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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라세 와우 소설 2

비트찍는마르
2019-06-23 06:37:50 240 0 0

첨삭 열심히 했는데 글이 잘릴 줄이야..




그렇게 밤은 깊어갔고 로돈의 불침번만 남긴 채로 레아나는 깊이 잠에 들었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시간은 매우 빠르게 흘러갔다.

저녁 즈음에 잠들었던 레아나는 밤이 되고 새벽이 될때까지 잠들었다. 그러다...

"...엄마."

스스로 잠꼬대로 뱉은 말에 그녀는 흠칫하면서 깨어났다. 이마에 식은땀이 가득했다. 자신이 얼마나 잠들었는지 생각하는 와중에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로돈이 등을 돌려 앉고 있었다.

"깨어나셨습니까?"

"아, 네..."

느낄 수 있었다. 로돈이 갑자기 좀 이상하다는 걸. 목소리가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아까부터 잠꼬대를 하시더군요. 어머니를 찾고 계시는 듯한..."

그 말에 레아나는 뻘쭘해서 머리를 매만졌다. 분위기를 바꾸려 목소리를 올렸다.

"그, 그래서 뭐요? 이젠 고작 잠꼬대 한 것 가지고 트집 잡을건가요? 막 아직도 엄마나 찾는 철 없는 꼬마 정도로..."

"가족을 그리워 하는 일을,어찌 부끄럽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로돈은 하늘의 별을 향해 손을 낮게 들어올리고 손에 쥔 눈을 날렸다. 눈들이 바람에 날려 가루가 되었고 이내 사라져갔다.

"누군가에겐, 평생 그리워할수 밖에 없을진데."

 레아나는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로돈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았고,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있었다. 

 

 "이봐요,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세요. 그런 식으로 나오시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잖아요. 안 그래요?"


 "......"


 로돈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이내 무거워진 입을 열었다.


 
"제 목숨은 지금까지 두 번 구원받았습니다. 첫 번째 구원을 받기 전까지, 제겐 빛을 위한 헌신이 아닌 오직 가족에 대한 사랑 뿐이었죠. 어머니, 아내, 그리고 아들까지. 농사를 짓고 채집을 하고 그날 저녁을 잔뜩 들며 집으로 돌아가면 가족들이 저를 반겨주었죠. 저녁상을 가득 채우고 오늘 있었던 일만으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가끔 밤을 새기도 했지요. 너무나 평범한 삶이었습니다. 그저 평범했고... 행복한 삶이었죠. 그렇기에, 정말 바보같이... 앞으로도 이 목숨이 다 할때까지 가족들과 함께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그들이 오기 전까진...

그날도 지난 날들과 똑같을 줄 알았습니다. 약초와 과일을 잔뜩 들고 돌아간 집에... 가족들이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건 그저, 수 많은 켄타우로스들의 말발굽 자국들, 그것들에 짓밟혀 불에 타고 있는 집터, 그리고 창칼에 무수히 도륙당한 시체들만이 싸늘하게 식어있었습니다.

 전 제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착각이라 믿고 싶었습니다. 제가 미쳤다고, 어디서 환각을 일으키는 버섯이라도 먹었다고 믿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때 제 곁에는 제가 잘못 보고 있었다고 말해줄 이도 없었죠.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절망감은 분노로 바뀌었고 분노가 이끄는 길은 복수 뿐이었습니다. 평생 피 한 방울 닿지 않았던 쟁기와 낫은, 얼마 지나지 않아 켄타우로스들의 피로 물들었죠. 제 분노가 사라질때까지. 가족을 잃게 만들었던 켄타우로스들에 대한 분노와, 가족의 곁을 지키지 못했던 제 자신에 대한 분노들을 모두 털어버릴때까지. 저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지도 못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잘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가까스로 이성을 찾았을때는, 갓 태어난 어린 켄타우로스의 시체가 난도질을 당한 상태로 제 발 밑에 놓여져 있었을 뿐. 그제야 피냄새가 느껴졌고, 그건 제 온 몸에서 나는 냄새라는 걸 알아챘습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그 많은 피가 제 온몸을 덮고 있었는지, 털이 피에 떡져서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 조차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가까스로 둘러본 주변은, 도저히 이성을 유지하고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들이 제 가족을 짓밟아 놓은 것 보다 더 처참하게, 그들의 피로 얼룩져있었고 저의 분노로 짓밟혀 있었습니다.

허무했습니다. 모든 것이... 이런다고 달라질 것이 무엇이었을까. 복수를 이뤘다고 해도 나의 가족이 살아나는 것도 아닌데.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도없는데. 오히려 저는 그들과 똑같은 죄를 지었고, 그들과 똑같은 존재가 되버렸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습니다. 죽음이 모든 걸 해결해줄거라 믿기도 했지만, 이 모습 그대로 죽어서 가족들을 만난다면 저를 반겨줄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는 그대로 제가 죽인 시체들을 뒤로 하고 그저 발걸음이 닿는대로 걷고 또 걷고... 지쳐 의식을 잃을때까지 걸었습니다. 누군가 이런 제 모습을 볼 바에야 아무도 눈에 띄지 않는 황무지 한 가운데에서 사라져버리고 싶었죠. 그러나 신은 저를 쉽게 죽게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정말 구원이었죠.

그 때 처음 만났습니다. 케른 님을. 전 고마운 줄도 모르고 소리쳤죠. 왜 나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았냐고. 나는 더 이상 살 이유도, 살 가치도 없는 존재인데. 너무 많은 생명을 죽이고 이젠 돌아갈 곳 조차 사라져버렸는데. 그때 저는 케른 님 앞에서 그간 쌓였던 울분을 모조리 토했습니다. 매우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케른 님은 오히려 제 어깨에 손을 얹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자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잘 모른다네. 그렇기에 난 자네의 마음 속 응어리를 풀어줄 수 없어. 하지만 이건 말해줄 수 있지. 생명과 삶이라는 건 그 누구도 함부로 단정 짓고 판단할 수 없는 것이라네. 자기자신도 포함해서 말이야. 스스로 지은 죄로 인해 나는 죽어 마땅하다고 단정짓는다면, 자네는 자네의 죄를 속죄할 기회조차 잃어버리는게야. 중요한 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일세.'

이어서 몸 추스리고 원한다면 자신이 이끄는 부족에 몸을 담아도 좋다 하셨죠. 블러드후프의 전사가 된 저는 그렇게 케른 족장님의 곁에서 제 분노를 다스릴 수 있었고, 지금까지 분노에 휩싸여 죽인 생명들에 대한 속죄를 이어갔죠.

그러나 그 삶도 차마 오래가진 못했습니다. 오그리마에서 케른 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말았죠.

저는 덜컥 겁을 먹었습니다. 제 분노를 막아주는 거대한 방패가 사라지고 말았으니, 다시 분노에 휩싸여 이성을 잃고 피폐해져가는 삶을 살 것 같았습니다. 검과 창을 쥐는 것이 두려워진 저는 어쩔 줄 모르다가 그림토템 부족이 쳐들어오기 직전에 마을을 빠져나가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그 누가 저를 쫒고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제 스스로 만들어낸 마음 속의 공포에 쫒기고 있었죠.

