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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단편선

버거맨af58f
2020-02-02 01:47:23 80 0 0

대학교 초년생부터 가끔씩 쓴 단편들 모음

공포는 아니고



1. 적당주의


어느 저녁, 그 꼬맹이를 발견했다.
녀석은 다리의 난간 위를 걷고 있었다.
분별 없는 양아치들이나 할 법 한 행동.
그러나 녀석의 표정을 보자, 생각이 변한다.
달관. 포기. 자조.

녀석은 난간 위를 아무렇지 않게 걸으며 나를 지나쳐 등 뒤로 사라졌다.

주말이 지나고, 또 퇴근할 무렵. 이번에도 꼬맹이와 마주쳤다. 난간에 앉아 강을 바라보며 다리를 흔들거렸다 .

호기심과 걱정에 주책없게도 왜 그러는 지 묻고 말았다.

"별 이유는 없어 아저씨. 양이치들이 부리는 객기라고 생각해 줘. 불편했으면 미안. 내려갈게."

도데체 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나는 꼬맹이와 조금 더 이야기하려 했다.

"카페....? 혹시 나 꼬시는 거야?"

"하하. 농담이야. 그치만, 나같은 거에 쓸데없이 신경 쓰지 말아줘."

거절.

그리고 한동안은 녀석을 만날 수 없었다.

방학이 시작했을 무렵, 출장 갔다 돌아오는 길에 녀석을 만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길을 걷고 있었다.

무거운 가방에 어깨가 뭉쳤는지, 조금 걷다 내려놓고 쉬기를 반복한다

"태워준다고?"

"......"

"글쎄. 그치만 갈 곳이 없는걸. 역시....... 사양"

사양하려는 그녀를 납치했다.

정신나간 짓이었다. 먼저 그녀를 밀어넣고, 무거운 가방을 던진다.

납치라고 해도 뭘 할 작정은 아니었다. 그저, 저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어디로 데려갈 지도 생각하지 못했다

모텔? 멀린 떨어진 도시? 시골? 내 집?

마침, 부모님께서 이사오기 전에 쓰시던 시골 집이 떠올랐다.

팔리지 않아서 내버려 둔 곳이었다.

몇 시건 달려, 그곳에 도착한다. 다행히 아직 작동하는 보일러를 켜고, 가볍게 먼지를 치운다.

녀석은 저항하지도 않고 얌전히 끌려 들어왔다

"덮칠 거야? 그렇게는 안봤는데."

글쎄. 나도 솔직히 널 왜 납치했는지 모르갰어.

정확히는, 네가 왜 납치 당해 줬는지.

"글쎄. 어떻게 돼도 같으니까?"

"납치되건, 아니건. 난간에서 떨어지건, 살아남건. 조금 더 살건, 그렇지 못하건."

"아저씨는 내게 뭘 바란 거야?"

글쎄. 모르겠다.

그저 내버려두지 못했다.

죽건 살건 아무래도 관계없다는 마음을, 그냥 둘 수 없었다.

무엇이라도 변하게 해 주고 싶었다.

"도와주려던 걸까? 고마워. 그래도말야,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

"가정 사정이 나아져도 나는 그대로야."

"건강이 돌아와도 길게 살고 싶진 않아."

"친구가 생기면, 즐겁겠지만..... 어차피 곧 잃어버리는걸."

"아니..... 사실 아저씨도 알잖아?"

"부모님이 사이좋아 질 리 없다. 내가 대학을 갈 수 있을 리 없다. 내게 친구가 생길 리 없다......"

"그야 죽을만큼 열심히 하면 10번에 한 번 정도는 성공하겠지."

"근데, 그러면 죽을 만큼 괴롭잖아?"

"그러니 나는 난간을 걷는 정도가 딱 좋아."

"불량학생, 겁없이 담력을 테스트하다 실족사"

"괜찮은 결말 아닐까?"

뼛속까지 스며든 허무주의. 그리고, 아마도 과장 없는 불행.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녀석은 변하지 못한다.

죽을 각오로 엄청난 고통을 참고 몇 번이고 노력해야..... 간신히 기회정도가 생길 뿐.

어떻게 손에 넣은 기회가 운명의 농간에 따라 허무히 날아간다면.....

삶을 계속할 의미는 있는 걸까.

도와주려는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지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적어도 가방 속 내용물을 쓰게 하고 싶진 않았다.

1인용 텐트와, 질소 가스. 그리고 테이프와 수면제.

"같이....죽어주려고?"

"관둬. 몇 번 마주친 정도가 전부인 애한테 뭐하려고 그렇게까지 해?"

"걱정 마. 아저씨 꿈자리 뒤숭숭하게 하긴 싫어. 그거, 버리고 갈게. 적어도 1년 정도는 더 살아 볼 테니까..... 그정도로 봐줘."

죽음도, 고통스런 삶도. 녀석에겐 크게 다르지 않다.

