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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공지 스탠리패러블 리뷰글

Broadcaster 김나긋
2020-05-19 01:37:50 257 0 0

원본글
http://deadly-dungeon.blogspot.com/2013/12/stanley-parabl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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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패러블 (The Stanley Parable)

발매년: 2013

제작사: Galactic Cafe

유통사: Galactic Cafe

플랫폼: Windows


난이도 설정: 없음




평가 ★★★★★




다른때와 다르게 별점을 미리 앞에 내놓은 이유는 지금부터 말할 내용들이 이 게임을 직접 플레이하기 전에 읽기에는 매우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최대한 중요 스포일러 없이 게임의 재미를 설명하고 싶지만 이 게임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게임플레이 자체에서 오는 재미보다는 그것의 의미를 생각하는데서 재미를 얻게되는 게임이며 내 감상에 영향을 받아 미리 사고의 흐름을 한 방향으로 고정시킬 경우 게임을 플레이하는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게임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될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강추하고 싶은 게임이며 특히 게이머와 게임제작자는 반드시 해봐야 하는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경고했다. 게임을 안해봤다면 더이상 읽지 마시라. 읽고나서 후회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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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임은 표면적으로는 게이머와 게임제작자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게임을 해보면 누구나 곧바로 눈치채겠지만 주인공 스탠리는 게이머라는 집단을 대표하는 캐리커쳐이다. 오프닝에서부터 스탠리라는 캐릭터를 통해 이 게이머라는 종족에 대한 지독한 조롱이 시작되는데, 아무 생각없이 기계가 시키는데로 하루종일 버튼만 누르면서 즐거워하는 인간이하의 끔찍한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이런 캐릭터에 플레이어가 강한 일체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게임은 1인칭시점으로 진행되며 어떤 상황에서도 컨트롤을 강제로 뺏는 경우가 없고 스탠리의 얼굴이나 대사도 완전히 차단시킨다.


게임의 무대는 미스테리한 이유로 사람이 모두 사라진 한 건물이라 게임을 진행하는 내내 단 한명의 NPC도 만날수 없으니 플레이어가 느낄수 있는 자신외의 존재감 있는 대상은 오로지 게임 상황을 해설하는 나레이터의 목소리 뿐이다. 게임에서 상황을 해설하는 나레이터의 존재는 그다지 새로운 요소는 아니다 과거의 스토리 중심 어드벤쳐 게임들에서도 종종 쓰이던 개념이었지만 어디까지나 표현의 보조수단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 게임에서는 나레이터를 플레이어와 상호작용하는 유일한 등장인물로써 활용한다.


플레이어는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홀로 행위자가 되기 때문에 나레이터의 해설도 오로지 플레이어 한명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런데 원래 나레이션이란 미리 준비된 대본을 읽는 것이다. '스탠리는 뭐뭐를 하려고 합니다'라는 나레이션이 나올경우 관객에게 극의 진행을 미리 알리는 것이지만 게임이란 매체에서는 이런 나레이션은 플레이어의 컨트롤 권한과 충돌하게 된다. 정상적인 게임이라면 이런 미래시제 나레이션은 전혀 쓸모도 없고 써서도 안되는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걸 사용함으로써 플레이어에게 게임이라는 매체의 고유 특성-선택-을 강력하게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리게 만든다. 이제 선택은 플레이어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게 된다. 플레이어의 선택은 나레이터의 의도와 뗄레야 뗄수없는 깊은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플레이어가 나레이터의 해설과는 다른 선택을 하면 나레이터는 거기에 어떻게든 이유를 붙여서 원래의 계획으로 되돌리려는 억지스런 시도를 하는데 이는 플레이어에게 마치 잘못된 해설을 실시간 애드립으로 메꾸려는 것처럼 들려서 나레이터가 극의 바깥에 있는 전지적 존재가 아니라 극 내부에서 플레이어를 관찰하는 하나의 등장인물처럼 느끼게 만든다. 플레이어가 나레이터의 해설을 망치면 망칠수록 이는 점점 강도가 더해져 급기야는 아예 나레이터의 본분을 때려치고 직접적으로 플레이어에게 대화를 시도한다. 그것도 부족하면 아예 게임무대를 마구 뜯어고치기까지 한다. 이쯤되면 이제 플레이어에게도 나레이터라는 인식은 사라지게 되고 마치 시스템쇼크의 쇼단처럼 강력한 적대적 감시자로써 인식된다.


