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

자유게시판 MISSING: Day 1, Nocturne

천건_
2019-11-29 17:43:55 139 1 0

- Nocturne -

공부를 끝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보통 우리 동네에서의 금요일 밤 오후 10시라는 시간대는 어딜 가나 사람이 득시글거리고 있을 시간대지만 지금의 거리는 텅 비어있었다. 하지만 가게들은 모두 불이 켜져 있었고, 혹시나 해서 만져본 벤치에는 온기가 남아 있었으며, 거리에 서 있는 자동차들은 마치 파란불을 기다리는 듯이 시동이 켜진 채 차도에 정지되어 있었던 데다가, 몇몇 개념 없는 차에서는 일부러 크게 키운 음악이 여전히 쾅쾅 울려 퍼지고 있었다.

마치 방금 전까지도 사람이 있었다는 듯이.

현재 극도의 패닉 상태에 빠져버린 나는 과연 이 녀석은 이 일에 어떻게 반응할까, 라는, 조금은 쓸데없는 궁금증을 가지고 내 옆을 걸어가고 있는 내 친구를ㅡ여자친구는 아니고ㅡ흘끗 쳐다보았다. 하지만 녀석, '진채린'은 당황하지도 않았는지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인형얼굴'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녀의 무덤덤함에 살짝 몸을 떨면서 나는 애써 이 무서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 농담조로 말을 해 보았다.

“아마 사람들이 전부 다 숨어 있는 게 아닐까? '제 5회 전국 숨바꼭질 대회'라도 열린 걸 거야. 술래는 우리 둘.”

“…….”

무반응. 재미없다는 뜻이다. 역시 패닉 상태에서 말했으니 재미가 없겠지. 나는 좌절감이라는 익숙한 감정을 맛보며 고개를 푸욱 숙였다. 방금 그 충격으로 인하여 내 입은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고, 채린 녀석은 내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말을 절대로 하지 않는 녀석이라서 우리는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까지 아무 말 없이 계속 걸었다. 도서관에서 아파트까지의 그 15분 동안의 도보 사이에서 나는 사람을 포함한 그 어떠한 생명체도 보지 못했다. 물론 채린이는 제외하고.

과연 어디에 있는 걸까, 사람들은?

그 의문을 마음속에 품은 채 불이 켜져 있는 아파트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섰고, 내가 위를 향하고 있는 화살표가 그려진 버튼을 반신반의하며 눌러 보자 다행히도 엘리베이터는 작동했다. 집이 10층인데 거기까지 계단으로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채린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문명이라는 건 정말 좋은 거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녀석은 11층, 나는 10층에 사는 고로 먼저 내린 것은 나. 1004라고 적혀 있는 문 앞에 선 나는 초인종을 검지로 꾸욱 눌렀다.

‘띵동ㅡ. 띵동ㅡ.’

귀에 거슬리는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하다못해 만날 ‘이 늦은 시간에 웬 썩을 놈이 시끄럽게 초인종을 울려대고 지랄이냐’라고 외쳐댈, 옆집 1003호에 사는 홀아비 아저씨도 오늘은 왠지 조용. 그 아저씨, 한 번 시작하면 몇 시간 동안 고래고래 소리를 쳐대니까. 항상 늦게 들어오는 우리 가족이 자신한테 민폐라는, 그 아저씨가 평소 주장하는 바와는 다르게 오히려 그 아저씨가 이웃들에게 민폐다. 물론 그 아저씨는 우리가 그렇게 이야기할 때마다 시끄럽다고 소리를 박박 질러대면서 아니라고 우기지만. 아마 그 아저씨의 정신세계에는 ‘목소리 큰 놈이 지존’이라는 게 절대적인 진리로서 자리 잡고 있을 거야.

“다녀왔습니다ㅡ.”