가족들이 그리웠습니다. 미치도록 보고 싶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 결국 가던 길을 멈추고 그 길바닥에 주저 앉아 울고 말았습니다.

그때 제게 두 번째 구원이 주어졌죠.

너무나도 눈부셨던 빛 아래서 저는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태양빛. 안쉬께서 제게 내리시는 계시를.

곧바로 달려온 길을 돌아가서 바인 님을 뵈었고, 안쉬께서 내려주신 빛으로 그림토템의 추적자들을 처단했습니다. 그리로 바인 님께 무릎을 꿇고 탈영에 대한 사죄를 빌었고 재차 케른 님께 받은 은혜를 평생토록 타우렌과 블러드후프 부족에게 갚겠다는 맹세를 올렸습니다. 전 바인 님을 겨우겨우 테라모어로 모실 수 있었고, 이어 그림토템 부족은 패배해 바인 님은 무사히 족장의 자리에 오르셨죠.

안쉬께서는 말씀해주셨습니다. 저의 사라지지 않을 방패가 되어주겠다고. 그러니 저 또한 누군가의 사라지지 않을 방패가 되라 하셨죠. 항상 자신에게 기도하여 구원과 영광을 얻으라고. 태양빛이 닿는 모든 곳에서 저와 함께 있어주겠다고 하셨죠. 저에겐 정말 절실했던 두번째 구원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한 순간도 저의 죄를 잊지 않았고, 가족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속죄하며 살다 나중에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땐 저를 반겨줄거라 믿고 있기 때문이죠."



로돈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고 레아나는 마른 침을 한번 삼켰다. 여러 생각이 오고가던 레아나는 묵묵히 로돈의 등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로돈은 솔직한 심정 같아선, 레아나가 뒤에서 따뜻하게 안아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다.

'퍼억~!'

하지만 로돈에게 날아온건 따뜻한 포옹이 아닌 그녀가 휘두른 도검의 칼등이었다. 로돈은 방심하던 찰나에 그녀가 휘두른 방향으로 나가 떨어져서 눈 속에 쳐박혔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나참, 무슨 얘기 하시나 했더니. 그런 삼류 신파극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면 제가 감격이라도 받아가지고 뒤에서 포옹이라도 해줄 줄 알았나요? 지금 그 표정이 딱 보기 좋은데."

"사, 삼류...?"

로돈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 저 기분 나쁜 얼굴에 방패라도 던져야 할까 잠시 진지하게 고민했다.

"후, 미치겠네 이거..."

레아나의 표정은 금세 굳어지고 이내 한 손으로 자기 머리를 쥐고 있었다.

"이리 앉아봐요. 그쪽 할 말 다 끝났으면 내 이야기 좀 해야겠으니까."

로돈은 화가 가득찬 표정으로 팔짱을 낀 다음 모닥불 앞에 레아나와 마주보고 앉았다.

"좋소. 그쪽 이야기는 얼마나 잘났는지 한번 들어봅시다. 하도 잠꼬대로 엄마 타령하길래 기껏 가족 생각 나서 젖은 감성 다 날려버릴 정도로 대단한 이야기 아니면 바로 타운카르 마을로 떠날 터이니!"

씩씩대는 로돈에 비해 레아나는 아까부터 계속 표정이 좋지 못했다. 그녀는 아까 드라노쉬아르 요새에서 떠날때 가방에 넣었던 상자를 다시 꺼냈다. 그리고는 그걸 계속 매만지더니 이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어요. 들은 적도 없고 만난 적도 없고. 어딘가에 살아있다고 해도 저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죠. 하지만 가끔 그 본적도 없는 얼굴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어요. 동족이 학살당하고 고향이 파괴되는 순간까지 어디서 뭘 하고 있길래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 걸까.

그땐 순식간이었어요. 수 많은 언데드들이 제가 사는 마을을 휩쓸어서 집을 불태우고 이웃을 학살하면서도 도망치는 것 밖에 할 순 없었죠. 그저 엄마의 손을 꼭 붙잡고. 엄마의 절망 가득한 얼굴을 그때 처음 봤어요. 항상 절 보면 웃어주시기만 했으니까. '괜찮아. 걱정하지마. 모든게 잘 될거야' 도망치던 내내 엄마가 저에게 해주신 말이었어요. 저에게 웃어보이셨지만 슬픔과 절망 가득한 두 눈 만큼은 감추지 못하셨죠.

행여 놓칠까봐 항상 제 손을 꽉 붙잡아주셨던 엄마는 어느 순간 제 손을 놓고 제게 이걸 쥐어주셨어요. 그리고 웃는 얼굴로 꼭 다시 만나러 오겠다는 약속까지. 물론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지만.

피난의 세월은 너무나 길고 길었어요. 그 동안 의지가 약한 자들이나 제 또래 어린 애들은 마력 중독에 미쳐가기도 했지만 저는 의외로 멀쩡했어요. 나중에 알게됬는데 저는 마력에 재능이 없다고 하더군요. 엘프들 몇 천 중에서 한 번 있을까말까 한 경우라고 하네요. 암튼 그것 때문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안된다 생각했는지 저는 아웃랜드로 넘어가지는 않았고 아제로스에 남아있기로 했죠.

제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저는 실버문에서 엄청난 차별과 멸시를 받았어요. 부모도, 가진 것도 없고, 마법도 쓸 줄 모른다니. 어떻게 무시하기 딱 좋은것들만 모여있을까. 제가 길바닥에 나뒹굴고 골목길에 웅크리고 있어도 제게 관심을 주는 이는 없었어요. 불쌍하다면서 동정 아닌 동정을 뿌리고 다니는 쫌생이들은 가끔 봤어도.

그렇게 아무 미래 없는 제게 손을 내밀어주신게 리아드린 님이었어요. 지금도 존경하죠. 갈 곳 없는 저를 거두어주셨으니까. 저는 일단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캘타스 왕자가 므우루를 탈취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아웃랜드로 급히 파견 나가서 무너진 태양 공격대에 편입되었고, 어찌저찌해서 태양샘을 정화할 수도 있었죠.

거기서 갖은 고생을 하고 실버문에 돌아오자 저는 느꼈어요. 혈기사단에 속해서 사는 건 내 삶이 아니라고. 내가 아닌 남들을 위해 헌신하며 살기 싫다고. 그래서 탈영을 계획하려는데 저는 리아드린 님의 명에 따라 정신 없이 노스렌드의 차원문으로 들어가버리고 어쩌다보니 잿빛 선고단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죠. 거기서 딱 하나 얻은게 있다면 그때 지금의 대영주 님과의 인연을 쌓을 수 있었던거? 물론 그것마저도 비행포격선 전투 이후에 연락이 끊겨 리치 왕이 죽고 나서야 다시 뵈었지만.

그 때 대영주 님께 제 심정을 토로했어요. 호드고 동족이고 뭐고 나한테 해준 것이라곤 무시와 멸시 뿐인 것들을 전부 다 때려치고 벗어나 나만의 삶을 살고 싶다고. 그러자 대영주 님은 명쾌한 답을 내렸죠. 그럼 벗어나라고.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깨달아야 한다 하셨죠. 그 말을 듣고 저는 실버문으로 돌아가는 차원문을 타지 않았어요. 대신 정말 돌아다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많은 곳을 가 보았죠. 먹을 게 부족했으면 주변의 동물들의 씨를 말렸고 돈이 부족했으면 울둠에서 바늘 찾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죠. 그렇게 노잣돈이 쌓이면 쌓이는대로 썼어요. 먹고 마시고 쓰고 즐기고.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를 위해서. 내가 힘들게 번 돈이니까 당연히 내가 만족할 곳에 써야한다고 생각했죠.

