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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 열쇠

Moderator 유리는매일내일
2019-09-29 14:42:38 188 1 0

1


살아있는 구멍들을 계속 열고 들어서다 보니

나의 언니의 관이 햇빛을 받으며 안치되어 있었다

햇빛을 받은 열쇠를 돌려 언니의 마음을 꺼내고 싶었다

하지만 언니는 아무 말도 전해주지 않았다


열쇠는 햇빛을 받아 달아오르며 내 손을 아프게 했다

하지만 난 내 마지막 놀이의 문을 한동안 열지 못 했다

언니의 관에 귀를 언제나처럼 맞대어본 뒤에야

언제나처럼 내가 가져왔던 무언가를 두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햇빛을 언니와 함께 맞았던 화분의 흙을 한 움큼 쥐어

언니의 관 위에 열쇠를 올려두고 그 위로 그 흙을 쌓았다

흙의 모양은 관의 모양을 똑 닮게 만들며

흙을 열고 언니의 목소리를 자라나게 되리라 믿었다


2



문을 열 때면 항상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곳

상자를 열 때면 항상 내가 들여다 볼 수 있는 곳

일기장을 열 때면 항상 내가 들어보았던 것

열쇠는 모든 걸 들어갈 수 있게 했다


어디서 주운 열쇠도 좋고 선물받은 열쇠도 좋고

닳아서 이를 모두 잃어버린 열쇠도 좋고

다만 손잡이를 잃어버린 열쇠는 꽂는 즉시 구멍 속에서

꿈틀거리지도 못 하고 죽어가기 때문에 싫어했다


물론 그 구멍도 같이 죽었고.

나의 언니는 죽어버린 구멍을 살리려고 애쓴 유일한 사람이었다

언젠가 구멍이 하나 살아났을 땐

열쇠 구멍만을 꺼내어 그 구원을 기리는 걸 선물받았다


3


선물받았던 열쇠 구멍을 오늘따라 열심히 손가락으로 휘저었다. 물론 철컥거리는 소리는 전혀 없었다. 그 열쇠 구멍이 원래 있던 상자가 항상 곁에 있다. 

상자 안에는 아무 것도 없지만.

열쇠 구멍도 원래의 수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소한 억울함이 재빨리 자라났다. 하지만 손잡이가 없는 열쇠를 찾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수색 끝에 지쳐서 잔 낮잠 속에서 그렇게 난 어떤 관엽식물을 보았다. 관엽식물은 수많은 종류들의 열쇠를 열매로 달고 열매 하나하나에 아리아를 들려주며 햇빛을 앗아갔다. 마지막으로 내가 흙에 묻었던 열쇠의 아리아가 나무 스스로의 햇빛을 앗아갔을 때 꿈에서 깨면


비가 내리고 있다.

이제 햇빛이 들이차던 곳에는 빗물이 들이찰 것이다

아리아의 소리는 언니의 목소리가 아니었는데,

이제 언니마저도 내 유년기의 놀이를 져버릴 수밖에 없더라.


==========

놀이를 생각하면서 썼는데 어쩌다 보니 생각나는대로 쓴 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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