라고 말하며 스페어 키로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은 굉장히 어두웠다. 게다가 만물이 다시 깨어나는 따뜻한 계절인 봄인 주제에 춥기까지 했다. 역시 아무도 없는 건가?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자 14살 한창 날카로울 때인 사춘기에 접어든 내 증오스러운 여동생, 현연아 양의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게 보였다. ‘혹시’라는 일말의 희망을 가져버린 나는 신발장 옆에 가방을 내려놓고 여동생의 방문 앞으로 갔다.

“어이, 안에 있냐?”

대답이 없다. 몇 번 더 불러봤지만 반응이 전혀 없었으므로 우리 집 아가씨의 방문을 허락도 없이 열고 들어가자 들리는 건 으레 들리는 '나가! 나가앗!'이라는 시끄러운 발악이 아닌, 녀석의 방의 밝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끼익’이라는 소리였다. 차가운 집안에 울려 퍼지는 그 소리가 어째서인지 불안하게 들린다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예상했던 대로 텅 비어있습니다. 그런데 컴퓨터는 켜져 있으니, 이건 무슨 조화냐?

컴퓨터 화면을 보니 무슨 쇼핑몰 같은 게 떠 있는 게 아무래도 녀석은 하라는 숙제는 안 하고 한창 인터넷 서핑이나 하고 있었나 보다. 이래서 이렇게 자제력이 부족한 녀석의 방에 컴퓨터를 따로 놔 주면 안 된다니까. 내가 그렇게 반대했었는데도 부모님께서는 ‘이제 연아도 어엿한 숙녀인데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줘야지’라고 말하면서 녀석의 생일 때 컴퓨터를 하나 사 주셨었지. 언론의 자유에 의해 보장되는 개인의 발언권이 다른 사람도 아닌 무려 혈육에 의해서 철저히 무시된 사건을 기억하면서 컴퓨터를 끄고는 녀석의 방을 휙 둘러보고 있었는데, 뭔가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철철 풍겨나는 것이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오, 일기다.”

14살 꽃다운 나이의 소녀의 일기장에는 무엇이 적혀 있을까, 라는 궁금증에 그 일기장을 열어본 나는 그러나 첫 페이지를 읽고는 일기장을 고이 치워두었다.

“못 이해하겠어…….”

라는 게 가장 큰 이유. 역시 여자들의 세계는 이해할 만한 것이 못 되는 거군, 그냥 평생 솔로로 사는 게 나을 것 같다, 라고 생각하며 일기장을 다시 원위치로 고이 돌려놓은 후 연아의 방에서 나온 나는 이번에는 항상 10시면 잠에 드는 부모님 방에 들어가 봤다. 역시 텅 비어 있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응?”

방 안에는 특기할 만한 점이 하나 있었다. 마치 방금 전까지도 본인의 부모님께서 누워 계셨다는 듯이 이불은 어질러져 있는데다가 항상 등이 뻐근하다며 켜고 주무시는 온돌장판까지 켜져 있다. 설마, 주무시다가 사라지신 겁니까? 만약 그랬다면, 평화롭게 사라지셨을지도 모른다. 기본 출퇴근 시간이 오전 6시에서 오전 12시일 정도로 일에 치이시기 때문에 잠잘 때만큼은 누가 업어 가도 모르시는 우리 부모님이니까. 이 시각에 이렇게 침대가 어질러져 있다면 10시 전에 퇴근하셨을 게 분명하니까 오늘은 꽤나 일찍 끝나신 것 같다.

“……라지만, 정말 아무도 없네…….”

부모님의 방문을 닫은 나는 한숨을 내쉬며 거실로 나가 불을 켜는 스위치를 눌렀고, 형광등에서는 밝은 빛이 쏟아져 내려왔다. 아직 전기는 살아 있군.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프다. 만들어 먹기는 귀찮고 했기 때문에 나는 냉장고를 열어봤다.

안에 보이는 것들을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미네랄워터 몇 병, 양배추 세 개, 사과 하나, 오이 두 개에 김치통 네 개.