가로쉬가 테라모어를 개발살내고 오그리마에 깽판을 쳐놓건, 다른 드레노어에서 강철 뭐시기들이 쳐들어오건, 전 저랑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지냈어요. 그러다 대영주 님의 편지를 받았죠. 티리온 경 께서 돌아가셨다고. 부서진 섬이란 곳에서 불타는 군단이 쳐들어온다고. 지금 단 1명의 용사도 절실한 심정이라고. 부름에 꼭 응해주었으면 한다고 했죠. 그래도 이렇게 간곡하게 요청하시는데, 고민 끝에 돕기로 했어요. 물론 어딘가의 충성심이나 정의실현은 눈꼽만큼도 없고 그냥 돈이나 좀 챙길 수 있지 않을까하는 심정으로요. 그 때 빛의 성소로 가려 근처 마법사에게 차원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는데 뭐가 꼬였는지 건너와 보니까 가시덤불 골짜기였던 거예요.

암튼 군단은 물러났고... 다시 얼라이언스와 호드가 싸운다고 하네요. 저는 대영주 님 처럼 중립으로 남았어요. 그들이 친하게 지내건 치고 박고싸우다 자멸하건 아무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때문에..."

레아나는 고개를 살며시 떨구고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상자 속의 작은 수정이 푸른 빛을 내면서 이어 음악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행복해야되요. 반드시... 행복하게 살거라구요...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레아나의 목소리가 점점 울먹거리다가 이내 눈에서는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엄마가... 너무 불쌍하잖아... 혼자서... 날 이렇게... 사랑해줬는데... 내가... 내가..."

레아나는 계속 훌쩍거리면서 눈물을 닦다가 무릎을 모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엄마 보고싶다..."


 로돈은 숙연해진 분위기에 덩달아 고개를 숙이고 눈을 슬며시 감았다.
"어쨌든, 전 저대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거예요. 누가 절 어떻게 생각하던 아무 상관 없이. 당신도 예외는 아니죠. 알겠어요?"

로돈은 레아나가 말을 잘 이어가다 저런 식으로 끝내버리니 기분이 팍 상했다.

"그래도, 제가 이런 얘기 하게 만든 건 당신이 처음이네요. 대영주 님이나 리아드린 님한테도 안했는데."

레아나는 살짝 웃어보였다. 로돈은 모닥불을 휘적거리며 딴청을 부렸다.

"흠, 제 이야기만큼은 아니지만 나름 들어줄 만 했군요."

"뭐야, 아까 삼류라고 한 거 아직도 삐져있는거예요 지금?"

"누,누가 삐졌다고 했습니까?"

"맞네. 하하하!"

두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자 저 멀리 동쪽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럼 이만 출발합시다. 충분히 쉰 것 같으니."


 "잠깐, 아침은 안 먹어요?"
 

 둘은 다시 짐을 챙겨들고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 순간부터 로돈은 레아나를 더 이상 어색해하지 않았다.
 


 ---


"반갑습니다. 호드의 사절단이여. 현자 하늘땅이라 합니다. 족장님께서는 잠시 부재중이시라 제가 잠시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로돈과 레아나는 아침 일찍 타운카르 마을에 도착했다. 그들이 온다는 소식을 먼저 접한 하늘땅이 그들을 반겼다.

"태양길잡이 로돈이라 합니다. 이쪽은 혈기사 레아나라고 하고요."

"반가워요."

"레아나, 시간이 좀 걸릴듯 하니 여관에 먼저 가서 방 좀 2개 잡아서 쉬고 계십쇼."

"아 진짜요? 그럼 그렇게 하죠!"

레아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마을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로돈은 하늘땅의 안내를 받으며 천막으로 들어갔다. 둘은 작은 원탁에 마주보며 앉았다.

"우리 부족은 호드에게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덕분에 죽은 자들에게서 저항할 능력을 갖추고 다시 재건할 기회를 얻었으니까요."

"과찬이십니다. 부족민들의 열정과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인 것이죠."

하늘땅은 차를 내오면서 로돈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럼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로돈은 짐가방 속에서 계약서 묶음을 꺼냈다.

"몇 년 전에 호드 측에서 찾아온 용사님들 덕택에 타운카 대족장께서 무사히 귀환하실 수 있었고 그 덕택에 저희 호드에 가입하실 수 있었죠. 그리고 그 가입 계약이 며칠전에 만료가 되서 다시 재계약을 하러 온겁니다."

"그거야 당연히 연장을 해야죠. 어디다 서명을 하면 되는겁니까?"

"잠깐."

하늘땅은 펜을 잡고 서명 기입란을 찾다 로돈이 잠시 그의 손을 잡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현재 저희 호드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적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얼라이언스들과 말이죠. 때문에 한 명의 전사, 한 자루의 창, 한 발의 포탄, 한 끼의 식사도 매우 간절한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로돈은 진지한 얼굴로 계약서를 손바닥으로 덮었다.

"그리고 이 계약서에는 지난번 계약과 동일한 내용에 호드를 위해 상당량의 물자를 보급하겠다는 조항이 붙어있습니다."

"그렇군요..."

"아, 오해는 하지 말아주십쇼. 물론 보급 조항은 저와 합의 하에 취소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 저희 호드가 패배하게 된다면, 타운카르 마을의 부족민들의 안전 보장이 매우 힘들어지게 됩니다."

"흐음..."

하늘땅은 말 없이 계약서를 들고 조항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로돈의 말은 사실이었다. 취소를 할 수 있다는 것 까지. 하지만 하늘땅은 굳은 결심을 한 듯 계약서를 내려놓았다.

"태양길잡이시여, 저희 부족민은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죽은 자들이 나타나 저희의 터전을 위협하기 전까지. 그들과 싸우면 죽을 것이라는 걸 너무 잘 알기에 그들에게 맞서려는 다른 이들을 이해하지 못했죠. 허나 호드의 용사님들이 가르쳐주었습니다. 맞서지 않으면, 싸우지 않으면 그저 뺏기고 도망칠 뿐이라고. 그러니 제가 어떤 선택을 할 것 같습니까?"

하늘땅은 망설임 없이 서명 기입란에 싸인을 했다.

"저희는 이미 한 번 호드를 위하여 피의 맹세를 올린 바, 그러니 모든 것을 헌신하겠습니다. 호드를 위하여."

"호드를 위하여. 형제여."

로돈은 착잡한 심정을 걷고 미소를 보였다.

"그럼 먼 길을 오셨는데 오늘 하루는 여기서 묵고 가시는겁니까?"

"아,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줄드락에 저희의 구조를 기다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곧 출발을..."

"줄드락이요?"

줄드락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갑자기 하늘땅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설마 그 곳으로 가시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 이런... 이런 말을 하게 되서 유감입니다만, 구조를 기다린다는 이들은 이미... 아무도 살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게 무슨...?"