나로써는 어찌 할 수 없단 처절한 무력감에 빠져든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녀석을 제대로 돌아가게 해주는 정도였다.

손에 쥐어준 돈 몇 푼과, 내 연락처까지.

물론, 전화가 오는 일은 없었다.


ㅡㅡㅡㅡ

기사를 본 건 1년하고 조금 더 지난 날이었다.

다리 난간에서 담력 시합을 하던 불량 고교생 실족사.

나는 회사도 조퇴하고는 사건의 장소로 황급히 발을 놀렸다.

당연히, 남은 건 없었고, 뭔가 찾아낼 수도 없었다.

끝없는 무력감에 나는 절망했다

제대로 아는 사이도 아니다.

뭔가 이여기를 주고받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너무나 허무한 결말이었다.

녀석이 심은 허무의 씨앗이 내게도 퍼지는 듯 하다.

어쩌면, 나도 난간을 걷게 될 지도.

그러나.

삑삑.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다.

"나 아냐. 적어도 아저씨가 눈치 챌 방법으론 안 죽어.이상한 생각 하지 말라고. 아저씨까지 나 때문에 우울해지면, 싫으니까."

ㅡㅡㅡㅡㅡㅡ

허무주의는 나아지지 않는다. 부모님의 사이가 나아지고, 성적이 좋아지고, 친구가 생겨도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녀석은 조금 더 시니컬한 어조로 한 마디 덧붙였다.

"나한테 관심 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쉽게는 못 죽겠더라."

이어지는 이야기는 없었다.
녀석이 나를 좋아하게 된다거나, 나에게는 마음을 터 놓는- 보기 좋은 결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것은 나름 해피엔딩이 아닐까, 조금 고민해 본다. 


02. 미이 이야기(조금 김)


달동네를 저 아래까지 내려가 근처 편의점에 갔다 올라오는 길에 사람을 발견했다.


거의 시체에 가까웠지만 분명히 살아있었다. 복부에 자상. 명백한 범죄다. 흉긴는 아마도 칼. 크기로 보건데, 식칼?


허벅지 사이로는 하혈이 흐른다. 강간 후 살인미수가 의심된다. 


내리는 비에 소녀의 몸이 차게 식어가고 있었다. 지금 구급차를 부른다 해도 버티지 못할 테지.


어쩐다, 주변에 사람도 안 보이고. 나는 휴대폰이 없었다.


이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외투를 벗어서 소녀에게 덮은 뒤, 집으로 들인다. 푹 젖은 교복을 벗긴 다음 복부를 체크.


지금은 자상보단 저체온증을 신경쓰는 게 좋겠지.


내 반지하 방에 제대로 된 보온용품은 없었다. 


우선은 보일러를 켠다. 축축한 수건으로 물기를 대충 훔친 뒤, 면 셔츠로 꼼꼼하게 물기를 제거했다.


겨울옷을 대충 입히고, 다음은 복부 차례였다.


소독용 알코올이 다행이 남아있군.


감염은, 다소 의심스럽지만. 병원에서 항생제를 먹으면 괜찮겠지. 내장은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밀봉된 붕대를 뜯고, 알코올로 상처를 소독한다. 정신이 없는데도 여자애의 몸이 요동쳤다.


가만 있으렴. 예쁜 얼굴이 찡그려지는 건 슬프지만 이렇게 안 하면 죽으니까.


연고를 바르는 건 지금 단계에선 불필요. 붕대에 피가 응고되지 않게 처치한 다음 둘둘 감아 마무리한다. 


애초에 저체온증을 제외하면 큰 상처는 아니었다. 저대로 놔두면 꽤 회볼될테지.


이제는 다시 내려가서 공중전화를 찾아 구급차를 불러야겠군.


전화 하나 없는건 꽤 불편했다. 


으슬대는 어깨를 감싸안고, 나가려는 순간.


"안돼요."


가느다란 목소리가 나를 가로막았다.


환자의 헛소리가 아니었다. 명확한 의지가 이쪽에 향한다.


"병원은 안돼요. 발견될 거예요."


"무엇으로부터?"


"......"


짧은 정적이 고민을 드러냈다.


나는 문을 닫았다.


일단은, 물을 데워서 마시게 하기로 했다.


ㅡㅡㅡㅡㅡㅡ


제대로 된 가재도구도 없는 집이었기에, 냄비에 수돗물을 받아 끓이는 정도가 전부였다.


컵도 내가 쓰는 하나가 전부다. 나야 뭐 편의점에서 사 온 음료수를 마시면 되지만.


"빈곤해서 미안하군. 차라도 내주고 싶은데, 없어. 뜨거운 걸 마시면 조금 도움이 될 거야. 맛없어도 마시는 게 좋아."


소녀는 불만이 없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젓는다. 그리고 데운 물을 호호 불어 넘겼다.


잔뜩 맞아서 터진 입술에 뜨거운 게 닿아 쓰라릴텐데도 참으며 전부 마셨다.


