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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얘기 그 푸른 언덕

승리의아리e9e1b
2020-06-11 15:56:04 173 0 1


“쳇, 도대체 어디에 둔거야! 정말 사람 귀찮게 하기는...!”


불만이 가득 담긴 말들. 소년은 온 방안을 거친 손놀림으로 뒤져나갔다.

아무렇게나 물건들을 뒤집어 놓고 던진 듯 간혹 위험하게 부서진 물건들도 눈에 띈다.


회사에서 아직 퇴근을 안 하신 아빠를 대신해 학교가 끝난 후 입원한 동생을 돌본지 어느덧 3일째.

결국 이번에도 소년은 차가 잘 보이지 않도록 멀리 길을 돌아 집에 걸어서 도착했다. 소년의 작은 몸으로 족히 1시간은 걸리는 거리였지만 차는 탈 수 없었다. 이제는 횡단보도도 건너지 못하고, 언제나 먼 곳의 육교를 통해 길의 건너편으로 갈 정도였다.


그렇다 모든 것은 그 날 이후...


지나가는 차들의 위협하듯 내지르는 경적소리도.


새카만 아스팔트를 달려 엄습해오는 차가운 금속의 번들거림도.


...너무나 싫었다.


“아! 진짜!”


못 참겠다는 듯 갑작스레 소리를 지르며 소년은 들춰내던 종이더미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짜증이 났다. 또 생각이 나버린 것이다.

얼마 전에 있었던 악몽 같은 현실. 그로인한 자신의 괴로움.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의 멍청하게 웃는 얼굴을 생각하니 울컥 짜증이 난 것이다.

병원에서는 나름대로 잘 참았다고 생각한다. 스케치북을 집에서 가져다 달라고 팔에 매달려 떼를 쓰던 동생을 어르고 달래봤다.

...하지만 동생의 엄마를 찾는 작은 칭얼거림. 그 한마디로 자신도 모르게 팔에 힘이 들어갔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

동생은 침대의 난간에 힘없이 팽개쳐진다. 호리호리한 몸을 감싼 하얀 환자복이 그 가녀린 몸을 침대에 누인다.

...모든 순간이 정지한 것 같았다. 어디에 부딪쳤는지 동생의 얼굴에 선을 그으며 흐르는 피만이 붉게 시간의 경과를 인식한다.


왜였을까. 그 순간 가슴 언저리에 갑작스레 맺혀지는 따끔한 통증. 소년은 자신의 가슴께를 바라보지만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콩콩 거리며 뛰는 미약한 심장의 고동만이 느껴질 뿐.


...한참을 멍하니 서서 상처 난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고 있던 동생.

어눌한 목소리로 울먹이며, 무언가를 말하고자 다가오던 동생을 가두듯이 남겨놓고 새하얀 병실의 문은 퉁명스레 닫혔다.


왜인지 걸어오는 내내 동생 얼굴의 상처와 그 울먹이며 다가오던 모습이 소년의 눈앞에 지워지지 않았다. 괜히 자신에게 온갖 떼를 쓰며 엄마를 찾던 동생이 나쁜 거라고 소년은 생각해본다. 그러나 그럴수록 가슴 한쪽은 더욱더 아파왔다. 소년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왜 자신이 이렇게 힘들여 동생을 챙겨야 하는 것인지. 소년의 어린 마음만으로는 끝내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이유 없는 통증만이 소년의 발걸음을 집으로 향하게 할 뿐...


“후... 짜증나!”


한숨과 짜증이 섞인 소년의 목소리. 아직 앳된 그 목소리는 해질녘 어둠이 몸을 기대가는 방안을 침침하게 울린다.


“내가 왜 걔를 돌봐야하는 거냐고!“


하나하나 그 무질서의 속을 헤쳐 나갈수록 목소리는 점점 격해져만 간다.


“왜! 왜 그래야 되는데!!”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곧 거친 숨소리가 그 안을 비집고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두 팔이 뿌리쳐가는 길을 따라 ‘쨍그랑’ 구슬픈 비명으로 쓸려나가는 책상 위의 물건들. 부러진 칼날이 소년의 손등을 스치고 지나간다. 물감이 들은 튜브는 터져서 소년의 옷에 붉은 점을 흩뿌리지만 소년은 개의치 않고 모든 것을 내팽개친다.


“왜!”


동생이 즐겨 쓰던 크레파스와 색연필 그리고 물감들이 벽에 던져져 썩어가는 시체와 같이 그 몸을 굴린다.