"어느샌가 줄드락 전체에 갑자기 알 수 없는 안개가 끼기 시작하더니, 그 안개 속으로 들어간 이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죽었다고 생각할 수 밖엔..."

"안개라뇨? 줄드락이 넓은 지역은 아닌지라 안개가 자욱해도 웬만큼은 나올 수 있잖습니까?"

"저희 부족민 중 하나가 그리 믿고 그곳에 들어갔습니다만, 여전히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안개가 끼기 시작한게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혹시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흐음...대략 한 달 전 쯤이었을겁니다."

로돈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한 달이라면 귀환 명령을 전하는 전령과 얼라이언스의 모험가들이 실종된 시기와 겹쳤다. 즉, 안개가 원인은 확실했지만... 그것만으로 납득을 하긴 힘들었다. 안개가 특정 한 지역에 가득히 껴 있고 그 지역의 특성을 무시할 정도로 방향 감각을 없앤 수준이라면 마법으로 형성되었다고 볼 수 밖에 없는데, 마법으로 만든 안개는 제 아무리 오래 가봤자 3일이 고작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은빛십자군 대원들 전체가 한 달 가까이 어떤 외부 물자도 받지 못하고 고립된 상태였다면...

"...그럼 정말 전부 죽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군요."

로돈은 좌절 가득한 표정을 감추려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늘땅은 그의 어깨에 손을 갖다댔다.

"당신 탓이 아닙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요."

로돈은 한 숨을 길게 한번 뱉었다. 그리고 좌절 가득한 표정을 걷어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후우...압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늦더라도 줄드락으로는 가야겠습니다. 적어도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안개의 정체는 무엇인지. 그것만이라도 밝혀내서 죽어간 영혼들을 위로해야겠지요."

"그대 뜻이 그렇다면... 그럼 그리 급하게 갈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괜한 조급함은 일을 그르치기 마련이니 잠시만이라도 편히 쉬다가시길."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로돈과 하늘땅은 서로 허리를 숙여서 인사를 했다.

로돈은 그날 간만에 개운하게 씻고 미룬 잠을 자고 일어나니 늦은 오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죽은 대원들을 생각하니 잠깐의 편안함은 곧 괴로운 감정으로 변해버렸다.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

그저 후회밖에 할 수 없어서 더 괴롭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로돈은 담요 위에 누워서 천장만 멍하니 바라보다 누군가 천막 밖에서 그를 불렀다.

"로돈? 안에 있어요?"

레아나였다. 입안에 비스킷을 우물거리고 한 손에는 비스킷 봉투를 들고 있었다.

"여기 족장님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어제께까지 가장 빨리 움직여야 한다고 재촉하던 자가 가장 의욕 없이 늘어져있네요 지금."

레아나는 비스킷 봉투를 로돈 쪽으로 내밀었다. 로돈은 자리에서 일어나 봉투에 손을 뻗었다.

"누가 의욕 없다고 했습니까?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을 뿐 입니다. 곧 출발해야지요. 줄드락으로."

"가서 뭘 할 수 있긴 해요? 우리도 실종될 지 모르는데."

"그렇다고 이제 와서 돌아가면 대영주 님께 뭐라 변명을 합니까? 실종될까봐 무서워서 시체 수습도 못했다고 해야합니까? 일단 그 곳으로 가면 사건의 진상이라도 파악할 수 있겠죠."

"어련하시겠어요."

레아나는 살짝 웃으면서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얼른 준비하고 나오세요. 마침 하늘땅 님이 와이번을 2마리 빌려드린다고 했거든요. 늦어도 해 지기 전까진 회색 구릉지를 지나야 할 거 아니예요?"

"알겠습니다."

둘이 대화하는 동안 레아나의 손은 쉴 새 없이 봉투와 입 사이를 돌아다녔다. 로돈이 그걸 지적하자 화들짝 놀라며 되려 역정을 냈다.

"근데 엄청 드십니다?"

"시, 시끄러워요! 말했잖아요. 안 먹으면 버틸 수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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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시간 뒤, 모든 준비를 마친 로돈과 레아나는 그들을 마중하러 나온 타운카르 주민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럼 하늘땅 님, 짧은 시간이었지만 감사했습니다. 언젠가 다시 뵙도록 하죠."

"별말씀을."

레아나는 이미 와이번 위에 올라탔고 다른 한 마리에 로돈이 올라타려는데 갑자기 부족민 중 하나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잠시만!"

로돈이 갑자기 와이번에 타다 말고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 입니까?"

"혹시 작은 녹색 친구도 호드 친구입니까?"

"작은 녹색 친구...?"

정황상 고블린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습니다. 고블린도 호드에 소속해있는 친구죠."

"얼마전에 그 작은 녹색 친구가 고룡쉼터 사원으로 간다고 저한테 설레발을 치고 길을 떠났는데, 아무래도 걱정이 되서 말입니다. 가는 길도 험하고 위험한 괴물들도 많은데 잘 도착했는지 확인 좀 해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그 정도야."

로돈은 약속을 받고 그제야 와이번 위에 올라탔다. 와이번은 날개를 한번 쭉 펴더니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와이번은 빠른 속도로 창공을 가르면서 날았다.

"아 상쾌하다! 확실히 걷는 것보다 훨씬 낫지 않아요?"

레아나는 기분이 좋은 듯 로돈 쪽으로 소리쳤다.

"거 꽉 잡으세요! 자칫하다 떨어지면 어쩝니까?"

로돈의 잔소리는 레아나 쪽으로 닿질 않았다. 레아나는 기분이 좋은 듯 계속 와이번에게 박차를 가했다.

"이야하! 달려라 달려!"

정신 없이 날아가는 와이번을 타고 둘은 용의 안식처의 고룡쉼터 사원에 도착했다. 막상 도착하고 나니 레아나의 상태가 좋지 못했다.

"우웨엑...웨엑...!"

"그러길래 무리하지 마셨어야죠. 비스킷 먹은 거 그렇게 다 토하잖습니까."

"시, 시끄럽... 우웩..."

"암튼 좀 쉬십쇼. 전 여기 사원 관리자 분을 좀 뵙고 오겠습니다."

레아나가 기둥에 대고 계속 구토를 하는 동안 로돈은 사원의 고룡 사제를 만났다.

"고블린? 그러고보니 황천빛 사원의 대사제 측에서 오기로 한 전령이 고블린이라 알고 있네만 아직 도착하지 않았네."

"그렇습니까? 하긴, 타운카르 마을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려면 시간이 좀 걸리기 마련이니..."

"무슨 일 있는가?"

"아, 저희는 타운카르 마을에서 오는 길인데 마을 주민 중 한 분이 이 곳으로 올 예정인 고블린이 걱정된다길래 확인 차 들렀습니다."

"그렇군. 알겠네. 정 늦어진다 싶으면 우리 측에서 찾을터이니 자네들은 가던 길 가게나."

"알겠습니다."

고룡 사제와 헤어지고 로돈은 다시 와이번을 주차해놓은 곳으로 갔다. 갔더니 레아나가 수척한 얼굴로 기둥 밑에 앉아서 헥헥거리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하... 말 시키지마요."

"근데 어떡하죠? 저희 이제 바로 출발해야하는데."