이 '감시자'라는 모티브는 이 게임의 핵심이다. 게임제작자란 사실 플레이어를 관찰하고 감시하고 통제하는 존재이다. 게임은 그 통제가 실제로 구현화된 장소라고 할수 있다. 좋은 게임이란 통제가 아주 은밀하게 물밑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플레이어가 통제되면서도 통제를 전혀 느낄수 없도록 말이다.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이것이 어떤 특정한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짜세계가 아니라 플레이어의 행위에 반응하는 진짜세계라는 환상을 줄때 극도의 몰입과 재미를 준다. 하지만 게임제작자가 신이 아닌이상 실제세상을 만들어낼수는 없기 때문에 교묘한 통제와 조작을 통해 플레이어가 그렇게 믿도록 속여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게임에서는 그 의무를 포기하고 게임의 기만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게임무대는 이것이 진짜공간이 아니라 만들어진 가짜공간임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나레이터라는 존재를 통해 플레이어를 통제하지 못해 안달이난 게임제작자의 본심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게임의 환상을 해체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도는 역으로 플레이어와 감정적으로 상호작용하는 하나의 생생한 존재-나레이터-의 환상을 만들어버린다. 환상을 부수므로써 새로운 환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 플레이어에게는 더이상 게임무대도, 게임스토리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나 나레이터-게임제작자-와의 관계만은 하나의 몰입주체가 되어 게임을 놓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이놈이 내 행동에 어떤 반응을 보일것인가, 어떻게 해야 이놈의 예측에서 벗어날수 있는가.


나레이터의 게이머에 대한 조롱은 이를 더욱 부채질한다. 너는 생각할줄도 모르지, 버튼 누르는것 외에 할줄 아는게 아무것도 없지, 친구도 없지, 히틀러,무솔리니,심지어 죽은 쥐보다도 더 해롭고 역겨운 존재지, 하면서 대놓고 게이머를 경멸하며 자폭타이머를 켜놓고는 탈출하기 위해 애쓰는 플레이어를 보면서 신나게 비웃기도 한다. 이 자폭 이벤트는 나레이터의 환상을 최고치로 강화하는 경험이기도 했다. 탈출수단을 찾기위해 이리뛰고 저리뛰면서 버튼을 누르는 모습을 그대로 나레이터가 묘사할때는 진짜 감시당하는 기분이 들어 으시시하기까지 했다. 시스템쇼크1편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플레이어는 이렇게 나레이터에게 극심한 모욕을 당하지만 로딩화면의 The end is never the end 라는 글귀처럼 게임은 끊임없이 재시작된다. 이전과는 다른 행동을 할때마다 나오는 나레이터의 반응과 끝없는 재시작을 멈출수 있는 최종적 결론에 이를 수단을 찾기위해 플레이어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계속 게임을 하게되는데 이는 진행하면 진행할수록 게이머와 게임제작자간의 관계의 본질이 사도-마조히즘임을 떠올리게 된다. 제작자는 게이머에게 문제-고통-를 주고 게이머는 자진해서 제작자가 만들어놓은 틀에 들어가 처벌과 보상을 요구하는것이다. 이 게임은 기본적으로는 전통적인 어드벤쳐게임의 작법위에 만들어진 게임이지만 장르의 틀로 보면 게임적으로는 무지막지하게 못만든 게임이라 게임하는 느낌이 안들어야 정상인데 묘하게도 전통적인 게임의 느낌이 드는 이유는 바로 이 관계를 구현해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이거슨 게임이 아닌데도 게임이여!


