침이다.
이런 날이면 항상 내 첫사랑이 떠오르곤 한다. 술자리에서 이야기했다간 놀림받고 씁슬한 웃음을 지을 이야기지만 나름대로 행복했던 이야기를 지금 해볼까 한다.

//

때는 몇년 전, 졸업을 앞둔것 치곤 항상 재미있는 이야기로 시시닥거리며 쉬는시간을 함부로 낭비하던 아이들을 내심
부러워하면서도  '그래서 대학이나 가겠어?' 같은 애늙은 생각을 하며 공부하던 내게 있었던 일이다.

나는 나름 공부도 상위권에 부모님과 큰 다툼 없이 생활하는, 대신 교우관계에서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하는 모범생이였다.

그 덕에 소위 '논다'는 아이들과 같은 반을 배정받았을때의 기분은 난파된 배의 선장이 해적을 만난것만큼 착찹하기만 했다.

'올해는 친구따위 사귀지 말고, 공부나 하자'

이런 생각을 하며 교실로 들어간 뒤, 나는 우리반에 있는 아이들을 훑어보았다.

새학기 첫날부터 공부를 하는 아이, 벌써부터 그룹을 만들고 리더를 하려고 노력하는 노란머리 아이...

개중 여자아이들의 그룹이 단연 눈에 띄였다. 이상한 만화영화에 나올법한 이름을 가진 각양각색의 화장품으로 살구색 도화지를 칠하다 선생님이 들어오면 후다닥, 필통속에 넣고 선생님이 나가면 후다닥, 다시 꺼내 칠했던걸 지우고 다시 칠하는 모습은 누구라도 보고있으면 실소를 나오게 했다.

공부를 하다 심심할때면 그런 모습을 구경했다. 어차피 나같은 범생이가 보는건 신경도 안쓰리라. 그런데 계속 여자아이들을 쳐다보고 있던건 그 이유가 아니란것을 나는 나중에야 알게되었다.

언제부턴가 똑같은 행동만 하는 톱니바퀴같던 여자아이들을 지켜보던걸 그만두게 되었고 그중 가장 빛나는 그녀만을 보게 되었다.

또래의 아이들과 잘 어울리던 그녀를, 무언가 중요해보이는 준비물을 남에게 빌려주며 웃는 그녀를 그때의 나는 교실 뒤쪽 창가에서 수줍게 문제지 너머로 지켜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저 관심이였다. 친구들에게 항상 착한 아이, 하지만 남에게 할말을 다 하는 당찬 아이. 내가 베풀지 못하는 친절을 맘껏 베푸는 그녀가 신기했다. 의식하게 되니 귀여웠다. 하는 행동이 귀여워 보였다. 말투가 귀여웠다. 어느 순간 나는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와 친해지고 싶었다. 매일 보기만 하는것으론 성에 차지 않아. 내가 잘하는걸로 친해지자. 마침 중간고사 기간이였다. 공부를 같이하자고 할까..? 아니야 그건 너무....

"야 같이 공부할래?"

"어..?"

내가 공부를 잘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있었나보다. 내게 공부하잔 말을 건낸 여자가 그녀가 처음이라, 아니 애초에 같이 공부하잔 말을 들어본게 처음이라 나는 분명 대답을 해야했음에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 공부 잘한다면서? 나도 좀 가르쳐줘~"

"어... 그래, 근데 내가 주말엔 학원에 가야될것같은데..."

"그럼 전화로 모르는거 가르쳐주라! 그것도 안돼?"

"어? 아냐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

아뿔사, 이렇게 좋아한다고는 생각도 안해봤는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바보같이 더 말해볼 용기도 못내고! 그녀의 향기가 코 언저리에서 맴돌았다. 꽃향기가 났다. 섬유유연제 향기가 그리 달콤했던가, 옆자리 여자애가 잠시 두고 간 거울을 빌렸다. 얼굴에 벛꽃이 만개해있었다.

'에이... 부끄럽게...'

내심 기분이 좋았다. 공부를 잘해서 다행이야...

집에가서 휴대전화 목록을 뒤졌다. 전화번호부에 그녀의 번호가 있었다. 이것도 분명 내가 그녀를 신경쓰지 않았을때 내게 친절을 베풀어 전화번호를 교환한 것이겠지. 우스웠다. 살면서 연애는 물론 변변찮은 친구조차 만들지 않으며 내가 너무 수준이 높기때문에 안사귀는거라고 생각한 내가 웃겼다. 친구가 되는건 이렇게 쉬운데. 그것도 모르고... 그래서 마음놓고 웃었다.
"형, 미쳤어?"