그리고 꿈과 희망이 있었다.

“……어라?”

눈을 한 번 깜박이자 방금까지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 있었던 꿈과 희망이 사라져 있었다. 뭐야, 헛것을 본 건가?

어쨌든, 고급 서양식 레스토랑의 저장고와도 같은 풍부한 저장량이 아름답다. 너무 아름다워서 눈에 습기가 차오를 정도다. 우리 가족은 원래 집에서 해먹기보다는 외식을 즐겨 해서 부모님이 일찍 끝날 때는 만날 나가서 저녁을 사먹기도 하고 또 이 집의 요리를 담당하고 있는 내가 하루에 먹을 만큼만 장을 봐오는 것을 철칙으로 삼기 때문에 더더욱 냉장고가 텅 비어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 좌절감에 냉장고 문 앞에 털썩 쓰러졌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나는 냉장고의 내용물 중에서 그나마 먹을 만해 보이는 사과를 꺼내서 흐르는 물에ㅡ수도꼭지도 작동합니다ㅡ대충 씻은 다음 한 입 베어 먹었다.

‘아삭.’

……식초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시다.

수능에 나오는 4점짜리 문제를 10처만에 풀어버릴 것만 같은 표정으로 말없이 베란다 문을 연 나는 청춘의 정열과 열정을 담아 그 사과를 어둡고 검은 하늘을 향해 던져버린 후 아무 이유 없이 신경질을 내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과의 그 시디신 맛을 잊기 위하여 마구 고개를 흔들고 있을 때 초인종 소리가 들렸고, 화들짝 놀라서 얼른 문을 열어보니 채린 양께서 문 앞에 도도하고도 새침한 자태로 서 계셨다.

‘너네도?’라고 묻자 녀석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우리 집에 오면 항상 그랬듯이 거실에 놓인 소파의 한 구석에 앉았다.

-*-

자리에서 일어난 김에 다시 먹을 것을 찾아 헤맨 결과, 수납장 구석에 처박혀 있는 팝콘 몇 봉지를 찾을 수 있었다.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는 주제에 유통기한이 안 지난 게 기적이라면 기적일 수도. 이걸 먹어서 배가 찰지는 의문이지만 일단은 음식, 영어로는 Food입니다. 쉽게 말해서 먹을 거라는 말씀.

“어디 보자, 이걸 여기다가 넣고 나서…….”

이미 수백 번도 더 해봐 머릿속에 뿌리 깊게 박혀버린 조리방법대로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진 쪽이 밑을 향하게 해서 전자레인지의 내부에 모셔둔 후 전자레인지의 문을 닫고 손가락으로 숫자가 적혀진 버튼 중 차례대로 1, 4, 5번을 누른 다음, 크고 붉은 '시작' 버튼을 지긋이 눌러주자 팝콘이 토마스ㅡ브레이크 댄스의 일종입니다ㅡ를 시작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360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말입니다.

전자레인지 앞에 서서 팝콘이 튀겨지는 걸 관람하기도 하고 앞구르기를 하기도 하면서 무의미하게 1분 45초를 보내자 조리가 끝났다는 걸 알리는 삑ㅡ 삑ㅡ이라는 소리가 적막했던 거실을 채웠고, 마악 뒤구르기를 시작하려던 나는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는 일어나서 전자레인지의 문을 열고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는 팝콘봉지를 꺼낸 다음 그 봉지에서 풍겨나는 은은한 버터 향을 맡으면서 그걸 뜯고는 큰 그릇 안에 모조리 쏟아 부었다.

그릇을 손에 들고 채린이의 옆에 주저앉은 내가 그릇을 그녀 쪽으로 살짝 내밀며 말했다.

“먹을래?”

말없이 고개를 젓는 채린. 안 먹으면 니 손해지, 내 손해겠냐.

