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이 꺼지려 한다.
아니, 그렇게 꺼질 듯 말 듯 하면서도 다시 불을 밝힌다.
언제라도 금방 꺼질 듯한 그런 위태로운 불빛을 머금으며, 나는 눈을 뜬다.
태초에는 무엇이 있었지? 이런 지긋지긋한 세계를 창조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세계를 '누군가의 특이점'으로 갈라놓아 모든 가능성을 보고자 한다니.
이런 세계에서 한낱 아주 작은 부품, 아니, 그 부품에 있는 세균보다도 작디작은 존재인 생명체들을 방치하고 무엇을 하는 것이지?
옛 시절엔 그렇게 우리가 작고, 아주 볼품없는 존재라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세상은 크면 클수록 좋다고 느꼈으니까.
우리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거대하고 광활한 우주, 그것을 넘어선 무언가가 존재하길 바랬다.
그런 광할함 속에서 아주 조그마한 우리가, 또한 사람이나 동물들이 단지 세상의 전부를 차지한 존재이길 바라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너머의 진실을 보게 되었을 때는, 아니, 아주 조금만 더 키가 커져서 조금의 시야만이 더 넓어졌을 때는, 내 모든 것들을 바쳐서라도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질 정도였다.
우리의 의미는 우리에게 있지 않다. 나의 의미 또한 나에게 있지 않다.
아무리 지구의 동물들이 지금의 형태로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왔다지만 애초에 지구라는 행성에서 공기가 생기고, 물이 생기고, 온도가 적정해져 생명체가 막 생겨난다는 것은 기적이다. 단지 '기적'이라는 짧은 두 단어로 말할 수도 없는 엄청난 경우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살아 숨쉬고, 죽어서 먼지가 되어버릴 이 세계가 단지 아주 작은 하나의 세계에 불과하고 그 모든 세계가 의도적으로, 작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는 어떤 의미로든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포기했다. 유지하는 것을, 희망을 가지는 것을, 순응하는 것을, 그리고 살아가는 것을.
나의 의미는 나에게 있지 않고 세계의 의미도 세계에 있지 않다. 그렇기에 나는 끝까지 반항하며 나의 바로 윗 존재에게 반(反)의 의미를 내비치리라.
그렇다. 나는 나의 형태를 버린다. 되찾지 못하도록 영원히 버릴 것이다. 그렇기에 생명체 중 하나로 변해 의미라는 것에 대해 관철할 것이다.
나의 윗 존재 또한 그렇게 고양이가 될 것이다. 그렇게 '설정'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 윗 존재는 아마도 우리라는 존재 중 가장 먼저 고양이가 될 것이다. 그래, 그 '태초의 고양이'라는 것을. 원래 첫 번째였고, 마지막에 아홉 번째가 될 그 고양이를.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네 번째로 고양이가 되겠다. 하지만 태초의 고양이가 아홉 번째가 된다면 나는 세 번째가 되겠다.
태초의 고양이를 '주시'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나는 나를 포함한 여덟을 주시하겠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에 대해, 태초의 고양이에 대해, 지금 말하고 있는 나의 방향에 대해 전부 잊겠다.
정해진 결말에 도달하지 않기 위해 존재를 버린 나는, 그렇게 우주로 처음 떠난 고양이 '펠리세트'로부터 영향을 받아 '펠리'라는 검은 고양이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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