그러니까 이 게임은 생각없는 병신같은 게이머와 좋은 게임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형편없는 게임을 만드는 병신같은 게임제작자간의 구역질나고 병신력 넘치는 사도-마조히즘적 재앙의 끝없는 순환고리를 플레이어에게 1인칭 입장으로 적나라하게 체험시킨다. 이것은 현재까지의 대자본 게임시장의 모습에 대한 통렬한 풍자이며 그 자신 자체로 현재까지의 게임이란 매체의 안티테제가 되려한다.


그러나 이게 정말 이 게임이 전달하려는 진짜 주제일까? 아니다. 게임제작자와 게이머간의 사도-마조히즘적 관계는 게임의 표면에 드러나는 직접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게임은 이 구도를 단지 게임이 아니라 리얼월드에까지 확장하려는 시도를 한다. 게임으로 현실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스탠리로 대변되는 게이머는 플레이어 자신-평범한 소시민-이며 나레이터가 시종일관 플레이어에게 따를것을 요구하는 '스토리'는 사회의 지배담론을 의미한다. 나레이터가 제공하는 '두 문중의 하나'라는 선택은 바로 이 지배담론이 만들어낸 틀 안에서의 선택일 뿐이다. 어느쪽을 선택하던 스탠리는 지배담론이 만들어놓은 미로에서 빠져나올수 없다. 그것은 진정한 선택이 아니다. 진정한 선택은 지배담론에서 빠져나오는 제3의 길을 찾는것이다.


유일하게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진엔딩은 나레이터가 제공하는 전화를 받을것이냐 받지 않을것이냐의 양자선택이 아니라 플레이어의 창의력이 발휘된 전화선을 뽑는 제3의 선택에서 시작된다. 나레이터는 이런게 가능했는지 조차 몰랐다고 당황하면서 제발 리얼월드에서는 이런짓을 하지 말라며 교육영상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그래서 이 교육영상은 완전히 반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가난한 제3세계에 원조해주면서 서구사회의 지배담론으로 귀속시키느니 차라리 불을 지르는게 낫다는 이야기이며, 다른사람과 말이 안통할정도로 자신만의 사고체계를 만들어내라는 이야기이다.


주차장에서 스탠리가 미쳐서 죽는 엔딩에서는 한 여자가 죽은 스탠리를 보며 자신은 저런 미친사람이 아니라 정상이라는데서 위안을 받고 지나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리얼월드에서 그 기준은 지배담론이다. '스토리'를 따라가는 자만이 정상취급을 받으며 '스토리'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비참하게 죽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 플레이어가 나레이터의 스토리에 고분고분하게 따르게 되면 마치 텔레토비 동산처럼 평화로워 보이는 만들어진 가짜 안식처에 도달하게 되는데 왜 사람들이 사라졌나, 나레이터의 정체는 무엇인가 같은 진실에 대한 답은 주지 않는다. 재미있는 것은 이 준비된 '스토리'는 스탠리가 지배자의 음모를 밝히고 영웅이 되는 플롯이다. 진실로 진실을 가리는 것이다.


스탠리 패러블 미술관이 나오는 엔딩에서는 아예 진짜 제작자가 등장해 직접적으로 설명을 해버린다. 스탠리가 죽기 직전 갑자기 게임이 멈추고 여성 목소리의 새로운 나레이터가 등장하는데, 이는 원래 나레이터와는 다르게 진짜 게임 바깥에 있는 제작자의 진솔한 목소리이다. 미술관을 보여주며 미리 만들어진 선택 안에서 사는것은 죽어있는것과 다름없다고 말하며 플레이어에게 실존적 삶을 살것을 종용한다. 뒤이어 서로 싸우면서도 필요로 하는 두 사람이 보이냐고 묻는데 이 두 사람이란 당연히 스탠리-나레이터 => 게이머-게임제작자 => 개인-지배담론의 관계를 의미하는것이고 그 관계가 잘 보이지 않을거라는 말은 개인과 지배담론 사이의 관계를 직시하기는 무척 힘들다는것을 의미한다. 게임을 종료하라는 말은 결국 이 구도에서 빠져나오라는 소리다. 그냥 단순하게 게임 그만두고 열시미 돈버세용ㅎㅎ 같은 말을 하는게 아니다.