다시 그릇을 내 쪽으로 끌어당긴 후 김이 은은하게 오르는 팝콘을 한 주먹 집어서 입에 넣고는 씹어 먹기 시작했다. 음, 이 은은한 버터 맛이 감도는 바삭한 감촉의 팝콘은 정말로 바삭하구나. 그런데 분명히 난다고 적혀 있던 은은한 버터 맛이 전혀 안 나. 밍밍해. 맛없어. 이걸 왜 구석에다가 처박아놓고 봉인시켰는지 그 이유를 단박에 알 수 있게 만든 맛이랄까, 도대체 누가 사온 거야, 이거? 나는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하고, 또 부모님은 장보실 시간 따위는 없으니까 역시 범인은 내 여동생이신 것 같다. 이딴 맛없는 걸 사는 데에 돈을 낭비하다니, 나중에 꼭 혼내줄 테다.

하지만 음식이라고는 이거밖에 없고 또 배가 고프니까 맛없다고 불평할 팔자는 못 된다. 억지로라도 먹자.


“우적우적…….”

하지만 굶어죽기 일보 직전이라면 모를까, 단지 적당히 배고픈 정도로는 아무래도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다 먹어치우기 버겁다.

결국에는 반 이상을 남겨버렸습니다.

음식물 쓰레기는 환경오염을 유발하는 주범들 중 하나라지만 지금처럼 아무도 없는 곳에서 겨우 나 같은 애송이 하나가 음식물 쓰레기를 불법으로 투기해도 이 드넓은 대자연님은 상처 하나 입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으면서 나는 내가 남긴 팝콘을 베란다 밖으로 투여하는, 그런 양심에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는 일을 감행했다. 아까 사과도 무단 투기했겠다, 거리낄 것 따위는 전혀 없었습니다.

팝콘을 베란다 밖으로 다 부어버린 후 팝콘을 담았던 그릇을 싱크대에 놓아두며 내가 물었다.

“배, 고프냐?”

“응. 너는?”

“엄청나게 배불러. 마치 만한전석을 한꺼번에 다 먹어치운 것만 같은 기분이야. 소화제 없냐?”

……물론 거짓말이다. 속된 말로 이르면 개구라. 이 팝콘이라는 음식ㅡ이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ㅡ은 결국에는 옥수수 한 줌을 한 봉지로 가득 뻥튀기하는 거니까 이걸 다 먹어봤자 겨우 옥수수 한 줌을 먹은 효과밖에 없다. 그러니 겨우 입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음식의 소중함을 망각한 채 반도 안 먹고 버려버린 내 배는 오죽하겠나. 이런 걸 보고 바로 인과응보라고 하는 걸 거야.

그러고 보니, 아까 오던 길에 보이던 편의점이나 슈퍼들은 다 불이 켜져 있었다. 불이 켜져 있다는 말은 열려 있다는 말이지? 좋아, 그럼 적당히 하나 골라잡아 거기서 식량이나 조달해 볼까나.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먹으니 나머지는 몸이 자동적으로 처리 시작했다. 일어나서 아까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외투를 다시 집어들은 후 입고 있던 나에게 채린이 물었다.

"어디 가?"

"음식 사냥. 배고프니까 말이지. 같이 갈래? 이 현성님이 친히 에스코트해주지."

"……알았어."

녀석이 준비할 동안 먼저 나가서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자 곧 외투를 챙겨 입은 채린이 어디서 났는지 모를 커다란 비닐봉지와 함께 나타났다. 호오, 역시 준비가 투철하군…… 잠깐, 여긴 우리 집인데 주인, 즉 나조차도 집안 내의 존재 여부조차 몰랐던 비밀…… 아니 비닐봉지를 어째서 손님인 자네가 찾으신 건데? 설마 초능력입니까?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색 눈은 사실 투시능력까지 겸비하고 있으신 거냐?

“시끄러워.”

“……네.”