“왜!”


문득 고개를 돌린 자리에 웃고 있는 동생의 얼굴. 역겨웠다. 아직도 이 방안에 남아있는 동생의 자취. 그 참을 수 없는 역겨움.

사진이 걸린 액자를 열어젖힌다. 동생의 웃는 얼굴을 할퀴듯이 잡아챈 팔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즐거워? 행복해? 너는 어떻게 웃을 수가 있지? 왜 웃는 거야! 왜!”

비명을 지르듯, 이 안에 들어찬 모든 것을 부정하는 울림으로 채워지는 차가운 방. 하지만 이내 소년의 몸에 겹쳐가는 떨림으로, 힘을 잃고 떨어지는 소년의 작은 팔. 숙여지는 고개 아래 맺혀가는 눈물...


말없이 번져가는 물기를 따라 소년의 눈이 향하는 곳에는 동생뿐이 아닌 아빠의 모습, 자신의 모습 그리고 이제는 없는 엄마의 모습. 가족의 모습이 담을 수 없는 과거의 슬픔으로 그곳에 있었다.


“왜... 내가 돌봐야 하는데... 왜... 아빠... 엄마...”


소년의 거친 숨소리가 수그러드는 자리. 이제는 숨길 수 없는 상처와 같은 흐느낌만이 그 자리를 눈물의 기억으로 채워간다.


********


나보다 3살 어린 11살의 여자아이. 하지만 정신은 아직 아기인 4살인 채, 그대로 웅크려 크지 못한 내 여동생.

동생이 저렇게 된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도 되는 듯 안타까운 마음이 언제나 있었을 것이다. 평소 바쁜 일로인해 챙겨주실 시간이 없는 아빠와는 달리 엄마는 항상 그림을 그리고 싶다며 떼를 쓰는 동생을 데리고, 마음껏 동생이 좋아하는 풍경을 그리도록 근처 뒷산의 언덕을 찾으셨다.


엄마가 돌아가신 4일 전 휴일. 우리 가족의 모든 것이 깨져나간 그 환한 아침. 휴일에도 일을 나가신 아빠. 유난히 그림을 그리러가자며 떼를 쓰던 동생. 서둘러 집을 나서며 그 뒷모습을 나의 다녀오시란 인사에 남기신 엄마... 엄마...


나만이 홀로 남겨진 휴일의 그 밝은 집안.


모든 것이 평화로운 일상 속의 휴일.


하지만 땅위에 길게 그림자를 이끌며 결국 해는 힘없이 져갔다.


일상을 외면하는 운명의 그늘과 같이, 전화벨 소리는 텅 빈 집안의 저녁을 울려왔다.


‘...아들? 아빠야. 밥은 먹었지? 응... 아빠도 먹었어...’


애써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던 아빠의 평소와 같은 온화한 목소리. 하지만 바늘을 삼키 듯, 힘겹게 마른 침을 넘기는 소리와 그 목을 태워가는 고통이 수화기 너머 목소리에 찔러들 듯 겹쳐간다.

‘저... 윤호야. 엄마랑 윤선이가 그림 그리러 뒷산에 가서 아직까지 안... 돌아왔지? 그래... 놀라지 말고... 잘 들으렴. 엄마랑 윤선이가...’


잠시 동안의 침묵. 정적 속에 고개를 들이미는 불안감. 언제까지고 이어질 것 같은 수화기 너머의 침묵은 나의 숨소리마저 지우고, 암흑의 옷자락을 늘어트리는 불안감 위로 점점 목을 죄어오던 순간...


‘...엄마랑 윤선이가... 길을 가다가... 교통사고로 조금... 다쳐서... 입원하게 됐단다... 엄마는... 잠깐 동안 집에 못 오실지도 모르겠구나.’


아... 영원의 침묵이 끊긴 순간. 잔인하게 흐르는 시간을 넘어, 심장을 토해내 듯 무겁게 전해지는 아빠의 한 마디 한 마디...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래도 의사선생님이 윤선이는 많이 다치지 않았다고 하네. 아들, 엄마가 잠시 동안 집에 없더라도 잘할 수 있지? 아빠가 너한테도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오늘은... 집에 못 들어올 것 같네... 미안하구나...’