체온이 어느 정도 돌아오고, 약간이지만 그녀의 혈색도 돌아왔다.


"이름은?"


"미이."


"요새 교복은 잘 모르겟지만, 사이즈가 하나 크고 비교적 새것. 아마도 고등학교 1학년. 

사는 데는 여기 근처. 달동네 뒤쪽 판자촌이군. 옷이 바닥에 쓸린 데 연탄 가루가 묻어있더라고.

평소에 부모님, 아. 부친 단독이군. 오른쪽에 상처가 많으니. 게다가 남자 주먹이고. 자주 맞고 다녔군.

머리는 좋지만 성적은 좋지 않아. 공부할 시간이 없거든. 집에 있으면 계속 맞으니까 주변을 돌아다녔겠지.

가느다란 다리에 고지대를 오르내릴 때 쓰는 근육만 조금 도드라져 있어.

머리가 좋다는 건 거의 감이지만."


"...... 혹시 탐정이에요?"


"아니. 인생 실패하고 도피생활하는 히키코모리.

 민감한 부분을 언급하는데도 별다른 반응이 없는 걸로 보아, 내면에선 거의 극복하고 있었......

지만 오늘 사건 때문에 떠오른 모양이군. 

 좀 닥치고 있을게."


"......괜찮아요. 어차피 전부 들킨 거 같으니까."


미이는, 그러나 떨고 있었다. 추위때문은 아니었다. 체온은 어느 정도 정상.

주변에는 눅눅할 지언정 따뜻한 걸 잔뜩 두르고 있으니.


"아빠가...... 저를......"


"강간?"


"그건 틀렸네요. 팔아넘겼어요."


...... 부친에게 강간당하는 것 보다 심각하군.


대략적인 이야기가 이어졌다. 


가난에 시달리던 부친이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한 조직폭력배에게 그녀를 헌납하려 했다는 것.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덮쳐졌다는 것. 


격렬한 몸싸움 끝에 자신을 강간한 남자의 눈을 찔렀지만...... 복부를 찔리고 버려졌다는 것.


근처에 있는 조폭이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생각보다 제대로 된 조직을 가지고, 돈 된느 양지의 사업을 음지의 알력으로 따 내는 일을 한다던가?


개중에는, 고위직의 뒤틀린 취미를 만족시키기 위한 인신매매도 포함돼 있었다.


미이가 가진 아름다움이라면, 그리고 그녀의 사정이라면. 타겟이 돼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그림 속에서 튀어나온 듯 아름다웠으니까.

아니...... 그림따위를 칙칙하게 만들어 버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내가 이만치 시니컬한 인간이 아니었다면, 첫 눈에 반해 버렸을 지 모른다. 고등학교 1학년한테.


"병원에 못 가는 이유는 알겠네."


근처의 병원에는 조직의 손이 거의 닿아 있다고 생각해야 했다. 


손이 닿아있다 해서 병원의 운영을 좌지우지하지야 않겠지만,

 그래도 자신들이 시체로 유기한 사람이 치료 받으러 왔을 때 연락을 받을 정도는 되겠지.


"머리가 잘 굴러가네."


"특기거든요. 누구를 피하는 게."


아아. 아빠를 피해 다니며 는 기술인가? 그리고 귀찮게 쫓아다니는 남자들이라던가.


어쨌건 머리가 좋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그러면..... 벌써부터 곤란해졌다.


미이의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분명히 감염돼 있었다. 소독용 알코올을 붓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었다.

혈관과 조직으로 침투된 병원균은 심각하다. 


항생제를 먹여야 했고, 또 복부를 꿰메야 했다.


"저, 나갈게요."


......?


"무슨 헛소리야?"


"제가 사라진 게 곧 들킬거에요. 누군가 발견하고, 살아있건 죽어있건 병원으로 보낼 거라 생각햇겠지만.....

당신이 절 구해줬으니까요. 그러면 당연히 가까운 데를 찾아볼거고, 폐를 끼치게 되겠죠."


"......그래서?"


"혼자 떠난다면 분명히 발견될 테고...... 잡히면 그 사람의 눈을...... 그렇게 만든 댓가를 치르겠죠.

아하하..... 길게 살 생각은 없었지만, 이런 식으로 죽는 건 싫었는데......

구해준 건 고맙지만, 역시 그냥 죽게 두셨어야 했어요."


미이가 몸을 일으켰다. 복부의 통증에도 아랑곳않고 문으로 나서려 했다.


제길. 마음같아선 뺨을 갈기고 싶군.


그렇지만 약해진 환자에게는 너무 가혹한 짓이었다.


연약하고, 나약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꼬맹이.


꼬맹이는 완력에는 이기지 못한다. 나는 녀석의 손목을 세게 붙잡았다.


"놓아주세요. 소리 지를 거예요."


"질러. 사람을 끌어들이고, 자기 생존을 알리고, 게다가 날 곤란하게 만들고 싶다면."


안타깝지만 머리는 내가 더 잘 돌아간다.