"네...?!"

레아나는 심히 당황스럽다는 얼굴이었다. 로돈은 가방에서 주섬주섬 지도를 꺼내어 펼쳤다.

"원래 동선을 따르자면 이 쪽의 회색 구릉지로 가서 드락타론 성채 쪽을 거쳐 가야하지만 시간도 아끼고 레아나 씨 상태도 좋지 않으니 아예 줄드락 쪽으로 직진하는게 더 좋을 듯 싶습니다."

레아나가 떨리는 손으로 지도에 손가락을 그었다.

"아니... 진작 이쪽으로... 가는게... 낫잖아요... 왜 굳이..."

"와이번들도 쉬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슨 하늘 골렘 타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여기 용의 안식처와 줄드락의 경계는 산맥이 높아서 와이번들도 높게 날아야하는데 이게 와이번들한테 무리가 꽤 심하다는거죠.

"으어억..."

"암튼 출발합시다. 와이번에 타세요."

"싫어... 싫다구... 안 탈거야..."

레아나가 안 타려고 뻐기자 로돈은 그녀를 강제로 기둥에서 떼 놓아 와이번 위에 앉혔다. 레아나는 저항할 힘도 없이 그대로 와이번의 등짝에 엎드렸다.

와이번은 다시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레아나는 아까처럼 즐거워 하는 기색 없이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와이번 등에 얹혀갔다. 로돈은 그 모습을 안쓰럽게 여길뿐이었다.

지도에 의하면 줄드락 쪽 경계 산맥에 거의 다 도착한 상태였다. 로돈은 산맥을 넘으려 와이번의 고삐를 쥐었는데 갑자기 눈 앞에서 빛이 솟아올라와 로돈의 앞에서 작은 폭발을 일으키길래 급히 와이번을 멈춰세웠다.

"뭐지?"

로돈은 빛을 쏘아올린 쪽을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동굴 같아보이는 구멍이 보였다.

"레아나, 방금 보셨습니까? 빛이..."

그녀는 와이번의 등에 엎드린 채로 여전히 반응할 한 가닥의 기운도 남지 않아보였다. 로돈은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와이번을 동굴 쪽으로 하강시켰다. 동굴에 다다르고 로돈은 와이번에서 내려 동굴 안을 살펴보았다. 안 쪽에 무언가 형체가 웅크리고 있었다.

"거기 누구 계십니까?"

로돈의 목소리가 동굴 전체에 울리자 형체가 갑자기 로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바로 일어나서 달려오기 시작했다. 굉장히 헐레벌떡 달려오는 형체는 다름 아닌 고블린 여사제였다.

"아, 이럴수가! 그렇게 갖다 바친 공물들이 아깝지 않았구나!"

고블린은 그대로 로돈의 품에 안겼다. 본래 흰색이었던 사제복은 흙먼지로 더럽혀져 있었다.

"정말 감사해요. 친구! 이대로 고립되서 모아둔 돈들 쓰지도 못하고 죽는 줄 알았어요!"

고블린 사제. 정황상 이 친구가 아마 타운카르 마을에서 고룡쉼터 사원으로 가려던 고블린인게 확실했다.

"저, 여기 오기 전에 고룡쉼터 사원에 잠시 들렀습니다만 거기로 가던 길이셨습니까?"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로돈과 고블린은 동굴에서 그간 있었던 일을 나누었다. 고블린의 이름은 레자. 황천빛 사원에서 공허의 힘을 억제하는 방법을 모색하던 도중, 대사제와의 회의를 통해 용의 영혼의 힘을 빌리면 어떨까 하는 의견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청동용군단의 수장인 노즈도르무에게 대사제의 간청을 전하러 가던 도중 달라란에서 순간이동 사고가 일어나 타운카르 마을로 떨어졌고, 이어 어떻게 걸어서 오다가 어디서 잘못 들렀는지 산맥을 올라가기 시작해 결국 여기 이 곳에 고립되어 구조 신호로 빛을 쏘아올리다 로돈이 그걸 발견하고 온 것이라고 한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길을 잘못 들으면 이 곳으로 오게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있다. 그냥 보이는 길만 쭉 걸어가도 고룡쉼터 사원에 도착할텐데...

"암튼 이제라도 이렇게 만나게 되서 다행입니다. 그 타운카 친구가 당신이 많이 걱정된다고 했거든요."

"그러게요! 이제 고룡쉼터 사원으로 갈 수 있어요."

"그치만..."

로돈은 고민에 빠졌다. 레자를 고룡쉼터 사원으로 데려다주고 다시 오기엔 시간이 너무 낭비되는 것 같고, 그렇다고 레자를 데리고 줄드락으로 들어가자니 방금까지 죽을 날만 기다리던 자에게 다시 사지로 가자고 하는 꼴이었다.

고심 끝에 로돈은 레자의 결정에 맡기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사제님, 저희는 지금 가면 다신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곳에 가려 합니다. 그 곳에서 불쌍하게 죽어간 대원들의 시체를 수습하고 사태의 원인을 파악하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죠. 당장 한 시가 급한 와중이라 당신을 고룡쉼터 사원으로 데려다드리기는 매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대로 혼자 가실 수 있다면 말리지 않겠으나, 저희와 동행을 하시겠다면 태양길잡이의 명예를 걸고 지켜드리겠습니다. 어쩌시겠습니까?"

"예? 흐음..."

레자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입을 열었다.

"혹시 그쪽에서 수습해야되는 시체의 상태가 온전하다면 제가 부활 주문을 걸어드릴 수 있어요. 제가 도움이 아예 안될 것 같지는 않네요. 그래도 혼자 고룡쉼터 사원으로 가는 것보단 나을 것 같으니..."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로돈은 레아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그럼 가죠! 제 와이번에 타시면 됩니다."

레자는 '대신 1명당 10골드를 받겠다' 라는 말을 이어붙이기도 전에 로돈에게 이끌려 와이번에 올라탔다.

"저기, 엎드려 계신 분은?"

 "아, 레아나라고 합니다. 혈기사 소속이죠. 지금 속이 좀 안좋아서 저러는거니 걱정하지는 마세요. 자. 출발!"

 

 "우와악!" 

 

 로돈은 와이번들에게 박차를 가했다. 와이번은 하늘 높이 날아올라 용의 안식처와 줄드락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줄드락은 그 밑이 전혀 보이지 않는 마치 안개 바다였다. 가능하면 하늘 위에서 모든 걸 확인하길 바랬지만 그럴 수 없다는걸 잘 알기에 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 와이번 두 마리는 타우렌과 고블린 그리고 블러드 엘프를 태우고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정말 안개 앞에서는 한 치 앞 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욱했다. 독한 냄새까지 나는 듯했다.

이어 땅에 도착하자, 로돈은 와이번들을 전부 다시 하늘 위로 올려보냈다.

"수고했다. 이제 너희의 보금자리로 돌아가렴."

"으어억, 죽는 줄 알았네..."

레아나는 여전히 속이 좋지 않은 듯했다.

"아까 그렇게 게워내고 또 비워낼 게 있습니까?"

"시끄러워요. 남 일이라고 그렇게 막말하면 되는 줄 알아요?"

