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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MISSING: Day 2, Missing

천건_
2019-11-29 18:23:48 141 1 0

- Missing -

눈을 떴다.

저절로 떴다기보다는 누군가의 고문으로 인하여 억지로 깨어났다는 게 더 정확하겠지만. 나를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악독한 방법으로 고문한 그 망할 여자분ㅡ여자라고는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으니까, 설명은 필요 없지?ㅡ께서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통으로 인하여 잔뜩 찌그러진 표정을 얼굴에 가득 담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이십니까, 이거? 잘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던데, 너는 개보다도 못한 인간이신 거냐?

“그런 속담, 없어.”

“시끄럽다, 여자. 인간의 존엄성을 버린 네녀석 따위에게 태클은 받고 싶지 않아. 그런데 도대체 뭔 바람이 불어서 니가 날 깨운 거냐?”

“밥 줘.”

시끄러워, 니 스스로 아침밥 해먹어, 라고 말하려한 바로 그 순간 이 녀석은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요리하는 팝콘조차도 태워먹는, 요리와는 엄청난 거리가 있는 여자라는 사실을 다시금 기억해 버렸다. 귀찮아 죽겠지만 만약ㅡ이라기보다는 100% 확실한 거지만ㅡ 채린 녀석이 이 밥을 태우시게 된다면 소중하고도 귀중한 식량 하나가 운명합니다. 낭비되는 거란 말씀. 안 그래도 식량이 한정돼 있는 이때 쓸데없이 낭비해 버리면 절대로 안 된다고 온몸이 외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직접 데워주려고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걸어갔다.

나도 배가 고픈지라 햇반 두 개를 같이 전자레인지에 넣은 후 데우기를 시작한 다음 햇반이 데워지는 동안 계란프라이를 두 개 만들기 시작했다. 아침은 내가 매일 해먹는지라 이런 간단한 음식을 만드는 데에는 이골이 나 있다.

채린은 능숙하게 계란을 뒤집는 나를 놀랍다는 눈빛과 표정으로 계속 응시했다. 평상시에는 얼굴에 감정이라고는 눈을 흐르는 물에 세척하고 찾아봐도 못 찾겠는 녀석의 얼굴에 놀라움이 드러났다는 건 진ㅡ짜로 놀랐다는 뜻이다.

신이시여, 요리라는 게 그리도 어려운 겁니까, 아니면 단순히 진채린이라는 존재에게 저주를 내리신 겁니까?

“……신기하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채린.

나는 한숨을 내쉬며 피날레로 한 번 더 뒤집어준 다음, 계란프라이를 접시에 옮겨 담았다. 마악 두 번째 계란프라이를 올렸을 때쯤 햇반이 다 데워졌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경쾌ㅡ하긴 개뿔이ㅡ한 ‘삐익’ 소리가 울려 퍼졌다. 채린에게 햇반을 식탁에 놓으라고 한 후에 나는 한 손에는 숟가락 두 개와 젓가락 두 쌍, 다른 한 손에는 계란프라이가 담긴 접시를 들고 식탁으로 갔다.

아침은 맛있게 먹었습니다.

-*-

싹싹 비워진 햇반 통을 쓰레기통에 버린 나는 다시 한 번 사람, 아니 생명체를 찾아보기 위하여 외출했다. 채린은 집에 있겠다고 했다. 어제 가게에서 획득한 캔 콜라를 천천히 음미하며 내가 제일 처음 가기로 마음먹은 곳은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인 ‘교동 고등학교’. 단순히 학교가 동쪽에 있다고 해서 그 이름을 가지게 된, 이상한 이름의 학교다. 이름을 지은 녀석의 바보 같은 네이밍 센스를 비웃어 주며 나는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토요일 아침의 학교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한데다가 생기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을 정도로 황량하다. 이 시간대면 늘 구석에 숨어서 담배피고 있을 불량한 녀석들의 담배연기조차도 오늘은 안 보이는데다가 학교 정문이라는 신성한 장소를 매일같이 지키시는 경비아저씨조차도 오늘은 없습니다. 설마, 오늘은 놀토?