어쨌든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음식을 갖고 오기 위해서 방금 전에 급조된 음식원정대의 두 대원들, 현성과 진채린은 커다란 비닐봉지라는 초강력 비밀무기와 함께 10시 39분 43초에 식량을 발굴해내기 위한 기나긴 여정을 시작했다.

-*-

10분 가까이 달빛 아래에서 걷자 음식원정대의 두 대원은 그들의 기지에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 세O일O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적적한 밤하늘을 은은하게 비춰주는, 유리문 밖으로 새어나오는 전깃불이 가게가 열려 있다고 광고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탐을 하러 가게 안에 잠입해 보니까 손님이 하나도 없다. 하다못해 이런 늦은 시간에 카운터를 지켜야 하는 숭고한 임무를 지니고 계신 알바생의 존재조차도 역시 전무. 이렇게 관리/방범이 허술해서야 되겠습니까, 편의점 사장님? 도둑이라도 들어서 돈을 다 훔쳐 가면 어쩌시려고요?

……라지만, 사람이 모두 사라지면서 도둑이라는 사람도 증발했으니 패스. 게다가 설렁 모든 인류가 멸망했는데도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ㅡ즉 나랑 채린ㅡ이 음식과 돈을 훔치는 경범죄를 저질러도 출동할 경찰 역시 존재할 리가 만무. 그렇다는 말은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모든 음식물들은 죄다 공짜라는 말이다. 돈 따위는 전혀 안 든다는 말씀. 고마운 마음으로 싹 다 가져가겠습니다.

바로 이런 걸 아줌마 스피릿이라고 하는 걸까?

내 내면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을지도 모르는 아줌마 본능에 대해서 고민하며 일단은 삼각김밥이나 햇반 등 밥 종류를 제일 먼저 비닐봉투 안에 담았다. 매운 것과 밥을 좋아하는 토종 한국인의 입맛을 지닌ㅡ어째서인지 머나먼 타국의 산물인 콜라 역시 좋아하지만ㅡ 나로서는 다른 것보다도 밥이 최우선이었거든. 밥 종류를 다 담은 다음에 비닐봉지에 투하한 것들은 과자나 빵, 라면 같은 간식 종류들. 그것들만 담았는데도 채린이 들고 온 비닐봉투는 금세 가득 차 버렸다. 우와, 인스턴트 음식이라는 건 꽤나 부피가 큰 것이었구나.

그 사실에 감탄하며 카운터 뒤에서 노획한 비닐봉투에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필수품인 물이나 콜라 등 마실 것들을 담고 나서 우리는 편의점을 떴다. 한 손에는 봉지, 다른 한 손에는 전자레인지에 따끈따끈하게 데운 삼각김밥을 들고서.

-*-

그 크던 삼각김밥이 내 뱃속으로 거의 다 사라졌을 때쯤 우리는 다시 우리의 주거지가 위치한 아파트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의 '위로' 버튼을 누른 내가 물었다.

“니 집에 있을 거냐? 아니면, 우리 집?”

“…….”

말을 안 하는 걸 보니 자기네 집에 있겠다고 하는 것 같은데, 아닌가?

나는 그녀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기 위해서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간 후에 일부러 아무 버튼도 누르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자 드디어 마음을 다잡았는지 검지를 뻗어 버튼에 갖다 대는 채린. 눌려진 번호는, 어디 보자…….

‘10? 10이야?! 내가 잘못 본 거 아니지?’

아무리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보아도 빛나고 있는 버튼은 ‘10’이라고 쓰여 있는 버튼이 확실하다. 게다가 11은 누르지도 않았네? 아무래도 주거지는 우리 집 당첨인가 보다. 하나님, 부처님, 아버님, 어머님, 담임선생님. 제발 저에게 끓어오르는 사춘기의 욕정을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내려주십시오. 이런 소위 '미소녀'와 같은 집에서 단둘이 살기에는 유혹이 너무 큽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고 있을 때, 우리 집에 오는 이유를 물어보니 녀석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집 열쇠를 안 갖고 왔거든.”

