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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임무 (상)

요리남
2020-01-30 09:55:24 77 1 0

임무



이 소설은 허구이며 실존하는 인물, 사건, 단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또한 특정 사상의 찬양 목적이나 특정 인물의 비방, 비하 의도 역시 없습니다. 그저 재미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휴전선 근처, DMZ에서 간신히 벗어나 주체 사상이 지배하는 땅의 경계에 있는 우거진 숲에 숨겨진 지하 벙커. 그 곳은 은밀성이라는 목적 하나만을 위해 다른 여러 거주 조건들을 희생한 것처럼 보였다. 비좁은 복도, 사람이 생활하기에 최소한의 필요 물품들만 놓을 수 있는 작은 방, 환풍구 따위는 거의 없는 탓에 습기차고 곰팡내 나는 공기와 그런 곳에 으레 있기 마련인 강인한 생명체인 쥐까지..

그 벙커 안 가장 깊숙한 곳의 그나마 큰 방에서는 두 명의 거친 숨소리가 녹슨 철 문 사이로 새어나오고 있었다. 누군가의 체온이 그리워 침대 위에서 서로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으로 착각할 법도 하지만 안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북한 군복 차림의 두 사람이 나누는 것은 연인의 애정이 아닌 살벌한 격투였다. 서로가 주먹을 휘두르고 상대의 공격을 흘려내면서 빈틈을 노리는 풍경은 고대 로마의 검투사들을 연상하게 했다.


그러다, 결판이 났다.


한 명이 휘두른 주먹을 슬쩍 피한 상대가 턱에 팔꿈치를 꽂아넣자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반격을 허용당한 남자는 바닥에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이런 일은 아이들 싸움처럼 코피가 터진 쪽이 지는 것과는 이야기가 다르다. 승기를 잡은 한 명이 지체없이 쓰러진 상대 위로 올라타 사정없이 주먹을 휘두르자 사람 몸과 몸이 맞부딪히는 소리라고는 생각이 안될 정도의 무서운 소리가 벙커 안 빈 공간을 채우기 시작한다.


[그만. 그만하면 됐네 동무.]


스피커로 울리는 소리에 겨우 손을 멈춘 승리자의 얼굴도 여러 차례의 타격에 의해 이곳저곳이 붓고 멍이 든 상태였지만 눈빛만큼은 승리의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땅에 쓰러진 남자가 정신을 잃은 것과 살아는 있는 것을 확인한 승자는 무표정하게 벽으로 다가가 걸려 있는 수건으로 피와 땀에 젖은 얼굴을 닦았다. 진한 격투의 흔적이 수건에 묻어나오자 승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마 윗쪽이 찢겨 피가 조금씩 배어 나오고 얼굴이 전체적으로 타격을 입은 상태였지만 자세히 보면 고운 인상에 묘한 색기마저 느껴지는 얼굴의 소유자로 길거리에서 무심코 마주친다면 이른바 '작업'이 걸릴만한 외모였다.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온 음성은 분명한 남성의 목소리였다.


"다음은 뭡니까... 대장 동무?"

[그 친구 의무반부터 불러 주게. 여전히 손속에 자비가 없군. 아무리 '상대를 쓰러트려라'라는 말을 들었다고 해도 같이 훈련받은 동기를 때려눕힐 줄이야.]

"임무는 수행할 뿐입니다."


스피커 너머로 약한 코웃음이 들렸다.


[그래.. 그래야지. 자네는 그렇게 훈련받았으니까. 조선. 시험을 통과한 것을 축하하네. 이제 임무가 주어질거야. 자세한 사항은 내 방에 와서 듣도록. 이상.]


조선이라고 불린 남자는 스피커 쪽을 향해 경례를 올리고 방을 빠져나갔다. 곧 의무반이 들어와 들것에 쓰러진 남자를 싣고 방을 떠났다. 바닥에 흩어진 핏자국만이 빈 방에 남았다.




2.

천장에 달린 전구 하나만이 빛을 내고 있는 방에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살풍경한 방에 존재하는 사물은 의자 둘과 집무용의 테이블, 그 위에 놓여진 서류 몇장이 다 였다. 그곳이 대장실이었다.


"왔나? 앉게."

"알겠습니다."


철제 의자가 콘크리트 바닥을 긁는 소리가 잠깐 난 후 조선과 대장이라고 불린 초로의 사내는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마주 앉은 상대의 마음을 간파하듯 눈빛이 잠시 교차 한 후 대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단단한 사각 콘크리트 방 안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아까 했던 이야기의 반복일테지만.... 자네는 이 시험을 통과했어. 임무가 내려질걸세."

"..."

"대략적인 개요를 알려주지. 자네는 남조선에 가게 될 거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대장의 눈이 빛났다. 이런 답변은 이미 계산 안에 두고 있었다. 몇 년의 훈련을 받으며 남조선의 언어를 습득하고 생활 양식이나 다른 사소한, 그러나 북한 사람으로 티가 안 날만한 지식들을 배우게 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으니까. 무지랭이라도 그렇게 굴렀으면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어진 대장의 말은 조선의 눈빛을 흔들리게 했다.


"그럼 암살 임무인건 예상하고 있었나?"

"...암살... 말씀이십니까?"

"...예상 못했나 보군. 이걸 보게."


대장이 건네준 서류에는 오십대의 남자의 사진과 인적사항이 적혀 있었다. 팔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종잇장을 넘기고 있는 조선에게 대장이 말을 이어갔다.