"그나저나 진짜 한 치 앞도 안 보여요. 여기서 그 친구분들을 어떻게 찾죠?"

"일단 가죠."

셋은 안개 속을 그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땅의 흙은 축축했고 가끔 보이는 돌바닥에는 이끼가 껴 있었다. 몇 시간을 걷고 걷다 지루했는지 레아나가 말을 걸어왔다.

"그러니까 로돈. 당신이 추측한대로라면 리치 왕의 지배를 받지 않는 언데드가 이 지역을 안개로 장악하고 있다는 거죠?"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유독 이 지역만 안개로 둘러싸이고, 특히나 여길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죠. 분명 어떤 사악한 마법사의 농간 일 것 같습니다."

로돈과 레아나가 말을 이어가는 동안 레자는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대신 표정을 한 가득 찡그리고 있었다.

'아, 괜히 따라온다고 했어... 앞으로 얼마나 걸어야 하는거지? 그냥 온전한 시체 살려주고 돈 좀 받아볼까 해서 따라온건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고룡쉼터 사원으로 갈걸... 여기 있는게 더 위험한게 아닐까? 여기 벗어날 수 있긴 한거야? 어쩌면 돌아가지도 못하고 여기 시체처럼...'

"사제 님, 잘 따라오고 계십니까?"

"아, 예! 예, 물론입죠! 지금 가고 있습니다."

"힘들어도 조금만 참으십쇼. 그래도 걸은 게 있으니 지금쯤이면 뭐라도 발견..."

'타앙!'

순간적으로 무언가가 로돈의 왼쪽 어깨를 강하게 치고 지나갔다. 로돈은 갑자기 오는 통증에 급히 왼쪽 어깨를 감쌌다.

"로돈 씨! 괜찮아요?"

"끄윽, 괜찮습니다. 갑옷 덕분에 크게 다치진 않았어요."

"거기 누구냐!"

레아나는 등의 도검을 뽑아들고 전방에 소리쳤다. 그러자 저 멀리 안개 속에서 무언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이어 안개 속에서 모습을 보인 것은 다름아닌 은빛십자군 전사 2명이었다. 십자군 전사들은 처음에 그들을 보고 바로 경계를 올렸다. 한 명은 망치와 방패를, 다른 한 명은 총을 들고 있었다.

"타, 타우렌? 블러드 엘프까지?"

"뒤에 고블린도 있어!"

로돈은 순간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은빛십자군들이 살아있다는 것에 반가워 당장이라도 저들을 안아주고 싶었지만 저들의 경계와 레아나의 반응, 그리고 자신의 왼쪽 어깨의 부상 때문에 당장 움직이는 게 힘들었다. 그래도 로돈은 안간힘을 써서 외쳤다.

"잠깐만요, 저희는 여기 줄드락에 파견 나온 병사들을 구조하라는 대영주 님의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경계를 풀어주십시오!"

로돈은 오른손으로는 어깨를 감싸고 왼손으로는 레아나를 막아선 채로 소리쳤다. 둘은 머뭇거리다가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는가 싶더니 이내 총과 칼을 거두고 한 명은 로돈의 곁에 와서 그를 부축했다.

"이거, 죄송하게 됬습니다. 경계심에 쏜 총알이 하필 구세주에게 가다니."

"죄송하다면 다예요? 총알이 당신네들 구세주 머리로 날아갔으면 어쩔 뻔했나요?"

레아나는 심술맞게 굴었지만 로돈은 되려 침착했다.

"아닙니다. 크게 다치진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를 따라오세요. 대장님께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가는 길에 레자는 로돈을 치료했다. 그리고는 나중에 도착해서는 돈을 요구했지만.



로돈과 레아나와 레자, 그리고 은빛십자군 둘은 이내 십자군 전진기지에 도착했다. 사실 전대 리치 왕이 다스리고 드라카리 트롤들이 활개를 칠 때의 전진기지였지, 지금은 그저 잔존 스컬지들을 처리하기 위해 남겨진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대략 10여 명의 십자군 병사들이 진이 다 빠진 상태로 좀비처럼 안개 속을 거닐고 있었다. 얼굴도 수척하고 걸음걸이도 느려터진게 당장 스컬지가 쳐들어온다고 해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할 듯 했다.

 "대영주 님 께서도 그렇게 걱정하고 계시다니. 이거, 인기가 너무 많아도 문제로군."

로돈은 그 곳의 대장인 성전사 맥켈라르를 만나자 당장 반가움보다는 착잡한 심정을 밝혔다.

"전부 죽었을거라 생각한게 틀려서 다행이지만, 그래도 상태가 꽤 심각하군요."

"우리가 햇빛을 받지 못한게 벌써 1달이 넘었소. 웬만한 놈들은 물론이고 좀 버틸만 하다는 녀석들 조차 미쳐가는 실정이니..."

"이 안개를 빠져나가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가요?"

레아나가 질문을 던졌다.

"절대 간단한 일이 아니오. 일단 안개 때문에 주변 지형을 파악하는게 힘들고, 스컬지들은 여전히 남아있어서 기습을 당하기도 쉽지. 게다가 깊이 가면 갈 수록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확률 마저 희박해진다오. 길을 찾아 나서겠다고 떠난 병사들만 벌써 반이 넘었고, 그들 전부 다시 여기로 돌아오지 않았소."

"앞서 은빛 성기사단에서 전령와 얼라이언스 측에서 먼저 파견을 보냈는데 이 곳에 도달하긴 했습니까?"

"아니, 안개가 드리운 이후로 여기까지 온 건 당신네들이 처음이오."

"역시 보통 안개가 아닌 건 확실하군요."

로돈은 가방을 벗어서 땅바닥에 턱! 하고 내려놓은 다음 소매를 걷었다. 레자의 치유를 받은게 효과가 있었는지 왼팔을 가뿐히 빙빙 돌렸다.

"암튼, 당장 급한 일부터 해결하도록 합시다. 레아나, 좀 도와주세요."

로돈은 가방에서 각종 조리도구와 식자재를 꺼냈다. 식자재 중에선 레아나와 같이 먹었던 매머드 고기까지 잔뜩 있었다. 레아나가 불을 지피는 동안 로돈은 요리 준비를 하고 있었고 레자는 지친 병사들을 치유하고 돈을 잔뜩 걷어들였다.

"로돈, 나무가 축축해서 불이 안 붙어요!"

"어떻게든 해보세요!"

레아나가 부싯돌을 계속 부딪히다 화가 나서 바닥에 냅다 던져버리고 이번에는 도검의 칼등을 나무토막 위에 대고 열나게 비벼대기 시작했다. 레아나가 안간힘을 짜내고 짜내어 계속 비비니 연기가 피어올랐고 이내 불이 올라왔다. 이어 로돈이 커다란 냄비 안에 각종 재료를 잔뜩 넣은 다음 지쳐 쓰러져있는 레아나에게 다가왔다.

"거 봐요. 잘 붙잖습니까?"

"허억, 허억... 그럼 다음부터 당신이 하던가요!"

어쨌든 곧이어 수프가 완성되자 고소한 냄새가 안개와 섞여 퍼지기 시작했고, 배식은 레자가 담당했다.

"그릇 들고 줄 서세요! 나눠주는 건 특별히 공짜니까!"