특히 진엔딩 마지막장면이 무척 재미있는데 플레이어는 두 문중 하나를 고르는 방의 천장에서 최초로 스탠리를 3인칭으로 바라보게 된다. 스탠리는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낙타과정에 머무른 인간이다. 생각없이 지배받는 인간이며 스스로 선택할수 없고 누군가에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갈수 없는 존재인것이다. 플레이어는 오로지 이 엔딩에서만 스탠리에서 탈출한다. 이 게임의 진짜 목적은 사무실 탈출도 아니었고 미스테리를 밝히는 것도 아니었고 나레이터와의 싸움에서 승리도 아니었다. 오직 스탠리로부터의 탈출이었던 것이다! 플레이어는 '스토리'에 대한 반항을 통해, '정상'을 거부하는것을 통해 낙타에서 사자로 승격된 것이다.


나레이터는 껍질만 남은 죽은 스탠리에게 계속 말을건다. 제발 선택을 해줘, 사실은 어느쪽으로 들어가도 스토리의 일부야, 제발 가만있지만 말아줘. 라며 애처롭게 사정한다. 개인과 사회간의 사도-마조히즘적 권력관계가 깨진것이다. 이제 여기에 더이상 나레이터와 상호작용하는 스탠리는 없다. 따라서 나레이터도 더이상 유지될수 없다. 게임이 언제나처럼 재시작 되지만 이번에는 플레이어에게 계속 게임을 할 욕구는 완전히 사라지고 없다. 게임에서 스탠리를 벗어났으니 이제 현실에서 스탠리를 벗어날 차례인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게임에서 이런 수준의 예술성을 보여준 작품은 한번도 보지 못했다. 이 게임의 모습 자체가 이미 주제의 구현이다. 스탠리 패러블은 최초로 사자가 된 게임이며 나머지 게임들은 낙타인것이다.


 물론 좀 아쉬운 면이 없는것은 아니다. 이왕 게임으로 만들거라면 더 게임적으로 한계를 몰아부쳤어야 했다. 더 많은 배리에이션이 준비됐어야 했고 진엔딩으로 가는길에서는 최소한 전화선 코드 뽑는것보다는 더 어렵고 창의성이 필요한 해답이었어야 했다. 그래야 플레이어는 더욱 농락당하는 기분이 들었을 것이고 수많은 반복을 통해 빠져나올수 없는 지옥같은 미로라는 느낌을 가지게 됐을 것이다. 이런식으로 더 감정을 쌓아올린뒤에 폭발시켰다면 메세지도 더 충격적이고 직관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인디게임의 한계라는 생각도 들지만 애초에 제작자들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어서 일부러 이렇게 한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어떻게 첫술에 배부를수 있겠는가. 첫술을 성공적으로 떴다는것만으로도 너무나 큰 일이다. 언젠가, 게임이 예술이 될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게임이 예술이 될수 없냐는 의문이 당연시될때가 온다면 모든게 여기에서 시작되었노라고 당당히 말하겠다. 게임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꿀만한 작품은 아니겠지만 그것을 가능하게한 열쇠를 준 작품이다. 미술로 치자면 뒤샹의 샘까지는 아니더라도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쯤은 되지 않겠는가. 게임이 어린아이나 덜떨어진 어른을 위한 유치한 장난감, 혹은 중독물질과 같은 사회악이라는 지배담론은 게임계 스스로가 만들어 온 것이다. 스탠리 패러블은 여기에 반기를 들고 게임의 새로운 미래에 대한 선언을 하고 있다. 게임계는 이 게임의 등장 앞에 고개숙여 반성해야 한다. 왜 게임을 하는가, 왜 게임을 만드는가, 왜 게임을 파는가, 왜 게임을 평하는가, 게임 관계자는 이 모든것에 대한 깊은 반성을 해야 한다. 당신은 이대로 계속 스탠리로 남을 것인가, 인간이 될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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