유구는 몇 번이고 팔을 빼내려 했지만 내 손아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울먹이는 눈. 가학심을 자극하는군. 허나.


"기다려. 옷을 갈아입고, 택시를 타고 다른 시로 가면 돼. 모자에 안경에 둘둘 두르면 못 알아 볼 거야."


"주변에 감시가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요?"


"감시가 있다면 내가 널 집에 들인 시점에서 행동했겠지. 녀석들은 네가 병원에 올 거라고 믿고 잇어."


"그, 그래도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내 손으로 살린 사람이 뒈지는 게 훨씬 큰 폐다. 닥치고 따라와."


"여, 여기는 어쩌시고요! 저를 데려가신 게 들키면 분명 들이닥칠 거예요!"


흥. 엿이나 먹으라지.


이 집에 미련을 남길 건 아무것도 없다. 거의 시체처럼 지내던 장소였고.


가구도, 짐도. 아까울 건 하나도 없었다. 돈이라면 내 얄팍한 지갑에 든 게 전부였고.


뭐, 병원 가방 하나는 들고 가야겠지만.


"이깟 집에 미련은 없어. 월세가 싼 것만 장점이니까. 여차하면 시골로 가서 더 싼 집을 얻으면 돼."


미이의 동공이 떨린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왜 이렇게까지 해 주는 지 알 수 없겠지.


사실 나도 그래.


내 손으로 살린 사람만 아니었으면, 아무리 가혹한 운명을 맞이한다 해도 관심 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 번 손 댄 이상. 책임은 진다.


나는 미이에게 남은 옷을 전부 입혔다. 가느다란 허리 주변에 옷을 뭉쳐 두르고, 잠바를 입혔다.


변장의 기본은 체형이다. 원체 얇고 가느다란 팔다리여서, 수건과 옷을 한 겹씩 감고도 내 옷을 입을 수 있었다.


"숨막혀요......"


"참아. 훨씬 아픈것도 참았으면서. 이 동네만 벗어나면, 괜찮은 고아원에라......"


안되겠지. 그녀는 벌써 고등학생이니까. 


친부가 찾아온다면 일이 복잡해진다. 이런 사람들을 받아주는 교회라도 찾아야 하나?


머리가 복잡했다. 그런 교회에 가고 나면? 


평생 숨어 살 건가?


왜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들이, 그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이런 짐을 짊어져야 하지?


제길. 


역겨운 기분이다. 


하지만 뜸들일 시간이 없다.


감염은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다.

이대로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상처 안쪽에서 번식한 세균들이 고열과 격통으로 미이를 삼킨다.


아니..... 다른 도시로 가는 도중을 생각해 보면, 거의 확실하게.


마음같아선 업고 뛰어 내려가고 싶었으나, 그런 눈에 띄는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배에 구멍 뚫린 환자와 조금의 시간을 두고 흩어져서, 버스 정류장에서 합류해야 했다.


ㅡㅡㅡㅡㅡㅡㅡㅡ


약국에서 항생제를 사려는 건 실패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녀석들이었다.

미이는 서서히 아파왔고, 점점 더 열이 올랐다.


도시 구획 하나만 바뀌어도 조직폭력배따위는 무서워 할 게 못 된다.


그렇지만, 그때까진 거의 1시간 반이 남아있었다.


문제는- 결국 일어났다.


평소에 식사를 부실하게 하고, 스트레스를 잔뜩 받으며...... 학대당하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생각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미이가 버치지 못했다.


불덩이같은 열. 격통.


"참을 수 있어요. 얼마 안 남았잖아요?"


제기랄.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이마의 땀을 닦아주는 정도가 전부였다.


나는, 이 좆같은 변장. 안에 겹겹이 껴 입은 옷을 벗겨 줄 수도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병원에 어떻게든 도착했다.


미이를 응급실에 넣어놓고, 진통제와 항생제가 들어가는 걸 확인한다.


제길. 긴장이 풀려 버린다.....


ㅡㅡㅡㅡㅡ


심야, 병원,, 응급실.


익숙한 소리와 냄새에 정신을 차린다. 미이가, 차가운 손으로 나를 깨우고 있었다.


"도망쳐요."


속삭이며, 멀리 한 켠을 가리킨다.


40대 중반. 술에 찌든 피부. 떡진 머리칼.


미이의 아빠겠군. 뒤에 있는 사람들은? 정장을 입었지만, 생각 할 것도 ㅇ벗었다.


제길. 이 병원까지는 조직의 구획이었떤 모양이다. 


아니면 어디서 들켰던지.


다행이 저쪽은 아직 미이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도망친다면......


"안돼요. 그래도, 그동안 고마웠어요."


미이는 싱긋 웃으며, 내게 작은 입맞춤을 보냈다.


그리고는- 그들과 시선을 마주쳤다.


ㅡㅡㅡㅡ


미이의 부친이 그녀를 데려갔다. 조직원들도 함께였다.