-뚜, 뚜, 뚜, 뚜, 뚜


이제 먹먹한 가슴을 채우며 담담히 흘러만 가는 시간. 어두워져가는 집안에 다시금 스며드는 악몽 같은 고요함. 하지만 움직일 의지마저 꺾어가는 그 견딜 수 없는 악몽을 깨우듯, 떨리는 작은 손에 들린 수화기의 반복적인 기계음은 꿈이 아닌 현실의 아픔을 강요하고 있었고,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아빠로부터의 그 전화는 이렇게 일상으로부터의 안녕을 나에게 선고해주었다.


...결국 엄마는 그날을 넘기지 못하셨다.


모든 것은 동생 때문이다...


병원에서 우연히 듣게 된 아빠와 경찰의 대화.


모든 것은 동생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바람에 날린 그림을 잡으러 차도에 뛰어든 동생을 구하고 엄마가 대신 사고를 당하신 거라고 한다.


모든 것은 동생 때문이다...


그래, 모든 것은 동생 때문이다.


토하고 싶었다. 사고가 있던 다음 날. 평소와 같이 멍청한 웃는 얼굴로 병실의 침대에 누워, 아빠와 나에게 까진 상처를 보이며 칭얼대는 동생의 모습.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어눌한 말투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엄마를 찾는 동생의 모든 것이 더러웠다.


“왜... 엄마가... 왜...!”


엄마를 대신해 살아남은 동생의 모든 것이 소년에게는 생생한 상처였다. 아물지 않고 점점 곪아가는 괴로움이었다.


다시금 눈앞에 떠오르는 동생의 모습에, 생명이 사라진 듯 움직임 없던 소년의 손과 발은 그것이 존재의 이유인 것처럼 거칠게 방안의 물건들을 던지고 짓밟는다. 그럴수록 가슴 한 쪽이 더욱더 따끔거리지만 소년은 그것이 무엇인지 왜 이런 것인지 여전히 알 수 없다. 다만 이 아픔 또한 동생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더욱 거세게 방안의 흔적들을 부숴나갈 뿐이다.


“죽어! 너도 죽으란 말이야!”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의식하지 못하며, 미친 듯이 소리 지르고 발버둥 치는 소년의 손에 책장에 쌓인 물건들이 걸려 쏟아진다. 와르르 소리로 울며 바닥에 그 몸을 널브러뜨린다. 듣는 이 하나 없는 어스름한 집안에는 다시 고요함이 스민다.

난장판이 된 방안을 짓이기던 소년의 발치에 찢어진 천 조각처럼 나뒹굴고 있는 스케치북. 자신에게 가져다 달라던 동생의 스케치북이었다. 아무렇게나 펼쳐진 도화지들 위로 언제나처럼 그리던 근처 언덕의 풍경들이 얼핏 눈에 들어온다. 삐뚤빼뚤 제 멋대로 갈겨진 것처럼 채색된 그림들은 그 형태로나마 간신히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 하하...”


내던지듯, 그것에 망연한 시선을 보내던 소년의 일그러진 입가에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온다.


고작 이런 것이었다. 겨우 이런 것 때문에 엄마는 돌아가신 거다. 동생과 이런 하찮은 그림과 바꿔 우리의 모든 평화가 깨진 것이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그 때...


-...태워버려.


누군가의 침침한 목소리. 해가져 집안을 채워가는 어둠 저편에서, 문득 소년에게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태... 워...?”


그 말을 멍하니 되 뇌이며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소년의 눈앞에, 붉게 일렁이는 몸을 흔들며 한 그림자가 말을 걸었다.


-...설마 이렇게 동생의 물건을 부순다고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이런 너저분한 쓰레기들을 부수고 그림을 찢는다 해도 네 동생은 또 이렇게 그림을 그리려고 할 걸?


“.....”


낮고 음산한 그림자의 목소리. 거부할 수 없는 의지를 담고 점점 커져가던 목소리는 소년의 탁한 눈동자에 포효하듯 불타오른다.


-...그러니까 다시는 그리지 못하도록 태워 버리는 거야! 네 동생의 구질구질한 미술용품도! 이 너저분한 그림도! 이 그림속의 언덕마저도!


태워버린다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깨달은 것일까. 일순 소년의 말이 덜덜 떨린다.


“그, 그건 너무...”


하지만 그 나약한 두려움을 잘라내듯, 소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림자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집안을 울린다.


-크하하하하하!