방금까지 좀비처럼 걷던 병사들이 각자 그릇을 챙기고 헐레벌떡 레아나의 앞에 줄을 섰다. 한 명 한 명 전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그릇에 수프를 가득히 받아갔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덕분에 살 것 같습니다!"

병사들이 전부 받고 이어 마지막으로 맥켈라르도 수프를 받았다. 그가 수프를 한 숟갈 퍼서 입 안에 넣자 감격과 탄식이 섞인 말들이 튀어나왔다.

"이야, 음식다운 음식을 먹은 게 정말 며칠만인지 모르겠군. 보급이 원천 차단된 상태라 있는 식량을 줄이다 줄이다 결국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지금이라도 드시니 다행입니다. 음식은 아직 많이 있..."

로돈은 갑자기 말을 하다 말고 뭔가 등짝이 싸해지는 걸 느끼더니 곧바로 레아나에게 소리쳤다.

"레아나! 수프에 손대지 마십시오!"

"에?"

레아나는 배식을 정리하고 이제 막 대형 냄비에 남은 수프를 퍼서 입에 갖다 댈 참이었다. 로돈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는 듯이 레아나의 숟가락을 뺏었다.

"이번 한번만 좀 참으면 안되겠습니까? 여기 병사들은 한 달 가까이 굶고 지냈다는 걸 아시잖습니까."

"아니, 아까 그렇게 고생했는데 저는 한 끼도 안 준다고요? 여기 밥만 주러 온 게 아니잖아요. 숟가락 이리 돌려줘요!"

로돈은 단호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머리위로 쭉 올렸다. 레아나는 그걸 잡겠다고 로돈에게 폴짝폴짝 달려들었고, 레자와 맥켈라르가 보기엔 그 모습은 흡사 고양이 같았다.

"아 진짜 쪼잔하게 구네! 많이 안 먹는다고요! 나도 공평하게 수프 한 그릇 먹겠다는데 왜 말리는건데요!"

"그쪽이 많이 안 먹는 정도를 셋으로 나누면 여기 병사들의 삼시세끼가 되는 걸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좀 만 참으시라구요!"

"아 그냥 다 같이 굶어죽겠다고요? 그거 좋네요! 그냥 묻힐 자리만 바뀌는거지, 어차피 굶어 죽으나 안개 속에서 헤매다 죽으나 다 똑같으니까요! 흥!"

레아나는 그대로 땅바닥에 대 자로 뻗었다. 숟가락을 돌려주고 수프를 먹게 해주기 전까진 절대 움직이지 않을거라는 굳은 의지를 보여주는 듯 했다. 로돈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아, 어쩔 수 없군요."

로돈은 호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들었다.

"육포와 비스킷입니다. 아까 타운카르 마을에서 챙겨온건데, 이걸로 어떻게..."

레아나는 빛의 속도로 자리에서 일어나 로돈이 들고 있던 봉투를 낚아챘다.

"감사해요~!"

그리고 현란한 손놀림으로 육포와 비스킷을 입 안에 넣었다. 로돈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이 그대로 맥켈라르와 레자에게 돌아갔다.

"저 친구, 내가 아는 엘프들이랑 좀 다르구만?"

"그러게요. 그렇게 고상하던 블러드 엘프가 아니예요."

둘은 입을 모아 로돈에게 말했다. 로돈도 격하게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저도 저런 블러드 엘프는 살아 생전 처음 만났습니다. 어찌 그렇게 식탐이 많고 고집이 쎈지..."

로돈은 자리에 앉자 레아나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레아나는 여전히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래도 저런 별난 엘프 하나쯤 있는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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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비추지 않는 곳의 밤은 빠르게 찾아왔다. 오랜만에 포식한 병사들은 천막으로 돌아가 잠을 청했고 맥켈라르도 예외는 아니었다. 간단하게 배를 채웠을 뿐인 로돈 일행은 기지 중앙에 따로 모였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안개 속을 탐사하도록 합시다."

"괜찮겠어요? 이 곳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수도 있잖아요."

"뭐라도 해야죠. 어차피 죽을거라면 아무것도 안하고 죽는 것보다 낫지 않습니까?"

"하긴, 그건 그래요."

로돈과 레아나는 무덤덤하게 대화하고 있었지만 레자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아, 어쩌지...? 난 남겠다고 해야하나? 그럼 따라서 나온 의미가 없잖아... 너무 치사하게 보려나? 죽기는 싫은데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도 없고... 어쩌지? 어떻게 하면 좋지...?"

"사제 님은 위험하니 돌아가계셔도 상관 없습니다. 게다가 대사제 님으로부터 특명을 받으셨잖습니까. 제일 목숨을 보전하셔야죠."

레자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왠지 남겠다고 했다간 지금 매섭게 노려보고 있는 레아나가 자기한테 무슨 짓을 할 지가 너무 두려웠다. 결국 레자는 마음에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무, 무슨 소립니까! 같이 빛을 섬기는 입장으로써! 황천빛 사원의 사제로써! 저 또한 당신들과 같이 할 의무가 있습니다!"

"으흠, 정 그러시다면야..."

"뭐, 좋아요. 혼자 죽는 것 보다야 길동무 둘 붙어가는 것도 나쁘진 않으니까. 안 그래요?"

"히익...!"

레자는 한 껏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레아나가 그녀를 놀리는 재미가 좀 붙은 것 같았다.

"그럼 출발하죠."

셋은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이른 밤에 출발해 늦은 새벽이 지나가도록 걸어서 축축하고 불길한 흙이 덮힌 땅으로 가게 되었다. 로돈은 지도를 꺼내서 걸어온 방향과 거리를 대충 측정해서 위치를 파악했다.

"여기가 대략... '스림의 최후'라는 땅이겠군요."

"역시 새벽 밤에다 안개 때문에 주변이 보이질 않네요."

"여기서 좀 쉬면 안될까요...? 이 상태에서 더 멀리 갔다간 위험할 것 같은데..."

레자가 지치고 겁을 먹은 듯한 얼굴로 로돈에게 간청했다. 확실히 로돈도 더 움직이면 안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야영을 하도록 하죠."

레아나는 아까 저녁거리를 만들고 남은 불씨를 써서 모닥불을 피웠다.

"그걸 용케 살리셨습니다?"

"그렇게 고생했는데 쉽게 죽게 냅두면 허무하잖아요. 수고 좀 했죠."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앉은 셋 중에서 아직 팔팔한 레아나와 달리 로돈과 레자는 조금 많이 피곤한 듯 했다. 둘의 상태를 둘러본 레아나는 자진해서 나섰다.

"흐음, 이번에는 제가 불침번을 서도록 할게요. 두 분의 상태가 말이 아닌 것 같으니."

"그래주시겠습니까?"

"고마워요. 레아나 양."

둘은 감사 인사를 하고 레아나를 남겨둔 채 모닥불을 앞에 두고 드러 누워 잠에 빠져들었다. 레아나는 둘이 잠든 걸 확인하자 무릎을 모으고 앉아서 멍하니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타닥, 타닥하는 소리에 맞춰 나무들이 재가 되어 가라앉는 걸 계속 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집중이 흐트러졌다.

"..."

처음에는 귀를 가볍게 건드는 바람소리 정도로 느껴졌다.