나는 실패했고, 그녀는- 아마 강간당하다 살해당하리라.


맞서 싸울 용기는 있었으나.....

그것이 도움되지 않으리란 건 알고 있었다.


내가 경찰에 잡혀 갈 거고, 녀석들이 미이를 강간할 때 더 격렬해 질 뿐이겠지.


나는, 결의를 굳혔다.


하아...... 이건, 정말 싫었는데.


그들이 어디로 향했을 지, 찾는건 어렵지 않았다.


ㅡㅡㅡㅡ


달동네 위, 판자촌의 집 문은 거친 발길질 한 방에도 쉽게 부서졌다.


좁아터진 집에 남정네 세 명과 미이의 아빠까지. 역겨운 냄새가 풍긴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옆 높의 관자놀이에 빠루를 찍었다.


뇌수가 튄다.


살인...... 은 이걸로 2번째로군.


시기를 맞춰, 기다렸다는 듯 미이도 입에 문 면도칼을 들어- 자신을 범하던 외눈의 경동맥을 그어버렸다.


아아. 복선은 있었다. 미이가 내게 입맞춤을 보낼 때, 물려줬다.


자살용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쓸모가 있을 줄이야.


남은 한 명은 아무리 봐도 쫄따구로군.


일단 무전기와 휴대전화를 빼앗는다. 미이에게 칼을 목에 대고 있게 시킨 다음, 옷가지로 입과 팔다리를 속박했다.


조직에 연락하는 건 사절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부친이 남아있었다.


"어떻게 할래?"


미이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건 괴로운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선택해야 할 문제였다.


깊이 고민하던 미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부탁드릴게요."


남겨두는 게 위험하다 생각했겠지. 그 동안 저지른 만행의 복수일 수도 있고.


내게 사람을 또 죽이라고 하다니.


뭐, 사람은 아니니까 상관 없나?


경동맥은 피가 분수처럼 튀어서, 영 좋지 않다.


관자놀이를 노려 식칼을 위둘렀다. 내 솜씨는 녹슬지 않아서, 정확히 뼈의 연결부위를 가른다.


작업이 끝났다. 


우리 인생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


미이는 긴장이 풀렸는지 울음을 터트렸다.


흐르는 눈물. 흐르는 감정. 흐르는 추악한 욕망.


소녀가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거친 것들 뿐이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죽은 놈들의 주머니를 털자 꽤 괜찮은 돈이 나왔다. 꽤 먼 도시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한 다음


모텔을 잡고 적당한 커플로 위장했다.


미이의 복부는 여전히 열려 있었다. 수술 받기 전에 빼내가 버렸거든.


감염은 거의 괜찮겠지만.....


"역시 기다렸다가 제대로 수술받지 그래?"


"돈. 시간. 발각의 위험성...... 전부 싫어요. 그리고, 당신을 믿어요."


"흥. 수술하다 사람도 죽여 봤어."


"예. 당신 손에라면 죽어도 좋답니다."


멍청한 계집. 


병원 가방에서 장비를 꺼낸다. 여기 설비로는 열탕소독이 한계군. 


그리고, 몰래 꿍쳐둔 모르핀을 집어들었다.


"이거, 맞으면 돌이킬 수 없어. 최대한 조금 쓰겠지만, 의존증은 반드시 생겨."


"그래서에요. 이제 당신 옆에 있고 싶거든요. 아니면..... 저는 그냥 하셔도 돼요."


마취 없이?


그만둬라 멍청이. 그건 사람이 견딜 고통이 아니다.


하아..... 이까짓 수술에 모르핀을 쓰는 것도, 멍청한 짓이긴 하다.


"5바늘. 죽을 만큼 아플 거야."


"예."


입에 옷가지를 물렸다.


신속하게, 아플 틈도 없이.


기술은 아직 무뎌지지 않았다.


ㅡㅡㅡ


"환자에게 술을 먹여도 되나요?"


"엄금이지만, 이번엔 예외야. 좀 마시고, 덜 아플 때 바로 자."


"알겠어요. 그래도, 정말, 생각보단 별로 안 아팠어요."


복부의 두꺼운 표층을 5방이나 꿰멘 녀석이 할 말은 아니었다. 

시술하는 내가 끔찍할 지경인데, 녀석은...... 고통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혹시, 산부인과 시술도 할 줄 아세요? 질 세척이라던가."


"내일 약국 가서 애프터 필이라도 사 먹어.

멘탈 참 튼튼하네. 이틀 새 몇 번이고 강간당하고, 사람도 죽이고, 죽을 뻔 하고.....

나라면 못 버텼어."


"옆에 든든한 사람이 있었거든요. 우으윽..... 술맛은 영 모르겠네요. 어른들은 이걸 왜 마셔요?"


"어린왕자에 나온 유명한 대답을 들려줄까?"


"됐어요. 후으......"


미이는 술에 약했다. 몸무게가 가볍고, 지친 상태니 소량의 알콜로도 단숨에 취하겠지.


그래서일까?