못 참겠다는 듯, 한동안을 쿡쿡거리며 낮게 퍼지는 웃음소리가 소년의 귓가에 사라질 때 쯤. 그림자는 타이르듯 소년의 몸을 길게 감쌌다.


-너무 뭐? 너무 나쁜 짓이라고? 또 멍청한 동생에게 휘둘리며 살겠다고? 그럼 그렇게 꾸역꾸역 견디면서 살면 되는 거야... 흐흐흐... 누가 알겠어? 처음은 엄마... 다음은 아빠... 혹은 네가 될지...


잠시 말을 멈췄던 그림자는 소년의 목덜미에 차가운 숨결을 내뿜으며 말을 이어간다.


-...그런 건 너도 싫지? 멍청한 동생 때문에 다른 사람이 희생될 필요는 없잖아?


...그렇다. 동생 때문에 또 다시 누군가가 슬퍼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모두가 행복하기만 했으면 좋겠다. ...이미 눈물은 충분하니까.


-간단한 일이야! 그냥 태워버리면 돼... 아마 엄마도 좋아하실 거야... 모두가 행복해지는 일이야... 태워버려... 모두 불태워버리는 거야!


...그렇다. 엄마가 기뻐하신다면 그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안 생기게 된다면 뭐가 어떻게 되든 좋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눈물로 흐려진 소년의 눈동자에는 어느덧 이글거리는 그림자의 모습만이 낙인과 같이 새겨져간다.


-이걸로 모두 행복해지는 거야...


다시 행복을 약속하는 달콤한 속삭임. 소년의 작은 손은 망설임 없이 뻗어져 그 일렁이는 그림자를 집어 올린다.


한 손에 들어오는,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자그마한 플라스틱 라이터.


“그래... 모두 행복해지는 거야...”


부서진 잔해들 속에서 채 망가지지 않은 미술용품과 동생의 그림을 주워들며, 그림자의 말을 되뇌는 소년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번져간다.


삐걱삐걱 괴로운 소리로 문이 열린다. 이제 완연히 펼쳐진 밤의 장막에 묻혀가듯, 오로지 하나의 어두운 의지만이 소년의 여물지 않은 마음을 채워간다. 천천히. 걸음마를 떼듯 옮겨가던 소년의 발걸음은 이윽고 무언가에 떠밀리는 내달림으로 변해간다.

내내 따끔거리던 가슴도 왜인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더 이상은 어떤 소리도 소년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날 이후 너무나도 싫었던 차들의 경적소리도.


하늘을 옭아 맬 듯 빽빽이 얽힌 전선. 그 너머로 들려오는 새들의 구슬픈 울음소리도.


콩콩거리며 뛰는 소년의 작은 심장소리마저도...

********


...얼마나 달려온 것일까.


어느덧 소년의 다리는 가을의 냉랭한 기운을 머금은, 숲에 둘러싸인 야트막한 언덕 위에 멈춰 섰다. 칠흑을 도색한 듯 캄캄한 언덕. 그 건너에 도심의 불빛은 부는 바람에 흔들리듯 무심하게 피어있다.

한 곳만을 힘없이 바라보는 소년의 탁한 눈동자. 그리고 그에 새겨진 붉은 그림자는 소년의 귓가에 다시 나지막이 속삭이며 흔들린다.


-...태워버려 ...행복해지자


소년은 담담하게 주변에 흩어진 낙엽과 나뭇가지들을 그 작은 품에 한껏 주워 가을의 메마른 땅 위에 옮겨 모은다. 찰칵 소리와 함께 작은 라이터에서 불길이 일어난다. 바삭와삭 소리만으로 소년의 손길을 거부하던 낙엽과 나뭇가지들은 작은 라이터에서 타오르는 불길에 떨듯이 침묵한다.


-안 돼! 윤호야!


막 소년이 허리를 굽혀 낙엽과 나뭇가지에 불을 붙이려던 순간이었다. 미약하지만 어둠을 몰아내며 주변을 조그맣게 밝혀내는 빛. 안타까움과 슬픔이 섞인 외침. 소년의 움직임은 그 하얗고 부드러운 섬광에 고정되듯 멈춰 선다.


...어딘가에서 들었던 것 같은 그리운 목소리. 하지만 분명히 최근까지 느끼던 그 따스함이 소년에게는 이상하게도 먼 기억으로 다가온다.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불을 붙여!