“…….”

바보다, 이 녀석은 틀림없이 바보다.

내가 그렇게 경악과 황당함, 그리고 당황함이 모두 짬뽕이 된 표정으로 입을 쩍 벌리고 채린을 쳐다보고 있는 새에 엘리베이터는 목적지인 10층에 도착했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나는 마음 속 심연 깊은 곳에서 자연스레 우러나오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스페어 키로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신발을 벗는 내 입에서 나오는 습관적인 말.

“다녀왔습니다.”

라지만 집에는 역시 아무도 없다. 누누이 강조했지만 텅 비어있는 겁니다. 불만 켜져 있지 이미 사람 사는 곳은 아니라는 말씀. 아니, 내가 사람이니까 사람은 사는 거지?

잠시 나라는 생물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며 거실로 들어간 나는 일단 노획물을 풀어서 바닥에다가 쏟았다. 아까 편의점에서 잠깐 동안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면서 꼭 필요할 것만 같다고 생각한 음식만 담았지만 이내 그게 귀찮아져서 닥치는 대로 쓸어 담았으니까 맨 처음 담은 몇 개를 제외하고는 뭘 담았는지 도통 모르겠으니까.

봉지를 거꾸로 들자 그 안에서 쏟아지는 음식물들에서 금방이라도 빛이 뿜어져 나올 것만 같다. 일단은 배가 고팠으니까 당연한 거일지도.

“뭐, 음식이래봤자 겨우 이런 것들뿐이지만…….”

역시 노획장소가 편의점이었기 때문에 편의상 ‘음식’이라고는 하지만 결국에 우리가 갖고 온 것들은 간단한 요깃거리나 과자 종류, 그리고 인스턴트식품들뿐이다. 이런 걸 매일 먹으면 살이 많이 찔 것 같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부류인 나는 상관없다고 치더라도, 채린이 같은 미소녀의 경우에는 이런 거 많이 먹으면 살찐다면서 안 먹고 버팅기는 거 아냐?

“…….”

하지만 내 우려는 말없이 칙O을 꺼내서 먹는 채린에 의해서 말끔히 해소되었다. 녀석이 먹는 건 쿠키. 게다가 초콜릿 칩이 듬뿍 박혀 있는, 설탕과 당분이 가득 든 쿠키다. 열량, 즉 칼로리가 무지하게 높다는 말씀이다. 굶는다거나 그럴 걱정은 없을 것 같다.

나는 녀석이 계속 칙O를 말없이 집어먹는 동안 입에 츄O츕O를 문 채로 바닥에 쏟은 음식물들을 종류대로 분리해 보았다.

“흐음……. 일단 대충 분류해 보면 라면이랑 컵라면, 짜O게티 같은 면 종류, 삼각김밥하고 햇반, 과자, 식빵, 그리고 마실 것 정도인가…….”

물량도 다들 기본 열 개는 넘으니 이 정도면 모든지 많아야 좋다고 생각하는 내 관점에서도 풍족한 축에 낀다. 게다가 삼각김밥은 편의점에 있는 걸 모조리 다 쓸어 담았기 때문에 종류별로 다 있다. 이 정도면 그럭저럭 3일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양념불닭 삼각김밥을 까서 입에 문 다음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간 후 전기주전자에 물을 붓고는 스위치를 내렸다. 이 양념불닭 삼각김밥은 처음 먹어보는데, 맛이 괜찮네, 라고 생각하며 나는 컵라면을 하나 집어서 용기를 둘러싸고 있는 비닐을 뜯었다. 라면스프를 부은 후 고개를 뒤로 돌려 채린 쪽을 바라보니 벌써 칙O 한 통을 다 해치우고는 두 번째 통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살찌는 것 따위는 전혀 상관하지 않으신가 보다.

만날 그렇게 건강에 백해무익한 식단으로 살아가시는 겁니까, 채린 양?