"저, 안아주지 않으실래요? 중고품에 더럽지만......"


"자포자기냐?"


"좋아하는 사람에게 안기면 기분이 좀 덜 더러울 거 같아서요."


"취했군. 자라. 의사 권고다."


"역시, 더러워서예요?"


하아. 나는 꼬맹이 취향이 아니다. 그야, 겁나 예쁘지만.

그리고 머리도 좋고, 어쩌면 나보다 어른스럽지만.


입에 면도칼을 물고, 입 안이 난도질 당하면서도 내색하지 않을 정도의 꼬맹이라면


반해도 좋을 지 모르긴 하겠다.


허나.


나는 녀석의 이마에 딱밤을 한 대 먹여줬다.


"다 나으면. 그리고, 네가 술 깨면."


"약속한 거예요?"


"내일 이불이나 차지 마."


"사실, 어차피 내일 약 먹을 거면, 오늘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서 말한 거예요."


"고작 만 얼마 하는 약이랑, 네 감정과 몸을 저울질하지 마."


"저, 진짜 오빠 좋아하는데요?"


"오빠? 내가 너보다 열 살......은 안많군. 하여간!"


"그러면 오빠네요. 있죠, 오빠는 이름이 뭐에요?"


그러고 보니 아직 미이에게 이름을 밝힌 적이 없었군.


내 이름은.......


03.악마와의 거래



-50% 할인?


나의 멍청한 물음에 악마가 작게 한숨쉬더니 사무적으로 대답한다.


-최근에 마계도 불경기라서요. 악마랍시고 소원 들어줄 테니 영혼 주세요 해도 믿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에요. 50%할인. 영혼 반 개로 소원 하나를 들어드립니다!


절반의 영혼이라는 게 대체 무슨 의미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수명이 절반 줄어드는 걸까? 아니면 나의 감정이나 생각이 절반쯤 사라지는 걸까?


혹은 지옥에서 절반만 고통받는 건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느 쪽이건 별로 상관없기도 했고.



인생은 요지경.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범함이란 TV나 동기들 이야기에서만 듣는 다른세상 이야기였다.


중학교 2학년이 되자 마자 불법으로 야간 편의점 알바를 해 가며 생활비를 벌었고, 덕분에 성적도 건강도 엉망.


외모도 평범하고 성격도 비뚤어져서 친구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나를 돌봐준 할머니는 병세가 심한데도 돈이 없어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계신다.



현실은 지옥보다 더할지니. 


미래의 고통으로 현재의 고통을 덜 수 있다면 그다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소원은, 뭐든 들어주나요?


악마는 가벼이 고개를 저었다.


-뭐든지는 안돼요. 소원을 100개로 늘려 달라거나, 우주의 모든 신비를 알고싶다거나, 세계를 지배하고싶다거나.

 불가능한 일은 얼마든지 있어요.

 그래도 당신이 어떤 의미로 질문한 건지는 대충 알겠네요. 

 어느정도 가능한 일이라면 대체로 가능하답니다.


분위기를 깨는군. 악마라면 뭐든 이뤄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규칙도 있구나.


그래도 내가 바라는 건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었다.


-돈. 평생 써도 다 못 쓸 돈. 막대한 재산을 원해요. 그렇다고 베네수엘라 돈처럼 평생 써도 다 못 쓰긴 하지만 의미가 다른 건 말고. 무슨 뜻인지 알죠?


-본인이 멍청하다고 생각하지만, 객관적으로 보기에 당신 머리는 잘 굴러가네요. 어쨌든, 이해했습니다.

 평생 써도 다 못 쓸 막대한 부를 드리죠.대가는 당신 영혼의 절반.

 승인하신다면, 이쪽 서류 원본과 사본, 그리고 여기 겹쳐서...... 사인, 도장, 지장 어느쪽이든 좋아요.


-와아..... 의외로 철저하네요. 


마법진 같은 데 피라도 떨어트려야 할 줄 알았는데. 


어쨌든, 사인을 마쳤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내가 편의점 일 할 때 쓴 계약서보다는 훨씬 제대로 된 

그리고 공정한 계약서라는 점이었다.


악마는 빙글빙글, 예쁘장한 웃음을 지으며 한 건 올렸다는 뿌듯함을 내비친다.


-그나저나 별로 달라진 게 없네요. 돌아가면 통장에 엄청난 돈이 입금돼 있나요?


-아하하! 농담도 참. 그럴 리 없잖아요? 무슨 마법도 아니고.


-......?


악마. 계약. 사기. 그런 종류의 사고가 머릿속을 떠돌기 시작했다. 


분노는 한 박자 느리게 찾아왔다. 


상대는 악마였고, 내가 멱살을 잡는다 해도 아무 달라지는 건 없을테지만 그럼에도-


-당신의 소원은 이뤄집니다. 앞으로 영혼의 절반을 바쳐 자신의 모든 걸 걸고 이룩해 내지요.


-......