그러나 그림자의 초조한 듯 날이 선 외침이 파고들자 곧 시야의 모든 빛들은 삼켜지듯 사라진다. 일순 멈췄던 불길의 움직임도 어둠이 생명을 불어넣은 듯 다시 일렁이며, 눈앞에 쌓인 낙엽더미에 그 붉은 손아귀를 점점 드리우던 그 때, 완전히 사그라졌다고 생각했던 빛이 다시 소년의 눈앞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윤호야! 이건 나쁜 짓이야!


눈물 섞인 애절한 외침. 주변을 뒤덮은 어둠 속에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듯, 그 빛은 외면할 수 없는 간절함을 담아 희미하게 소년을 비춘다. 그러나 그 간절함을 짓밟듯 그림자의 흉흉한 외침 또한 소년의 귓가에 소용돌이쳤다.


-뭘 꾸물대는 거야! 어서 불을 붙이라고! 불태우란 말이야!


무시무시한 바람이 그림자의 외침에 뒤섞여 폭풍처럼 소년을 채찍질 했지만, 다시 멈춘 소년의 손은 움직임이 없었다.


...그리웠다. 언제까지라도 이렇게 있고 싶을 정도로.


시리도록 스미는 밤이슬의 냉기마저 따뜻이 덮어주는 그리움에 소년은 이끌리듯 조금씩 걸어 빛을 마주한다.


이미 땅의 습기에 축축해진 스케치북위로 삐뚤빼뚤 아무렇게나 그려진 서툰 솜씨의 그림. 하지만 소년은 알 수 있었다.

멋없이 커다란 도화지에 울긋불긋 곱게 단풍들어 빽빽이 언덕을 둘러싼 가을의 나무들. 빨강 노랑 커다란 꽃들이 핀 파아란 언덕. 그리고 언덕 너머 색색으로 물든 무지개가 하늘에 걸린 아래로, 그 밝은 색채에 녹아들듯 한 결 같이 활짝 웃는 얼굴로 마주한 사람들의 모습.


짧게 잘린 머리카락. 네모난 뿔테 안경을 쓴 제일 커다란 사람의 그림. 언제나 말없이 우리 가족을 지켜주시던 그 든든한 모습을 소년은 더듬더듬 소리 내어 불러본다.

“아... 빠...”


...들려오기 시작했다.


소년 속, 마음의 그늘에 가려져 들을 수 없었던 소리들. 아니, 하지만 이제와 항상 소년의 주변에 있어왔던 소리들. 다시는 찾을 수 없을 것 같던 아련함을 몰아내고, 소년에게 지금으로 다가오는 소리들.


언덕 위로 나무들을 스쳐가는, 바람의 잔잔한 함성소리가 들려온다.

-빨리 이쪽으로 와! 어서!


다시 날카롭게 소년을 찌르는, 그림자의 외침마저 묻혀갈 정도로 이토록 부드럽게.


긴 검은 머리. 파란 원피스를 입고 커다란 미소로 도화지에 자리한 사람. 소년의 작은 손의 궤적은 다시 그 여자의 그림을 쓰다듬는다.


-바보! 멍청이! 넌 후회하게 될 거야!


불을 뿜어내듯 악을 써대는 그림자의 외침. 그러나 그 악몽 같은 울부짖음조차도, 포근한 밤에 기대어 우는 풀벌레들의 노래와 잠청하는 숲새들의 지저귐에 사사로운 꿈결과 같이 흩어진다.


“엄마...”


그리고 마침내 소년의 작은 입술이 그 그리움을 불렀을 때, 어느덧 소년의 눈을 가득 메웠던 낙인. 그 일그러진 그림자의 불길은 주변을 메운 하얀 빛에 에워져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이 몸부림치던, 붉은 그림자의 처절한 절규와 악에 바친 목소리는 아직도 소년에 대한 저주를 외치고 있었다.


-이놈...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너희들의 차가운 심장 속에 나는 영원할 테니까! 나는 언제고 너희들을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붉은 그림자의 고통에 겨운 신음소리가 밤하늘에 흩어져 감에, 그 어두운 의지에 이끌리던 소년 또한 쓰러지듯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눈앞은 어지럽고 식은땀이 등을 축축이 적셨다.

악몽을 꾼 기분...

어둠은 여전히 밤하늘을 덮고 있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칠흑을 몰아내는 하얀 빛 또한 지친 소년을 포근히 감싸안아주고 있었음에...


********


........................잠이 들었던 것일까. 시끄럽게 울리는 진동음에 소년의 무거운 눈꺼풀은 아직 꿈결을 쫒듯 간신히 열린다.


