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라세 옛날에 썼던 와우 소설입니다

고피
2019-06-23 06:35:12 108 0 0

설정 잘 모르시면 이해 안가는 부분도 있을텐데

그냥 재밌게 봐주세요

군데군데 스포도 있긴 한데 굳이 상관 없을듯...?









안쉬여.

대영주께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일을 해내셨습니다. 전대의 티리온 경에게 파멸의 인도자를 물려받으시고, 군단이란 이길 수 없는 적 앞에 둘로 갈라져던 호드와 얼라이언스를 빛의 이름 아래 하나로 규합하시어 악마들과의 전투에도 선봉장으로써 활약하셨습니다. 누가 감히 그의 위상을 넘볼 수 있겠습니까. 은빛십자군, 구원자, 혈기사, 제가 속해있는 태양길잡이까지. 모든 성기사들 그리고 영웅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깊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군단은 패배했고, 호드와 얼라이언스는 다시 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를 포함한 수 많은 성기사들이 각자의 진영으로 흩어졌지만 대영주 님과 소수는 평화를 위한 노력을 이어가기로 하셨죠. 저 역시 그 분과 뜻을 함께하고 싶었지만, 저는 그대 앞에서 저의 소중한 부족과 동족들을 지키기로 맹세한 몸. 그리고 얼라이언스는 그들을 위협하려 하고 있습니다. 기나긴 고민이 있었지만 전 호드를 위해 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저의 무기는 방패입니다. 그렇기에 더 이상, 누군가를 상처입히는게 아닌 지켜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전쟁은 불가피합니다. 어쩌면, 불타는 군단과의 전투에서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만들지도 모릅니다. 그런 생각이 들때마다 대영주께서 실현하시려는 평화가 더욱 간절해지곤 합니다. 우리 모두가 계속되는 증오와 갈등 앞에 무력해지기에 더욱 간절히 그대 이름을 외칩니다.

안쉬여

전 언젠가 반드시 대영주님께 돌아가 그 분을 보좌하고 싶습니다. 함께 평화를 위한 길을 이어나가고 싶습니다. 여전히 두 진영 사이의 휴전과 동맹은 있을지라도, 종전과 평화는 없을지니.

부디 이런 저를 용서하소서. 서로의 길을 선택하여 걸어가는 모든 이들을 비춰주시고 그 곁에 영광이 함께하길 축복하소서.



위의 로돈의 기도문처럼 많은 성기사들이 각자의 진영으로 흩어졌다. 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오그리마로 떠나려는 마음을 조금 가볍게 하려 적은 기도문이었지만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잘 아는 그였기에, 로돈은 잠시라도 한 눈을 팔지 않고 싶었다. 그는 그가 맡은 후방 보급이라는 임무를 정말 성실하게 완수했다. 칼림도어 전역의 중립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얼라이언스들의 세력을 축소시키고 고블린들의 중장비 보급 계약을 성사시켰으며, 무엇보다 부서진 섬의 높은산 타우렌들이 호드 측에 합류하게 된 것 또한 로돈의 공이 컸다.

이렇게 호드를 위해 그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그였지만 역시 마음 한 구석의 고민은 남아있었다. 지금이라도 전쟁을 멈출 방법은 없을까. 평화를 위한 조금의 노력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의 고민은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깊숙히 박혀 빼지 못할 못처럼 남아있는 미련이었다.

로돈은 코도를 타며 오그리마의 거대한 입구 앞을 지나갔다. 정예 경비병들이 그를 알아보고 경례를 올렸다.

"록타르, 형제여. 수고가 많으시오."

"감사합니다."
 

 짧게 인사를 나누고 대도시 안으로 들어서자 수많은 인력들이 붐비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훈련의 기합소리가 울려퍼지고 장비들을 손질하는 것이 눈에 띄였다. 마치 당장 내일이라도 전쟁이 일어날 것 처럼 험악한 분위기였다. 로돈은 그들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대족장이 바뀌고 나서 분위기가..."

 

  로돈은 수 많은 인력을 헤치고 오그리마 지하의 어둠의 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부터 흑마법사들과 주술사들이 의식을 행하고 있었다. 무슨 의식을 하고 있는 건지는 잘 몰랐지만 일단 최대한 방해가 안되는 한에서 조심히 들어갔다. 확실히 전쟁 분위기라서 그런지 신비로워보이던 정령술도 무언가 강력한 힘을 갈구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들을 뒤로 하고 로돈은 늘 그랬듯이 임시 의뢰소로 가서 받은 임무를 완수하고 새로운 임무를 받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찾아간 의뢰소에서 반가운 얼굴을 보았다.

"데즈코 씨?"

"로돈! 이게 얼마만인가?"

데즈코는 로돈을 알아보고 잽싸게 그의 앞으로 다가가서 악수를 청했다. 로돈은 당연히 반가움에 잽싸게 받았다.

"언제 판다리아에서 돌아오셨습니까?"