"보면서 듣도록. 남조선군 XX연대의 연대장 백 대령이야. 표면상으로는 그렇지. 하지만 실제는 일개 연대장 따위가 아니라 남조선군 군수개발의 큰손이라네. 이 인물을 제거하면 우리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에 큰 이득이 있을 걸세."

"하지만 어떻게 접근을 해야 하는 겁니까?"

"신분을 위장해야지. 이제부터 자네는 '조선'이 되야 하네. 우리 북조선의 군인, 조선이 아닌.. 미국 펜실베이니아 태생의 미국인이자 남조선인인 '조선'으로."


그렇게 말하며 그는 품에서 여권 하나를 꺼내 책상에 툭 놓았다. 조그마한 물건이 책상에 부딪혀 내는 소리는 꽉 막힌 공간에 터무니없이 크게 울렸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긴장감 때문인지 둘의 대화가 잠시 끊겼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여권에 손을 뻗는 조선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대장은 놓치지 않았다. 그가 여권을 집기 직전 대장을 말을 던지자 손을 뻗던 조선은 마비라도 걸린 듯 행동을 멈췄다.


"그걸 집으면 북조선에서의 자네 존재는 사라지는거야.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자네와의 연관성을 부정하겠지."

"각오하고 있습니다."

"확실한가? 일말의 두려움도 없는가?"

"제게 있어 지금 단 하나 두려운 것은, 혹시나 임무를 실패하게 될 상황. 그것뿐입니다. 물론 그런 불상사는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만."

"좋아. 그렇다면 그걸 가져가게."


멈췄던 몸이 다시 움직였다. 그 동작은 마치 멈춰뒀던 비디오를 다시 재생한 듯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제비가 자기 둥지를 찾아가듯 여권은 조선의 품 속으로 사라졌다.


"기대하고 있겠네. 자네 이름이 괜히 조선인게 아니지. 조국의 이름을 품고 큰 일을 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그리고 이것 하나만 명심해 두게. 자네가 어떤 신분으로 활동하든...."


그 말과 함께 대장은 조선의 가슴을 가리켰다.


"...자네 마음속에는 북조선이 있음을."

"명심하겠습니다."

"이상. 우리가 나눈 대화는 전부 기억에서 지워버리게."

"저희가 지금 대화를 나눴습니까?"


그를 바라보던 대장이 씩 웃었다. 방에 들어온 이후로 처음으로 보이는 미소였다.


"좋은 여행 되길 빌겠네."




3.

여러 따분한 절차들을 통과하고 조선은 한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밀입국 브로커이자 현지 연락을 담당하는 요원은 왠만한 일들을 잘 처리해 줬지만 사소한 사항 하나를 미처 신경쓰지 못한 듯 했다. 한국이 경제난 덕분에 군 입대자가 몰리고 있다는 사실을. 표적을 곁에서 오랜 시간 관찰하고 패턴을 파악하기 위해 군 입대를 하기로 계획을 세웠던 조선은 처음에는 짜증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다고 상황이 바뀔 리도 없기에 그는 그것을 현지 분위기 파악 겸 휴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예정된 입대일까지는 약 9개월이 남아 있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애매한 시간동안 그가 현지 요원이 제공한 숙소에 머무르는 때는 거의 없었다. 무언가 목적을 찾기라도 하는 듯이 거리를 배회하는 것이 일과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에게 숙소는 그저 잠을 청하기 위한 공간일 뿐이었다.  

그 날도 그는 거리를 정처없이 배회하고 있었다. 손에 든 스타벅스 커피는 거의 마시지 않은 채로. 그러다 그의 시선이 어딘가에 고정됐다.


"만화 학원?"


갖가지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고 특별한 상호도 없이 만화학원이라고 써져 있는 조금 낡은 간판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만화. 유흥을 위해 여러 소재가 들어간 그림 책을 만화라고 부른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조선에게 그걸 보고 웃거나 재미를 느낄 기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태어나 나이를 먹기 전까지는 삶이 자신에 대한 도전이었다. 열악한 환경은 항상 그를 잡아먹기 위해 이빨과 발톱을 드러낸 야수와도 같았다. 가난과 굶주림을 피하기 위해 선택한 다음의 삶은 훈련을 통한 도전의 연속이었고, 북조선을 위해 주어지는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자신의 존재 가치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 단순히 여흥을 위해 시간을 소모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 볼 여유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간판을 잠시 올려보다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애초에 그는 암살자일 뿐이었다. 만화 같은것에 관심을 둘 이유따윈 전혀 없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이미 날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이미 많은 시간을 밖에서 보냈다는 증거가 산에 걸린 저녁놀로 나타나자 그는 숙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 한켠에는 별거없는 간판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조선은 그날 밤 잠을 설쳤다.




4.

결국 그는 어제 저녁에 보았던 만화 학원의 간판 앞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건물 안으로 자신을 잡아 끄는 호기심과 자신은 군인이고 이런 곳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네 일이 아니라고 하는 이성이 서로 부딫히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한 채 고민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등 뒤에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리기 전까지는.


"응? 뭐야. 만화 배우려고 왔어?"

"예? 어... 저...."

"들어와. 상담은 공짜거든. 하하하."

"저기... 제 말을...."

"어허, 남자시끼가 말이 많다. 딱 보니 그림 그리고 싶어하는 관상이구만. 들어와 임마. 헷."


뜬금없이 뒤에서 나타난 턱수염의 사내는 그 말을 남기고 학원 안으로 사라졌다. 조선은 멍 하니 뒷모습을 지켜 보다가 그를 따라 건물에 들어갔다. 용의 아가리에 머리를 디미는듯한 짜릿함이 그의 몸에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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