-어디까지나 경험상 말씀드리는 일이지만, 당신같은 소녀가 이 정도 의지로 행하는 일이라면 아마 5년이 안 걸릴겁니다. 

 뭐 정확한 건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더라고요.


-... 마법은? 악마의 힘은?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네.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요?

 뭐든 이룰 수 있는 기적같은 힘이 있으면 이렇게 계약 따러 돌아다니겠어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어느정도 이해는 되는 느낌이었다.


-앞으로 내가 해 내는 거야?


-네.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 이룩해 낼 지는 전혀 짐작도 안 가지만요. 당신의 영혼의 절반이 그 과정에 타버리는 것도 확실하지요.


-영혼이라는 건 뭐야?


-글쎄요. 뭘까요?


하하.


웃음이 터졌다. 허탈하면서도- 기뻤다.


알 수 있었다.


저 OL은 진짜 마계에서 온 악마였고, 


영혼이 무엇인지는 전혀 모른다고.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미래에 평생 써도 다 못 가질 재산을 얻게 되리라고.


-그 직업, 월급은 잘 나와요?


-하하. 어린 아가씨를 위해 특별히 가르쳐 드리자면, 이번에 실적을 냈으니 성과급이 월급 500%는 나올거에요!


-축하해요.


-뭘요. 고객님 덕이죠. 그럼 이만. 힘내시길!


-----------------------------------


이후.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나는 여전히 나였고, 주변 환경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가 변한 건 확실했다.


짬을 내서 선생님들에게 할머니를 병원에 보낼 방법을 물어봤다. 어찌저찌 소개받은 공무원에게 이러저러한 제도로 도움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그만뒀다. 나를 음흉하게 쳐다보던 점장과 담판을 짓고, 그동안 이리저리 못 받은 돈을 전부 몰아받았다.


-중학생이 아르바이트 한 걸 들키면 학교 퇴학이야, 퇴학!


-중학생을 고용해서 야간 아르바이트 시킨 걸 들키면 벌금에 영업정지는 기본이고 자칫하면 실형도 나오지 않나요?

 알아보니까 벌금이 이 정도 나오던데, 그간 밀린 돈이랑 이래저래 해서 요만큼만 주시면 입 닫아 드릴 수 있는데?


일 하게 해 준 건 감사하지만, 최저시급 반만 주고 야간 알바 쓰려는 속셈이었으니까 용서는 안 해 준다.



수중에는 적당한 몫돈. 할머니는 병원에 계셔서 마음이 편하고, 일을 안 하다 보니 몸도 가벼웠다.


그리고-


나는 인터넷을 켰다. 


하고싶은 일이 많았다. 알아봐야 할 일도 많았다.


직장을 구하게 될 지, 사업자가 될 지, 그도 아니면 어떻게 다른 방법을 써야 할 지. 


아무것도 정해지진 않았으나-


나는 악마와의 계약을 믿는다.


내가 전념하는 한 나의 목표는 성취되리라.


04. 생업종사자


2학년이 돼서 반이 바뀌고 한 달쯤 지나고 나니 드는 생각인데, 옆자리 여자애가 어째서 이렇게까지 평범하게 생활하는지가 조금 의문이었다.

처음엔 성적은 꽤 좋은 편이니 그럭저럭 성실할거라고 생각했다. 치마를 살짝 줄여입거나 가끔 지루한 강의가 있을 때는 땡땡이도 치는 걸 보니 평범한 여자애구나 싶었고.

하지만 나한테 이상한 얘기를 했을 때는 왜 이년이 아직 따돌림 안 당하는지가 의아했다.

-미안. 이것저것 훈련이 있어서. 우리집 가업이 청부살인이거든. 누가 요즘 칼이니 체술이니 배우냐고 따지기도 했는데, 이건 절대 안 빼주더라.

살짝 꼬셔볼 심산으로 오늘 돌아갈 때 약속 있나 물어봤더니 저런 대답이었다.

중이병 걸릴 나이는 좀 벗어났는데 저런 얘길 태연하게 하고 다니는 건 뭐랄까, 저정도 예쁘장한 외모로 얘기하니 그나마 넘어가 주는 게 아닐까 싶다.

다른 친구들한테도 물어봤는데 다들 어느정도 들어는 봤다는 모양이다.

-걔? 청부살인 어쩌고 하는 거? 언제였더라..... 하여간 들어는 봤어. 그냥 장난 치는 거 아니야?

사회생활 능력도 좋아라. 친구 없는 찐따들이 저랬으면 당장 지건 맞았을텐데. 하여튼 나도 장난이려니 생각하고 넘기기로 했다.

문제는 이 여자애, 나한테는 꽤 자주 그런 얘기를 꺼냈다.

-오늘은 같이 가자고 안 해?

-올ㅋ. 의외인데.

-인스타빨 잘 받을 거 같은 카페가 있었거든. 혼자가긴 싫어서 남자 하나 데리고 갈라 그랬지. 어제도 훈련만 없었으면 가고싶었어.