"좀 지났지. 갑자기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길래 무슨 상황인지 살펴보려 잠시 들렀네. 군단 과의 전투가 엊그제 같은데 이젠 얼라이언스라니... 솔직히 조금 갑작스럽다네. 아무리 일시적인 동맹이었다지만, 이렇게 쉽게 깨질 줄이야."

"그럼,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로돈은 반가움은 잠시 접고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데즈코는 잠시 말 없이 로돈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살짝 미소를 보였다.

"난 더 이상의 전쟁과 학살에는 관여하고 싶지 않네. 내 일이 바쁜 것도 있지만, 그 일로 인해 느낀 것이 많아서 말이야."

"대영주 님과 같은 소리를 하시는군요."

"당연하지. 곧 대영주 님을 찾아뵈긴 해야겠군."

둘은 그 자리에서 근황과 사담을 이어가다 데즈코가 먼저 자리를 피했다.

"그만 가야겠군. 만날 친구들이 여럿 있어서 말이야. 한창 전쟁 준비중이라면 아포니도 이 곳에 와 있을테니 그녀도 한번 만나야겠지."

"그럼 나중에 여관에서 뵙겠습니다. 한 잔 해야지요."

"알았네, 알았어. 하하하!"

데즈코는 로돈을 향해 손을 흔들고 어둠의 틈 밖으로 향했다. 로돈은 데즈코가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의뢰소로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로돈 씨."

"안녕하십니까."

의뢰소 직원인 여성 트롤이 로돈을 반겼다. 로돈은 그녀에게 임무 보고서를 제출하였고 그녀는 대충 한번 훑어보더니 곧바로 보상금이 담긴 주머니를 내밀었다.

"이번에도 수고하셨어요. 잠시 대기해주시면 의뢰 목록을 챙겨올게요."

"알겠습니다."

직원은 안쪽으로 들어갔고 그 사이 로돈은 주머니의 금액을 확인했다.

"30 골드...수리비로는 조금 부족할 것 같은데."

가뜩이나 이번 임무로 다녀온 곳이 험하기로 소문난 운고로 분화구라 이리저리 구르고 부딪히다보니 판금 갑옷에 흠집이 많이 나서 낡아진 감이 있었다. 그쪽 임시 야영지에서 수리를 받을 수 있었지만 업무를 담당하는 자들이 하필 바가지 귀신이 무더기로 씌여진 고블린이라 적자가 날 것 같아서 오그리마까지 어떻게든 버틴 것이었다. 그런데 기껏 받은 돈은 많이 애매하니... 그저 술값과 숙박비를 뺀 나머지 금액 안에 모든 장비들을 수리할 수 있기를 바라는 수 밖에 없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로돈은 생각을 정리하던 찰나에 그녀가 나왔지만 왜인지 늘 가지고 나오던 의뢰 목록이 아닌 다른 두루마리 두어개를 들고 나왔다.

"저, 의뢰 목록은 어딨습니까?"

"아 그게, 로돈 씨가 자리를 비우신 사이에 은빛 성기사단에서 로돈 씨에게 개인 의뢰를 신청해서요. 혹시나 동명이인인 줄 알고 확인해봤는데 로돈 씨가 맞다고 하네요? 히히히."

그녀는 소름끼치게 웃었다. 로돈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그에게 트롤의 웃음소리는 언제 들어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뭡니까? 그 의뢰라는게."

로돈이 묻자 그녀는 곧바로 가져온 두루마리 하나를 펼쳤다. 두루마리 안에는 노스렌드의 지도가 담겨있었고 그녀는 한 지역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노스렌드의 줄드락이라고 아시죠? 한번 가보셨나 모르겠네. 여긴 과거 저희 종족 사촌쯤 되는 드라카리 트롤들이 세운 나라인데 스컬지들에게 거의 멸망해버린 곳이죠. 물론 리치 왕 사후에 그 영향력은 줄어들었지만 일부 스컬지들이 아직 남아있어서 은빛십자군이 몇 년 전부터 그들을 토벌하러 나간 상태거든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달 전에 귀환 명령을 보냈지만, 전달하러 간 전령이 실종되었어요. 명령도 줄드락에 닿았는지 알 수가 없구요. 그래서 은빛 성기사단이 얼라이언스 측에 먼저 의뢰를 넣었고 진상을 파악하려 인력을 파견했지만 역시 파견한 인력도 아무 소식도 없이 실종당했다고 하네요."

여직원은 안타깝다는 듯이 입술을 내밀고 고개를 양 옆으로 저었다. 로돈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지도의 줄드락 쪽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뭐,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의뢰는 거절해야겠군요. 아무리 과거의 동맹이었다지만 은빛십자군은 얼라이언스들이지 않습니까? 가뜩이나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태에서 적군을 돕는 행동은 상식에서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로돈은 씁쓸한 심정으로 거절 의사를 내비쳤다. 그러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의뢰를 신청하신 고객께서 이걸 보여달라고 하셨어요."

로돈은 두루마리를 받아들고 잠시 살펴보았다. 둘둘 말린 고급 양피지의 가운데에 촛농으로 찍힌 인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그제야 잽싸게 양피지를 펴고 두루마리를 펼쳐 필체를 확인했다. 예감이 적중했다.