"......"

그 바람 소리는 아주 조금씩 선명해지면서 레아나의 귀에 도착했다.

"...리 와."

이어서 바람 소리는, 그녀가 가장 간절하게 듣고 싶어하는 목소리가 되어버렸다.

"...이리 와."

"엄...마?"

"이리 와... 이리오렴..."

레아나는 아무런 기척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언가에 홀린 듯 소리의 근원지로 발을 옮겼다. 그녀의 풀린 두 눈에 비친 건 끝을 알 수 없는 안개 속 어둠이 아닌 따스한 햇살이 비추는 고향 쿠엘탈라스의 들판이었고, 그 들판 한 가운데에 서 있는 자는 그녀의 어머니였다.

"엄마...!"

그녀는 간절함과 그리움에 북받친 표정으로 손을 뻗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다가가면 어머니의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터억!'

"꺄아악!"

돌부리였다. 레아나는 평화로운 들판에 설마 존재할까 싶었던 큼지막한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그대로 축축한 땅바닥에 코를 박고 넘어졌다.

"끄응, 아이고 머리야..."

그제야 정신을 차린 레아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을 알 수 없는 안개 속 한가운데였다.

"여긴...? 로돈? 사제 님?"

뭔가에 홀려 그들과 멀리 떨어졌다는 걸 깨달은 레아나는 급하게 경계 태세로 들어가려 등의 도검을 붙잡았다.

"키에엑!"

"치잇!"

뒤였다. 구울이 먼저 등 뒤를 덮치기 전에 재빨리 뒤로 돌아 큰 사선베기로 구울을 반으로 갈랐다. 간신히 위기는 모면했지만, 사방에서 들려오는 구울의 울음소리 때문에 앞으로가 문제였다.

"키에아악..."

"크에에에..."

레아나는 빠르게 눈알을 굴려서 소리가 나는 방향을 둘러보았다.

"하나, 둘, 넷, 여섯, 열... 이거 몇 마리야 대체...!"

그녀는 결사의 각오로 도검을 부여잡았다. 눈을 감고 다신 하지 않을 줄 알았던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빛이여, 전 이미 혈기사로써 그대에 대한 믿음을 저버렸습니다. 하지만..."

"캬아악!"

레아나는 구울이 달려올때마다 하나씩 침착하게 베어넘겼다.

"그대가 진정 자비로운 존재라면, 부디 제게 저들을 심판할 자격을 부여하소서!"

기도의 외침을 끝마치자 레아나의 도검에 빛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제야 레아나는 본격적으로 안개 속 구울들에게 달려들었다.

"오너라 이 망할 것들아!!"

"케아아아악!"

짧고 긴박감 넘치는 전투였다. 사방에 구울 시체가 레아나의 도검에 썰려 바닥에 쌓였다. 아직도 레아나를 노리는 구울들은 한참 남았지만, 본능적으로 레아나가 위험하다는 걸 알아챘는지 아까보단 섣불리 다가오지 못했다.

'이럴게 아니라... 힘이 더 빠지기 전에 도망쳐야 되는데 길을 알 수 없으니... 운 좋게 찾아간다고 해도 가는 길에 이 놈들이 더 있을 수도 있고 도망치다 쫒길 수도...'

뭘 생각하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나마 최선의 가능성이라면 자신이 없는 걸 로돈이 발견해서 찾으러 와주는 것 밖에 없었지만, 지금쯤 깨어났는지 아닌지도 불투명한 상태였다.

"꺄아아아아아악!"

순간 어느 방향에서 소름끼치는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레아나가 깜짝 놀라서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녀가 바라본 안개 속에서 자신의 크기의 약 1.5배 정도로 거대한 밴시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밴시는 아까 비명을 지른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레아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알겠다. 네가 이 안개의 원흉이구나. 그치?"

밴시가 레아나의 말을 알아 듣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잠시동안 레아나와 밴시 사이에서 묘한 긴장감이 감돌 뿐이었다. 그 사이에 레아나는 머릿속에서 빠르게 계산을 하고 있었다.

'이 밴시를 처치할 수 있다면... 이 안개에서 어떻게든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먼저 공격해야하나? 밴시는 실체가 없으니 그냥 휘둘러봤자 의미가 없을텐데... 어쩌면...'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레아나는 고민 끝에 결심을 옮기려 했지만, 정말 타이밍이 안 좋게도 선공권은 밴시에게로 넘어갔다. 밴시의 비명이 큰 파장을 일으키며 레아나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파장은 이어 주변의 안개까지 걷히게 만들었지만 그건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주변의 안개가 걷히니 한참 처치했다 믿었던 구울들은 레아나를 포위하고 있는 구울들의 반의 반도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숫자였다.

레아나는 허탈함에 다리가 후들거렸고, 비명 소리에 귀까지 울려서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최대한 정신을 다잡으려는 와중에도 그녀의 시선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케에엑!"

구울이 한 마리 달려오자 침착하고 확실히 베었던 아까와 달리 겨우겨우 칼을 휘둘러서 베어넘기는 수준이었다. 그러자 방심한 탓에 측면에 오는 공격을 허용하고말았다.

"꺄악!"

레아나는 그대로 넘어졌다. 넘어지면서 하필 가방 끈이 찢어져 안의 내용물들이 바닥에 쏟아지고 말았다.

"아, 안돼!"

그녀는 필사적으로 내용물 쪽에 손을 뻗었다. 그녀의 눈 앞에 지켜야 할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오르골 뿐이었다. 레아나는 양손으로 잡던 도검을 오른손에 쥐고 왼손에는 오르골을 꽉 쥐었다.

"이것만큼은 절대...!"

레아나가 지금 위태로운 상태라는 걸 눈치챘는지 구울들의 총공격이 시작했다. 레아나는 정말 필사적으로 그들과 맞섰지만 역시 현저하게 힘이 부칠 수 밖에 없었다. 기어코 그녀는 지금까지 잘 막아오던 구울의 손톱을 옆구리에 내주고 말았다. 고통이 전신을 타고 흘렀다. 레아나는 무릎을 꿇고 칼을 놓은 다음 옆구리에 손을 갖다댔다. 피가 멈추지 않고 뿜어져 나오는게 느껴졌다. 게다가 레아나의 손에는 피 뿐만 아니라 역겨운 구울의 진액까지 섞여있었다.

"허억, 허억..."

점점 숨쉬기마저 힘들어지고 있지만 그럴 수록 더 필사적으로 숨을 내쉬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의지 하나만 붙들고 있었지만, 결국 땅바닥에 엎드리고 말았다. 엎드리면서 왼손에 쥐고 있던 오르골마저 놓쳤다.

"안돼... 엄마..."

의식을 잃기 전 레아나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굴러 떨어진 오르골과 그것을 어떻게든 다시 붙잡으려는 그녀의 손 뿐이었다.

레아나는 결국 눈을 감았고 굴러간 오르골은 바닥에 부딪혀 그 뚜껑이 열려버렸다. 이어 오르골의 음악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모든 걸 지켜보면서도 일체 감정 변화가 없던 밴시가 음악 소리에 두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그리고 그 사이 구울들은 다 죽어가는 레아나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먹어치우려 했다.

밴시는 아까 질렀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커다란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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