...그리고 여전한 현실로 깨어진다.


주머니를 더듬어 찾은 핸드폰에는 아빠로부터 수 십 통의 부재중 전화와 문자 하나가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호야 지금 어디니. 퇴근하고 와보니 윤선이가 병실에 없구나. 벌써 한 시간 째 찾고 있는데 너도 병원으로 오거라.’


“하하... 하하하...”


말라버린 강의 바닥처럼 메마른 소년의 웃음소리가 어둑한 언덕 위에 울린다.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결국은 그런 것이다. 다만 있는 것은 그 모든 것을 빼앗아간 내 동생이라는 현실의 절망뿐이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동생은 그런 식이겠지. 항상 우리를 귀찮게 하고 슬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만들겠지. 너는 이렇게 또다시...


한참을 웃던 소년은 돌연 비틀거리는 걸음을 뗀다. 퀭한 눈빛. 납처럼 무거워져가는 몸을 이끌어 다시 스케치북을 느릿느릿 집어 든다.

터덜터덜 끈이 풀린 인형과 같이 땅에 스케치북을 질질 끌며 소년은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간다.


어디로 가는 것인가.


소년 자신도 몰랐다.


아마 나는 아빠가 시키는 대로 병원으로 가는 것이겠지...


가서 무엇을 할 것인가.


소년 자신도 몰랐다.


아마 나는 그것이 마치 의무인양 한껏 동생을 찾아보는 척이라도 해야만 하겠지...


동생을 찾아서 무엇을 할 것인가.


..........

********

...문득 밤의 적막을 깨는 소름끼치는 소리들. 육중한 쇠뭉치의 차체가 빠르게 공기를 갈라가는 굉음이 들려온다. 어느새 한참을 걸어온 듯 병원으로 이어진 도로의 건널목 앞이었다.


“저, 저런!”


“얘! 가만히 있어! 움직이지 말고!”


“아휴 저거 어째! 말을 못 알아듣나봐!”


“누가 좀 데리고 와 봐요!”


축축하게 밤이슬이 내리는 거리에 웅성웅성 왠지 소란스러운 사람들. 하나같이 못 볼 것을 보는 듯, 눈을 찡그린 사람들에게서 안타까운 소리들이 신음처럼 새어나온다. 거기에...


...거짓말처럼 동생은 그곳에 서있었다.


횡단보도와는 꽤 떨어진 기다란 4차선 도로의 중간.

언제나 그렇듯이 아무것도 모르는 멍한 얼굴. 위태하게 서있는 하얀 환자복이 차들이 일으키는 바람에 휘날린다.


문득, 지나가는 차들 사이로 그 멍하게 웃는 얼굴이 소년을 향한다. 사방을 거칠게 달리는 죽음의 기계들을 아랑곳 않고, 고정된 시선은 서서히 소년에게 가까워온다.

어두운 밤하늘조차 환하게 밝혀가는 소녀의 해맑은 미소. 그 다시없을 것처럼 반가워하는 동생의 얼굴. 동생은 차들이 달리는 밤의 도로를 가로질러 소년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곳곳에서 터지는 사람들의 비명에 섞여 으슬으슬 몸을 얼리는 한기가 소년의 몸을 할퀴며 올라왔다.


저대로는 차에 치일게 분명하다. 막아야한다. 왠지 모르게 지금 소년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어서 달려가야...!


...움직이지 않았다.


발을 지면에 붙인 듯 소년의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한이 등줄기를 달린다. 손바닥은 이미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또다시 시작됐다. 그 날 이후로 생긴 차에 대한 공포감은 이 순간까지 소년의 숨통을 조여오고 있었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위협하듯 내지르는 소년의 커다란 목소리.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초조함과는 달리 소년의 두 다리는 여전히 땅에 못 박혀 떨리고만 있었다.


“오빠-”


...그리고 한 마디. 동생의 평소와 같은 그 어눌한 한 마디를 찢어놓는 마찰음. 쿵하는 둔중한 소리가 차가운 도로 위를 울린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만 어두운 하늘 아래 흘러가는 불빛들을 가로지른다. 사람들의 참담한 비명소리에 이끌리듯 소년의 몸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쓰러질 듯 걸어갔다.