“……였다면 정말 좋겠는데 말이지…….”

오늘이 평일이라는 사실을 뼛속에서부터 자각하고 있었으므로 방금 한 생각은 아무리 좋게 보려고 노력해봤자 ‘삽질’ 그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제 무덤을 제가 판다, 라는 속담은 이럴 때 쓰는 게 옳은 걸까? 왠지 좋은 거 하나를 배운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 감미로운 기분을 풀로 만끽하기 위해 마치 커피를 홀짝이는 지식인처럼 콜라를 한 모금 마시려고 했는데…….

“……다 마셔버렸다…….”

분위기가 다 깨져버렸다.

한숨을 내쉬며 다 마셔버린 콜라 캔을 운동장 한가운데를 향해서 시원하게 던져버린 나는 두 번째 캔 콜라를 주머니에서 꺼내서 땄다. 아까 걸을 때 많이 흔들려서 그런지 거품이 쉬익 올라오는 걸 모조리 다 마셔버린 후, 다시 느긋이 카페인이 들은 건강에 좋지 않고 또한 중독성이 쓸데없이 강한 검은색 탄산액체를 음미하며 이번에는 내가 애용하는 게임점으로 가보기로 했다.

가는 길에 다시 한 번 콜라를 홀짝이며 지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려고 했지만 대실패였습니다.

잠시 좌절감을 느끼며 게임점에 도착하니 불은 켜져 있었다. 아침인데도 켜져 있다니, 설마 밤새워서 켜놓은 겁니까? 계속 이렇게 조명을 풀로 켜놓고 다니시면 적자를 면치 못하실 텐데, 라지만 전기회사 직원들도 사장도 게임 가게 주인도 죄다 소멸했으니 전기비는 패스…… 랄까, 방금 한 생각은 어제 했던 쓸데없는 생각의 레퍼토리라 항상 어제보다 나은 오늘을 목표하는 나로서는 불만족스러운 조크다. 앞으로 이런 생각은 하지 말아야겠다.

예전부터 맘에 들었으나 돈이 없어서 지르지 못한 게임 타이틀을 몇 개 집은 다음 카운터를 항해서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상점에서 걸어 나갔다.

“그나저나, 아무도 없으니까 너무 황량하다…….”

확실히 너무 조용하다 못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수준이다. 매일같이 우리 동네를 가득 채우던 시끄럽고 짜증나는 새소리도 들리지 않고, 바람이 나무를 스쳐 지나갈 때 나는 소리 역시 들리지 않는다. 평상시에는 시끄럽다고 짜증냈었지만 막상 사라지고 나니 뭔가 아쉽기도 한 것 같다. 내 귀가 감지할 수 있는 소리는 내 발걸음 소리와 숨소리, 그리고 가끔씩 들리는 ‘꿀꺽’이라는, 콜라를 삼키는 소리뿐. 이상하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뭔가 불안한 느낌과 그에게서 파생되는 떨리는 느낌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바람 또한 전혀 불지 않고 있다.

이건 무대를 홀로 걸어가고 있는 주인공 역할의 배우의 심정과도 같을 거야, 라고 망상하며 나는 다 마신 캔을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땅바닥에 던져버렸다. 아마 이 세계가 환경오염으로 고통스러워한다면 그 주범은 아마도 나리라.

그 밖에도 공원, 서점, 어제 집으로 올 때 걸어왔던 길, 도서관, 백화점 등등 사람들이 있을 만한 곳들을 갔다 왔으나 역시 텅 비어있었다.

길을 거닐고 있던 생명체라고는, 나뿐이었습니다.

-*-

집에 돌아오자 채린은 삼각김밥을 입에 물고 있는 채로 소파에 멍하니ㅡ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ㅡ 앉아 있었다. 그녀 옆에는 과자를 포함한 각종 음식물의 잔재, 즉 쓰레기가 수북.