-...

예쁘장하고 성격도 서글서글하고 다 좋은데 저런 얘기를 할 때 마다 기분이 깨진다. 그래도 워낙 얼굴이 반반하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방과후에 같이 짐을 싸며 그 애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당장은 좀 그렇고, 산책 좀 하다 갈래?

-상관은 없는데.

-마침 꽃 필 시기니까 학교 뒷산 따라서 좀 걷자.

-어두운데 안 위험하겠어?

-나는 괜찮아. 어두우면 분위기도 살고.

분위기? 나한테 뭔가 그렇고 그런 거라도 기대하는 건가? 중학생때도 여자친구가 있었지만 어린애 장난 같은 느낌이었다. 고등학생이 돼서 본격적인 연애생활정돈 해봐야겠지.

이런저런 망상을 부풀리면서 겉으로는 태연하게 앞장선다.

-잘 됐네. 준비 끝?

-응.

-우와, 가방 되게 무겁네.

-아, 그냥 놔둬. 내가 들고 갈 거니까.

-됐어. 이런건 남자가...

-잘보이려고 애쓴다.

내가 들기에도 꽤 무거운 가방을 한 손으로 가볍게 뺏어간다. 보기보단 힘이 센 모양이다.

저렇게까지 하는데 들어주려고 할 필요도 없지 싶어 그냥 옆에 섰다. 여자애 특유의 보송한 냄새에 조금 취한다.

-뭘 그렇게 봐?

-아, 미안.

-뭐 됐어. 학교 뒷산 가 봤어?

-풍경화 그리고 할 때 한 번인가?

-나는 가끔 다녀. 걷는거 좋아하거든.

-체력도 좋아. 나는 밥먹고 나면 학원가기 전까지는 그냥 누워있는데.

-훈련을 받으니까. 일반인이랑은 비교하면 안 되지.

또 저 얘기. 한 마디 할까 하다, 이런 상황에서 분위기 깨면 다 망치는거란 생각에 참는다.

주제를 돌려서 가려는 카페네 뒷산의 잘 만들어진 산책로 얘기를 꺼냈다. 요즘 애들 답지 않게 꽃 이름 같은 걸 외우고 있는 게 참 매력적이었다. 얼굴만 보고 꼬셨던 건데 점점 더 마음에 들어.

산책로라 해 봤자 학교 뒷산에 길을 터고 난간을 매달아 놓은 것이니 길지는 않다. 200미터쯤 걸어서 꽃이 흐드러진 공터에 다다른 우리는 벤치에 앉아 잠시 쉬기로 했다.

분위기는 끝내줬다. 달 밝은 하늘 아래 흐드러진 꽃잎이 가로등 불빛에 빛나고 있었다. 꽃향기는 몽환적이었고, 바로 옆의 입술은 너무 매력적이다.

고백을 하거나 받거나 하지도 않았고 아마 그러지도 않을테지만 이미 이런 데 단 둘이 온 시점에서 상황은 끝난거지.

나는 그녀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새하얀 손이 내 뺨을 더듬었다. 기분 좋은 감촉. 그리고

시야가 흐려진다.

나는 넘어지고 있었다. 아니, 아닌가? 세상이 회전한다. 세상은 돌지 않으니 내가 도는 것일 테지. 시야 한 구석엔 내 머리와- 칼을 든 계집.

상황이, 잘, 이해되지,않,는,ㄷ,,,,,,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만개한 봄꽃을 감상하며 가을은 칼을 닦았다. 꽤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키스정도는 하고 나서 죽일까 고민하면서도 가을은 붕붕, 고개를 저었다.

-얼굴만 보고 나 좋아하는 사람이랑 사귀는것도 이상하지.

그래도 미련이 남는지 가을은 남자의 머리를 주워 먼지를 털고, 이리저리 만져보고 나서야 시체 가방에 집어넣는다.

사진빨을 갈 받는 카페에 남자랑 가서 잡담이나 좀 하고싶다는 건 사실이었다. 타겟이 아니었다면 가을은 실제로 그와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프로인걸. 돈을 받아버렸으면 어쩔 수가 없단 말이지. 애초에 거절하던지, 확실히 처리해 주던지.

시체를 가방에 집어넣은 가을이 처리반을 불렀다. 여기서 그녀가 할 일은 이제 없었다.


시간이 꽤 지나, 가을이 대학 새내기가 됐을 때. 그녀는 여느때처럼 성격 좋게 친구와 잡담을 하는 중이었다.

-야, 여기 학비 너무 비싸지 않아?

-그쵸? 방도 겁나 비싸고. 여기 돈 내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하긴, 고생이라 하면 미안하죠. 남들은 몇 년 일하는 거 한탕 쳐서 버는 건데 말이에요.

-일? 혹시 뭐 해?

-아아, 가업으로 청부살인 해요. 솔직히 취향에는 안맞는데 쩐이 장난 아니니까 별 수 없죠. 선배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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