“지금은 배고프니까. 원래는 이렇게 안 먹어.”

“그렇겠지, 만날 그렇게 먹었다가는 살이 뒤룩뒤룩 찔 테니까 말이야.”

내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묵묵히 쿠키만 집어먹고 있는 채린. 무시하는 거냐?

주전자 안의 물이 다 끓었다는 증거인 '삑-!'이라는 소리를 들은 나는 채린의 머리를 때리고 싶어 하는 강렬한 충동을 간신히 진정시킨 후 몸을 주전자 쪽으로 돌려서 주전자를 집은 다음 컵라면에 물을 쪼르륵 부었다. 저 자식, 나중에 꼭 굶겨서 버릇을 고쳐주고 말 테다, 라고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대충 한 3분 정도를 때운 나는 정확히 3분이 지나자마자 재빨리 뚜껑을 열어서 대충 면을 풀어 주었다. 면을 후루룩 먹고 삼각김밥을 곁들여 국물까지 다 먹어치우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약 10분.

배고프면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 라는 새로운 생각을 품게 해 주는 경험이었습니다.

시계를 보니 현재 시각은 오후 11시 5분. 이 시간에 이렇게 먹고 나서 바로 자면 건강에는 좋지 않겠지만 별로 할 것도 없으니 그냥 잠이나 코오 자야겠다. 채린에게 내 동생 방에서 자라고 한 후 가짜 하품을 하며 이미 불이 꺼져 있는 내 방으로 들어갔다.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문과 침대 사이에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었으므로 큰 어려움 없이 침대에 도착, 온몸을 침대에 내던졌다.

일어서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침대에 눕자마자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잠이라는 마법이 온몸을 잠식한다.


어쨌거나 그럭저럭 잘 살아갈 수는 있을 것 같다. 과연 그게 언제까지인지는 잘 모르겠지만ㅡ.

후원댓글 0
댓글 0개  
이전 댓글 더 보기
TWIP 잔액: 확인중
▲윗글 MISSING: Day 2, Missing 천건_
자유게시판게임추천박제팬앝트공지사항냥님께건의사항냥일기
2
자유게시판
제가쓰는소설이에요
피트도령
05-01
0
04-23
0
자유게시판
작가님 ㅠㅠ
butler324
04-22
0
자유게시판
아니
강롤ソ
04-17
1
자유게시판
작가님
butler324
04-12
0
자유게시판
님 아
강롤ソ
04-12
1
자유게시판
어쩌다보니 받은 그림
butler324
03-21
0
03-07
1
자유게시판
1시간 다냥그리기 [1]
crying_eye_02
01-30
1
01-25
2
자유게시판
우리집고양이자랑! [1]
솜이아빠
01-20
1
자유게시판
바로 그 닭가슴
강롤ソ
01-15
1
자유게시판
똑똑은 개뿔 이거 누나닮았으
진격의초콜릿
01-11
1
자유게시판
팩트
진격의초콜릿
01-11
1
자유게시판
눈싸움
진격의초콜릿
01-11
1
자유게시판
현재 방송후기
진격의초콜릿
01-11
1
자유게시판
블라디미르
강롤ソ
01-07
1
자유게시판
게으른 다냥님은 들으시오~!
butler324
12-31
1
자유게시판
끄어어억
탈모관리사심부름꾼
12-23
1
자유게시판
100일 축하ㅏㅏㅏ추가하ㅏㅏㅏ
조따배고프다
12-22
1
12-17
1
자유게시판
냐아아앙님 [2]
butler324
12-10
1
자유게시판
존ㅡ버 중이다 이말이야
조따배고프다
12-09
1
자유게시판
MISSING: Day 2, Missing
천건_
11-29
»
자유게시판
MISSING: Day 1, Nocturne
천건_
11-29
1
11-29
1
자유게시판
지름 후기 [1]
천건_
11-29
1
자유게시판
솔의눈 [2]
로드닌
11-17
인기글 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