설마, 아무 것도 안 하고 내가 나갈 때부터 지금까지 쭈욱 먹고만 있었냐?

“TV, 안 나오니까.”

“아, 그러냐?”

하긴, 그러고 보니 TV 스태프들도 죄다 사람이니까, TV가 안 나오는 건 당연한 이치다. 그래도 일단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려고 리모컨으로 TV를 켜니 나오는 건 ‘치이익’이라는 소리와 회색의 바탕화면 뿐. 진짜군. 그러고 보니 오늘 11시 반에 NBA 경기 있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못 보잖아. 쳇.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필라델피아 76ers의 경기가 있는데 말이야……. 참으로 불우하군.

뼛속까지 스며드는 불행함과 좌절감을 잊기 위해서 어제 노획했던 소보로빵을 까서 한 입 베어 먹자 콜라와는 또 다른 달콤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 는데, 어째서인지 빵 부분이 굉장히 눅눅하니 맛이 없다. 뭐야, 이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통기한을 확인해 보니 사흘 전의 날짜가 당당하게 프린트되어 있습니다.

“…….”

나는 예전에 인터넷에서 유행했던 사진에 박혀 있는, ‘형이다’라면서 나댔던 사람과도 같은 표정으로 말없이 그 소보로빵을 쓰레기통에 던져서 골인시켰다. 감히 유통기한이 이틀이나 지났던 빵을 아직도 진열해 놓았다니, 양심에 털이 박힌 편의점이군. 알바 누님이 예뻐서 자주 갔었는데 앞으로는 절대로 갈 일이 없을 것 같다.

좌절감과 불행함에 이번에는 절망감까지 플러스되어서 구겨질 대로 구겨진 기분을 어떻게든 풀기 위하여 저 구석에 있는 음식무더기에 손을 뻗어 대충 잡은 음식인 감자 칩을 마치 철천지원수와 외나무다리에서 조우한 것만 같은 분위기로 씹어 먹고 있었는데l, 채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성,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는 새나 벌레도 없더군. 식물과 우리를 제외한 모든 생명체는 사라진 것 같은데?”s

“그래, 그렇구나.”

별 감흥 없다는, 그냥 지나가는 말투로 말하는 채린. 저렇게 말할 때면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정말 무섭다. 소름끼친다고 할까. 녀석이 저렇게 아리따운데도 친구가 없는 이유는 아마도 녀석의 저런 모습 때문일 거다.

이렇게 담담해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 나는 지금이라도 콱 죽어버리고 싶다. 어제 자기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했는데, 이렇게 막상 혼자 있다는 걸 피부로 느껴버리니 자신감이 없어진다. 예전에 했던 ‘혼자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아무도 간섭을 안 할 테니까 말야’라는 생각 따위는 반나절 만에 사라진지 오래.

귀가 얇은 남자라고 욕해도 상관없습니다. 실제로 겪어보면 다ㅡ 나처럼 생각할 겁니다.

‘저 녀석만 빼고.’

채린이 녀석은 이 상황에서 절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이 상황을 꽤나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녀석과 꽤 오래 지낸 나는 다른 사람 같으면 도저히 읽어내지 못할 채린의 미세한 표정변화를 읽어낼 수 있었고, 그것 때문에 녀석이 더욱 더 무서워졌다.

분명히 기뻐하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

“성, 가자.”

“어딜 가시게?”

“산책. 이 아무도 없는 바깥세상을 만끽하고 싶어.”

점심으로 떡볶이ㅡ내가 만들었다ㅡ를 맛나게 먹고 설거지를 끝낸 나에게 채린이 한 뜬금없는 말이다. 난 아까 바깥에 갔다 왔는데, 또 가자는 거냐?

“응.”

“……안 간다고 하면?”

“가라앉힌다.”

어, 어디로?

어쨌든 방금 점심을 먹었으니 소화도 시킬 겸해서 따라 나가기로 했다. 식후 운동은 건강에도 매우 좋다는 과학적 근거가 있으니까. ‘가라앉힌다’라는 협박이 무서워서 그런 건 절대로 아니다. 아, 진짜로 아니라니까?