"아 방에 올거면 노크하라고!"

//

중간고사는 순조로웠다. 가르치는게 배우는거라고 하던 중학교 선생님의 말이 맞았던거같다. 교과서를 통째로 가르치다보니 모르는 문제는 없었다. '헷갈려서 틀릴순 있어도 몰라서 틀리는 문제는 없네, 좋다.'하며 남는 시간이 많아 문제지에 그녀의 뒷모습을 그렸다.

사각 사각, 문제지 위에 그녀가 그려졌다.

"야!"

화들짝 놀라 시험지를 가렸다. 내 이상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넌 평균 몇점나왔냐? 난 60점대인거같은데~ 공부를 더할걸 그랬나봐~"

"나는... 평균 91점이네..."

"헐! 너 혼자 다했네! 얘들아~ 우리반 1등이 여깄다!"

망했다. 작년보다 평균이 4점 떨어졌어. 통탄할 점수다. 이따위 점수로는 미래고 뭐고 없어.

"와... 미쳤다 어떻게 수학 서술형을 다맞냐?"
"가능한 점수냐 이게"
"답안지네 답안지! 니껄로 채점좀 할게"

"아냐... 평균이 좀 떨어졌는걸? 좀더 열심히 해야겠어... 그리고 시험지는 안돼! 가져가지마!"

주위 아이들이 역시 너라며 시험지를 보고 혀를 내두른다. 내가 중요한건 얼마나 남들보다 뛰어난지였다.. 내가 만족할 점수가 아니였기에 나는 얼굴이 굳어졌다.

'이 점수라면 내신이 엄청 떨어질거야... 도대체 왜? 부모님이 엄청 화내시겠다...'

당연한 결과였다. 부모님은 성적표를 보시고 크게 화내셨다. 이걸 가지고 대학교를 가겠다는거냐고, 못해도 예전에 받던 점수만큼은 받아야되는거 아니냐고.

우울했다. 왜 점수가 그정도밖에 안될까 하는 마음에 누군가 내 어깨를 토닥여줬으면- 했다.

"좋아하는 애 생겼냐? 왜 집중을 못해?"

"예..? 아... 저 공부만 하는거 아시잖아요... 제가 알아서 열심히 할테니 걱정마세요."

착잡했다. 난생 처음 반항심이 들었다. 내가 좋아한다는 감정을 숨기고 있던걸 들켰다는 생각 때문일까. 그녀 생각이 났다. 그녀에게 가르쳐주느라 내가 크게 집중을 못한 탓이 있으리라. 그렇다고 혼자 공부하기 싫었다.

내가 더 노력하면 된다. 두마리 토끼를 다 잡을수 있어. 더욱 노력했다. 가능한 오래, 가능한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니까 시험점수가 더더욱 올랐다. 그녀의 점수도 올랐다. 평소에 풀던 문제의 두배를 푸니 무슨 문제가 나올지 감이 잡혔다.

내가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기뻤다. 물론 그녀도 좋아했다. 니 덕이라며 등을 팡팡 두들기는 그녀를 보다 무심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좋아한다고 말해버렸다.

"뭐? 뭐라고 했어?"

"아..? 아냐! 나도 못들었어!"

"뭐래 ㅎ"

그녀가 웃는다.

'내가 미쳤지, 그런말을 함부로 하다니. 못들은것같아 다행이야...'

그날 그곳에는 식곤증에 못이겨 잠을 자는 몇몇의 아이들의 잔잔한 숨소리와 바람과 춤추던 창문만이 있기에 내 작은 고백정도는 어렵지 않게 들렸을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

"아무리 봐도 안되겠어."

"뭐가?"

"아무것도 아냐"

아무리 봐도 이대로 그녀랑 친구로 지낼순 없을거같다. 더 가까워지고 싶다. 여차저차 그녀의 방법을 따라해 친해진 친구가 내가 뱉은 혼잣말을 물고 늘어졌다.

"뭔데~ 사랑얘기냐?"

'공부눈치는 더럽게 없는놈이 이상한데서 눈치가 좋아요...
이녀석은 그래도 내 친구니까 내 기분을 알아주지 않을까?'

"잘 들어봐, 이건 내 친구얘긴데..."

"니가 친구가 어디있냐? 딱봐도 자기얘기구만"

"어허! 듣기싫냐?"