이제와처럼 항상 소년을 공포로 몰아넣던 차들의 서늘한 굉음도 숨죽인 듯 소년에겐 들리지 않는다. 언제나 소년을 주시하던 차들의 번쩍이는 불빛도 보이지 않았다. 느껴지는 것은 오직 한 손에 쥐어진 스케치북의 무게. 보이는 것은 하나. 싸늘한 도로 위에 널브러진 동생의 가느다란 몸. 가냘픈 하얀 환자복. 그 순간 소년에겐 바닥을 질질 끄는 얇은 스케치북이 너무나도 힘겨웠다.


가로등의 불빛이 내리는 공허한 어둠을 걸어, 소년의 작은 몸은 붉게 번지는 하얀 환자복 앞에 서서 흔들린다.


“왜... 왜 나온 거야! 이 바보야! 왜 날 못살게 구는 거야! 왜!”


숨결에 섞인 떨림이 가라앉지 않는다. 치밀어 오르는 모든 것을 내뿜어야만 한다. 여기서 전부 토해내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


그러나 소녀는 말없이 그런 소년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날 그렇게 괴롭히고 싶어! 응! 넌 왜 태어났어! 왜! 차라리 잘 됐어. 우릴 이렇게 괴롭히느니 그냥 이렇게 내 눈 앞에서 사라져버려!”


끝없이 동생을 매도하는 말 한마디 한 마디.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스며가는 물기에는 동생의 흐려져 가는 시야가 핏물처럼 섞인다. 그 때...


“선... 물...”


“뭐...?”


되묻는 소년의 말에 소녀의 너무나도 가녀린 팔. 이제 생기마저 조금씩 사라져가는 그 팔이 가리키는 것은 소년이 들고 있는 스케치북이었다.


“오빠... 생일... 선... 물...”


그 한 마디만을 힘겹게 몰아쉬고, 소녀의 커다란 눈은 조용히 내린다.


선물이라는 동생의 말...

그 때서야 소년은 깨닫게 되었다.

그림을 자신에게 선물하기 위해. 그리고 그것을 전해주기 위한 설렘으로, 동생은 그렇게 쓸쓸히 흔들리는 도로의 가로등 아래에서 자신을 기다렸던 것이다.

언제까지고 자신을 기다리던 동생의 마음. 그 기다림이라는 사랑의 마음.

소년은 이미 알고 있었다.

동생 때문에 엄마가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동생의 얼굴에 새겨진 그리 오래지 않은 상처자국. 동생을 향한 심한 말들과 차디찼던 행동들. 갈 곳을 잃은 자신의 잔인함이 향했던 것이라는 것을...

그것이 동생의 여린 몸과 마음이었다는 사실에, 그 견딜 수 없는 아픔을 깨달았을 때 소년은 동생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나...


도로를 메우던 사람들의 비명소리도.


붉게 빛바래 쓸쓸히 바람에 흔들리는 동생의 하얀 환자복도.


모두 가을의 시린 밤하늘 아래에 지워져간다...


********


꿈을 꾸었다.

바람 소리가 푸른 언덕 위로 펼쳐진 하늘에 섞이는 꿈.

싱그러운 풀과 꽃에 둘러싸인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가족과 함께 둘러 앉아 있는 꿈.

왜인지 벅찬 행복으로만 채워지는 그런 옛날의 꿈...

소년은 엄마의 품에 안긴 아기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첫눈과 같은 하얀... 그 순수에 이끌리듯 소년은 아기에게 손을 내밀었다.

눈도 잘 뜨지 못하는 아기의 작은 손이 그렇게 머뭇머뭇 다가온 소년의 손을 감싼다.

소복한 눈과 같은 부드러움. 그와 같이, 금방이라도 사그라질 듯한 미약함. 그러나 소년은 곧 주저했던 처음과 달리 가만히 아기와 마주했다.

작고 작은 하지만 마음마저 가득히 채우는 온기.

이어진 둘의 손으로 전해지는... 포근한 햇살처럼 웃음 짓는 그 온기.

그 여린 손길 안에 깃든 생명. 그리고 미소...

아... 온 세상을 가득이 채우고도 남음이 있을 그 미소.


하지만... 어째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것일까...

그렇다... 소년에게는 이제 아무런 말도 필요 없었다. 오로지 자신을 향한 온기를 꼭 쥐는 것으로 그 환한 미소에 약속할 뿐이었다.


항상 너의 곁에 있는 행복이 되어주겠다고.

언제나... 언제나, 네가 그리던 그 푸른 언덕이 되어 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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