그런데 난 지금 누구를 설득시키려고 하는 중이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요리를 못하면 최소한 설거지는 할 줄 알란 말입니다, 아가씨. 자기가 한다고 나선 주제에 설거지를 시작하자마자 그릇을 닦다 그걸 놓쳐서 싱크대 안으로 떨어뜨려서 한꺼번에 두 개나 깨먹는 건 도대체 무슨 조화냐? 게다가 왜 세제는 넣지도 않고 닦으려고 하시는 건데? 아무래도 이 기회에 집안일을 조금, 아니 많이 가르쳐야겠다. 얼굴만 반반해서는 좋은 색시가 될 수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니까, 스파르타식으로 열심히 가르쳐야지.

물론 이것은 이곳에 계속 단둘이 있어야 하는 경우 집안일을 모두 녀석에게 시켜먹어서 나 혼자 편하자고……. 이게 아니지. 이것은 채린의 둘도 없는 친구ㅡ친구라고는 나 하나뿐이니까ㅡ로서 그녀의 살림 수준을 한층 더 높여줌과 동시에 그녀의 매력 또한 몇 배로 증가시키고자 하는 순수한 호의에서 하는 거다. 아, 진짜라니까?

어쨌든, 이 원대한 계획은 조금 나중에 실행하기로 결정한 나는 아까 나갈 때 입었던 외투를 다시 걸친 다음 먼저 밖에 나간 채린에게로 갔다. 사람이 없다고는 하지만 문을 열고 가기에는 뭔가 께름칙한 마음이 들어서 문은 열쇠로 잠갔다.

-*-

“날씨, 좋다.”

“좋긴 뭘 좋냐. 더워 죽겠구만.”

이라고 괜스레 찌질대긴 했지만 확실히 좋기는 좋은 날씨였다. 구름이 군데군데 보이는 푸른 하늘의 봄 하늘에 창창한 햇살. 그리고 어디선가 나는 꽃내음. 꽃샘추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는 아주 따뜻한, 그런 멋진 날씨. 아까는 눈치 채지 못했던 건데, 희한하게도 바람은 불지 않았다. 600mL짜리 콜라를 꿀꺽꿀꺽 마시며 채린과 둘이 나란히 걸으며 확실히 없어지면 보고 싶어진다더니, 평소에는 그렇게도 시끄럽게만 들렸던 새소리가 지금은 차라리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쓸데없고 사소한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갑자기 녀석이 내 어깨를 툭 쳤다.

“……용건이 뭐냐, 여자.”

“저 쪽으로 가자.”

채린이 가리키는 쪽을 보니 어제의 그 도서관에 가는 길이다. 들어갈 때만 해도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던, 그러나 나왔을 때는 텅 비어 있었던 이 세상. 아마 그곳, 도서관에 우리를 제외한 전 인류가 사라진 이유에 대한 정답의 실마리가 있으리라, 라고 생각하며 나는 채린의 높은 통찰력에 마음속으로만 찬사를 보냈다. 나는 보기보단 부끄럼이 많은 Boy라서 남을 대놓고 칭찬하는 말은 잘 못하겠거든.

어쨌든, 도서관에 가면 실마리는 분명 있을 거다. 가자.

-*-

……있기는 개뿔이. 실마리 따위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그냥 어제와 똑같은 도서관입니다. 기대했던 난 바보?

“……채린이 저 쉐이…….”

증오가 담뿍 담긴 시선으로 채린을 응시하니 가볍게 무시해 준다. 제길, 꼭 복수하고 말 테다, 진채린……!

녀석은 다름이 아니라 순전히 시간을 죽일 만한 책을 가져오려고 도서관에 찾아온 거였다. 2층에 올라가자마자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책을 고르는가 했더니 어느새 두 손에는 책이 가득. 게다가 죄다 두께가 4cm 내지 5cm은 될 정도로 두꺼운 책이다. 음메, 기죽어. 어째서인지 녀석이 날 여기까지 끌고 온 이유는 짐꾼으로 쓰기 위해서라는 안 좋은 예감이 든다.