"아니아니, 그래서?"

//

"고백해버려~ 끝까지 여자애가 누군진 말을 안해서 모르겠다만, 나도 예전 여친 고백 두번해서 겨우 만난거잖아~"

"기만자녀석..."

"뭐래, 모솔녀석이 ㅋ"

"너 밴. 아니아니 너 절교"

그래, 마음을 굳혔다. 공부 잘하고 심성 착한 나를 설마 안받아주겠어?

'점심시간이니까... 반에 있겠지?'

와글와글, 때아니게 사람이 많아보인다.
분명 그녀는 저기 있는데, 소리내어 내 진심을 말할 생각이 안든다. 몸이 굳는다. 과연 내 마음을 받아줄까? 친구가 한 말이 떠올랐다.

'고백 두번해서 사귄거잖아~ 라니... 그럼 한번은 차였다는거잖아...'

"야! 와서 이 문제좀 풀어주라!"

"어..? 응! 잠시만~"

그녀가 부른다. 내 마음은 학교가 끝나고 전해야겠다.


학교가 끝난후 나는 그녀를 보러갔다.
교문앞에 서있는 그녀, 그날따라 왜 더욱 행복해보였을까. 나는 그녀의 환한 웃음의 의미를깨닫지 못했다

내 마음을 오늘엔 표현하리라. 너를 처음부터 좋아했다고. 내가 너에게 있어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이, 네가 하는 행동이 나에게는 큰 설렘이였다고. 비록 멋있는 남자는 아니지만 너와 사귀며 좋은 추억을 쌓고 싶다고.
널 보면 가슴이 두근댄다는 식상한 고백대사가 그때의 나에겐 내 심정을 표현할수 있는 최선의 생각이였기에 누가봐도 유치한 고백멘트를 작은 종이에 써서 준비해두고 그녀를 불렀다.

"저기..!"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가 나를 눈치챘다. 이제 할말을 해야겠...
옆에 어떤 남자가 있었다. 분명 아무도 없다고 착각한게 분명했다.

"왜?"

'설마, 아니겠지. 저렇게 키 크고 잘생긴 남자가 그녀를 좋아할리가 없어"

한걸음.

"만약 맞다면?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있단걸 몰랐던거라면?"

두걸음.

"그럼 나는 무엇을 해야하지..? 어떻게 해야하지?"

세걸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를 두기로 했다.

"아냐~ 너 내일까지 해와야하는 수행평가 종이를 두고가서~ 옆엔 누구셔?"

"아..ㅎㅎ

내 남자친구! 잘생겼지!"

"아...안녕하세요! 키가 정말 크시네요..."

"그치? 고등학생이거든~"

그녀에게 말을 건내려는 용도로 쓰려던 수행평가지를 건네고, 나는 도망치듯 인사하고 집으로 뛰었다. 숨이 차올랐다. 머리가 핑 도는듯했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뛰기를 계속했다. 머릿속이 심장박동소리와 같이 울렸다. 그 소리가 나에게 한심하고 바보같다고 욕하는 소리로 들렸다.

왜 그런 기본적인 것조차 몰랐냐고, 너는 정말 바보라고 하는듯이 머리가 울렸다. 집에 도착해서 교복을 벗을새도 없이 침대에 엎어졌다. 눈물이 흘렀다. 안경이 눌려 자국이 났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날 한심한듯 쳐다보던 그녀의 남자친구가 생각났다. 증오했다. 그러나 곧 그런 생각을 포기했다.

그녀는 내가 좋아하는 사실을 알면서도 냅둔게 분명하리라. 무언의 대답으로써 내게 답을 해준것이 분명하리라.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날 욕하던 심장은 어느새 가라앉아 평범하게 자신의 일을 계속했다. 나도 내 일을 계속해야지. 아무렇지 않은것처럼. 결국 내가 그녀에게 한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 나도 아무것도 한것이 없으니.

그렇게 생각하니 눈물이 또한번 흘렀다.

//

그렇게 슬펐던 나도 몇년이 지나니 한때의 즐거움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비록 그때의 내가 바보같고 다시 생각해도 씁쓸하지만 나름 행복했던 추억인것같다.
아쉬워 울부짖던 바람이 가라앉고 해가 내 몸을 따듯하게 만들어준다. 어쩌면 항상 나를 안아주는 햇빛이 내 어렸을적의 할퀴어진 사랑에 대한 보답일지도 모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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