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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감상문.txt

_코끼리
2019-11-11 02:49:35 107 3 9

"아포가토 그리고 광안리 소나기"


 아마 그 때였을 거다.

 그녀를 바래다 주던 학교 앞 카페에 나란히 앉아 노곤한 온풍에 녹아내려갈 때였다. 그녀는 아메리카노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풍덩 집어넣었다. 아메리카노의 따뜻함은 아이스크림을 포근히 품었다. 까슬한 직물 소파의 촉감을 느끼며 커피 속 바닐라처럼 녹아가던 때, 그녀는 분명 나를 그 전보다 조금 더 아꼈을 거다.

 "너 아포가토 몰라?"

 싱긋 웃던 단발의 뽀얀 얼굴이 가물거린다. 머그컵 위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때문이었는지, 렌즈 낀 눈이 뻑뻑해서였는지, 혹은 기억이 바래졌기 때문인 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렇지만 요맘 때처럼 쌀쌀한 날씨에 실내로 들어가자 뺨이 붉어졌던 기억은 확실히 남아있다. 오히려 그 때 헷갈렸던 것은 붉었던 뺨이었다. 촌놈은 으레 그렇다. 세련된 도시에 대한 환상이 있기 마련이다. 익숙지 않은 도시의 자국이 스칠 때면 괜스레 아는 척 으스대거나 혹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촌놈이란 걸 증명하듯 뺨이 붉어졌다. 그 때처럼. 커피는 처음 마주한 그런 익숙지 않은 도시의 자국 중 하나였다. 더구나 아포가토라니.

 "아... 사실 그런 거 잘 몰라. 있지, 실은 나 커피숍에서 주문할 때 괜히 이상한 거 주문할까 봐 멍청이처럼 맨날 아메리카노만 주문한다. 웃기지?"

 "뭘 그런 걸로 그래. 난 있잖아. 비행기 탈 때 보딩패스 어떻게 끊는 지 몰라서 공항에서 헤매다가 울어서 거기 직원이 구해준 적도 있어."

  언제나 그녀의 말에는 상냥함이 묻어 있었다. 같이 남산에 갔을 때도 그랬다. 몇 번 버스를 타서 케이블카까지 올라야할 지 모를 때 같이 말하면서 하이킹 트랙 슬슬 걷는 게 좋다 할 때도, 성인의 날에는 연인에게 향수랑 장미를 선물해주는 것이라고 넌지시 귀띔해 줄 때도, 헤어짐을 말하면서도 그간의 미안함과 고마움을 털어놓곤 했다.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 커피가 밝은 갈색이 될 때까지. 우습게도 둘은 서로의 멍청한 짓들을 끊임없이 늘어놓았다.

 "나는 지하철 탈 때 환승역 있으면 맨날 대화행인지 오금행인지 확인하느라 스마트폰 안 놓고 있는다."

 "나는 노트북 뜨거워지니까 아래에 얼음팩 받쳐놨다가 물 들어가서 고장난 적도 있어."

 "그건 좀 심했다."

 "그치? 좀 멍청했지."

 낄낄대며 다 녹은 아포가토를. 아니 다 풀어진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목욕하고 있는 아메리카노를 휘휘 저었다.

 만약 두 멍청이들의 바보대결을 카페 안 누군가가 보고 있었더라면 분명 실소를 터뜨렸을 거다. 밖에 내놓기엔 조금 창피한 대화들이 줄을 이었으니 무리도 아니다. 하지만 서로의 치부를 드러내고 사소한 멍청이 짓을 말할 때마다 그녀와 거리는 1cm씩 가까워졌다. 눈썹 사이 거리가 채 20cm가 되지 않을 때, 네 눈동자는 장난기로 가득 채워져 카페 한 켠에 세워 둔 크리스마스용 트리의 별처럼 반짝였다.

 '딸랑' 트리의 장난감 종이 울릴 때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한 30초 간은 깔깔대며 웃었다. 20cm 눈썹 사이의 긴장은 사라졌지만 12월을 맞이하는 카페 안의 온기처럼 따스함이 올랐다. 무릎을 치며 웃던 손이 서로 포개졌을 때 서로의 체온 36.5도. 딱 그만큼.


 11월의 비 내리는 날, 따스한 침대에 웅크려 체온을 느끼며 '창피함'에 대해 생각한다.

 어디 내놔도 창피한 그들 혹은 그녀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아포가토의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아마 지금이 그 때일 거다. 서로의 창피함을 드러내며 깔깔대고 웃을 수 있는 지금. 마음의 거리는 랜선의 길이보다 분명 짧아졌을 거다. 일면식 하나 없는 서로가 서로를 조금 더 아끼고, 조금 더 놀리고, 조금 더 무릎을 치며 웃을 수 있는 때가 비로소 온 거다.

 계절은 바뀌어 갈 거다. 부산 광안리 파도의 포말과 소나기는 조만간 얼어붙을 것이다. 또 중간고사라는 꽃말을 지닌 벚꽃도 필 거다. 미세먼지를 옴팡 뒤집어 쓰고 켁켁거리다 여름은 올 거다. 아마 그 때는 해운대를 찾을 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3학년이 될 거고 또 4학년을 향할테며 또 다른 누군가는 이미 직장인이 됐을 지도 모르겠다. 

 대학원에서 논문쓰다 지쳐 광안리 바다를 찾은 이가 '그 때 소나기 맞고 생쥐꼴에 난리도 아니었는데'하며 웃음을 지을 수도 있다. 사실 그렇다면 다행이다. 기억의 조각으로 남겨진다는 건 축복이니까. 어쩌면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까맣게 지워버릴 기억일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때를 생각함은 항상 그 때 앉아 있던 파라솔에서 소나기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 일것이나

 언젠가 서로가

 한없이 그리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한 '창피함'으로

 그 때를 불러오리라

 

 밤이 돌면서 새벽녘에는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이 기억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 때 창피해하며 웃던 날을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래, 창피함을 나누던 아포가토의 기억처럼. 

 광안리 소나기를 떠올리며, 서로를 드러내어 웃던 날을 추억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것만을 소중히 생각하는 것뿐이다.

 조금 더 창피하지만 조금 더 솔직할 수 있던,

 어제를 기록하여 이마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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