그 예감을 애써 떨쳐버린 나는 과연 채린이 녀석은 어떤 종류의 책을 좋아하는지 궁금해져서 녀석이 들고 있던 북타워ㅡ높이 쌓인 책들을 표현할 때 쓰는 나만의 단어입니다ㅡ 중에서 제일 위에 놓인 책을 집어 들었다.

제목을 읽어보니…….

“ ‘일반 상대성 이론과 특수 상대성 이론이 실제의 지구에 끼치는 영향과 그에 대한 과학적인 증명’?”

쓸데없이 이름만 길고 굉장히 지루해 보이는 책이다. 이런 지루한 책을 쓴 작자는 도대체 어떤 인생을 살아온 사람일까, 라고 생각하며 작가의 이력서를 보니 금방이라도 빛이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MIT를 15살에 수석 입학해 3년 만에 졸업한 것도 모자라 20살에 박사학위를 따셨단다. 너, 정말 이런 천재가 쓴 논문을 읽으실 생각?

“이런 책이 의외로 재밌는 법이야.”

“……아, 그러슈?”

“응.”

내 빈정대는 뉘앙스에도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았는지 트레이드마크인 무표정을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이시는 채린 양. 이런 쓰잘데기 없는 것에서까지 의외성을 발견하다니, 역시 우리 학교 전교 1등의 타이틀은 동네 꼬마들이랑 딱지치기해서 딴 게 아니라 이 말씀이신가.

나는 녀석의 지고무상한 지적 수준에ㅡ그런데 이렇게 머리가 좋은 녀석이 왜 단순한 가사노동에는 영 소질 제로이신 거지?ㅡ 경악과 감탄을 금치 못하며 다시 그 책을 채린에게 돌려주고는 판타지/무협 섹션에 가서 예전부터 아는 녀석이 강력 추천하던 판타지소설 몇 권을 집어 들었다. 별로 재미가 있다거나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문자를 눈으로 쫓는 건 그다지 싫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나마 흥미가 있을 것 같은 책인 판타지소설 낙찰.

두께가 2cm이 채 안돼 보이는 그 책들을 들고 내려가려는데,

“성.”

가느다랗고 고운 여성의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느낌이 좋지 않다.

“응? 왜 부르시는지요?”

“무거워, 들어줘.”

“…….”

이럴 줄 알았다, 젠장…….

-*-

“팔……. 내 팔…….”

두께 4.5cm인 책 X 10 + 두께 2cm의 책 X 7 = 굉장히 무겁다, 라는 공식이 내 마음속에서 성립되는 순간이었다. 봉지에 담긴 했으나 그걸 들고 오기보다는 끌고 왔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정도니 오죽하겠나. 팔이 떨어질 것만 같다. 이런 상태로는 아까 책을 끌고 오면서 이름붙인 ‘진채린 각성시키기’ 계획 실행은 무리다, 무리. 뻐근한 팔을 마사지하면서 시계를 흘끗 보니 한 일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벌써 4시가 다 되었다.

저녁을 먹기로 채린과 약속한 시간인 8시까지 나는 약 4시간 동안 독서나 게임, ‘진채린 각성시키기’ 계획을 세분화시키기, 혹은 멍하니 있기 등 이것저것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 다음, 저녁을 먹었다. 메뉴로는 삼각김밥, 과자, 빵, 라면, 짜O게티, 그리고 햇반 등이 있었고, 나는 삼각김밥과 라면으로, 채린은 빵과 과자로 배를 채웠다.

빵을 먹는 채린을 보면서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렴’이라는 대사가 어렴풋이 떠오르는 건, 내가 이상한 거겠지?

이렇게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을 먹고 바로 자면 살이 찌겠지만, 그다지 할 일도 없잖아. 게임이나 조금 하다가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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