"대영주 님?"




태양길잡이 로돈.

자네가 남기고 간 글귀는 잘 봤다네. 그리고 이걸 읽고 있다면 지금 자네의 결심이 바로잡혔다고 믿어도 되는거겠지. 그렇기에 나는 고민이라네. 지금 호드를 위해 싸우는 그대에게 얼라이언스를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행동인지, 아니면 우리 은빛 성기사단의 이기적인 행동인지. 나 역시 한 때 내게 소중한 이들만을 지키고자 했지만, 지금 이 순간 나에겐 살아 숨쉬는 모든 생명을 구원해야 할 의무가 있네. 그렇기에 더욱이 빛 아래 뜻을 같이 했던 자들을 버리고 싶지 않아.

물론 자네 결정을 원망하는 것은 아닐세. 다만 내 곁에서 늘 했던 말이 있었지. 나와 뜻을 같이 하고 싶다고.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한 방패가 되어 더 이상 그 누구도 상처입게 하고 싶지 않다고. 빛 아래 모두가 하나로 뭉쳐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꿈꾸고 있다고.

평화를 위한 행동은 그리 어렵지 않다네, 로돈. 그저 서로의 갈등을 줄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호드를 위해 싸우고 있지만 여전히 자네는 평화를 위한 행동을 할 수 있어. 이 의뢰를 거절한다고 해도 말일세. 부디 복잡한 고민에 갇혀서 스스로를 무력하게 만들지 말게나.

우린 다시 빛 아래 하나로 뭉칠것이니.




편지의 맨 밑에 대영주의 서명이 적혀 있었다. 로돈은 숙연하게 편지를 다시 돌돌 말았다.

"갈등을 줄인다라... 내가 너무 안일했군."

로돈은 편지를 직원에게 돌려주고 결심에 선 듯 말했다.

"하겠습니다. 제가 그들을 구출하러 가도록 하죠!"

로돈의 표정이 한 층 밝아진 게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덩달아 웃으면서 추가적으로 몇 가지를 알려주었다.

"그럼 추가 임무를 드릴 수있겠네요. 거절하면 어쩌나 했는데."

"추가 임무요?"

그녀는 임무가 적힌 종이를 꺼내들었다.

"노스렌드의 북풍의 땅 지역의 타운카 부족을 찾아가셔야 해요. 호드 가입 및 보급 계약이 만료된 상태라 갱신이 필요하거든요."

"그쯤이야, 익숙하죠."

로돈은 임무 보고서 양식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목례를 한 다음 의뢰소를 나가려는데 직원이 그를 붙잡았다.

"아 그리고 마지막!"

"네?"

"이번 임무에 동료 한 분이 더 붙을거예요. 한 둘이 실종된 게 아니라 역시 개인을 보내면 위험할 것 같아서요."

"동료... 라니요?"

"실례합니다."

기막힌 타이밍으로 누군가가 의뢰소 안으로 들어왔다. 혈기사단의 징표가 그려진 판금 갑옷을 입고 포니테일을 한 금발의 여성 블러드 엘프였다.

"...블러드 엘프?"

혈기사와 눈이 마주친 로돈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그녀가 들어온 시점부터 의뢰소 안의 분위기가 싸해지고 있었다. 사실 의뢰소 안에 있는 3명 중에서 제일 불편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는 자는 로돈 밖에 없었지만. 혈기사는 무표정으로 로돈을 한번 짧게 흘겨보더니 그대로 의뢰소 직원에게 다가갔다.

"이 분인가요?"

"네, 맞아요. 로돈 씨라고해요."

직원은 씨익 웃으면서 로돈 쪽으로 손짓을 했다. 로돈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못했지만 어쨌든 먼저 손을 내밀었다.

"태양길잡이 소속의 로돈이라고 합니다."

"레아나예요."

한 쪽은 매우 떨떠름하게, 그리고 한쪽은 정말 아무 감정도 관심도 없다는 듯이 서로의 손을 부여잡고 악수를 했다. 분위기가 괜히 더 싸해지는 것 같다.

"대영주께서 가장 신뢰하시는 성기사라고 들었는데, 실망스럽지는 않네요. 뭐, 딱히 기대를 한 것도 아니었지만."

"아, 네..."

로돈의 신경을 긁는 말투와 목소리였지만 애써 참으려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럼 얼굴 확인도 했으니, 내일 노스렌드로 갈 때 다시 뵈요."

"그럽시다."

레아나는 끝까지 조금의 표정 변화없이 유유히 의뢰소를 나갔다. 그녀가 나가자마자 로돈은 의뢰소 탁자를 쾅! 치면서 외쳤다. 직원은 방심하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왜 하필 블러드 엘프입니까? 예? 왜요? 호드에 지금 그렇게도 인재가 모자란 실정입니까?"

"아니, 그게... 일단 진정하세요."

"진정하게 생겼냐고요! 당신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블러드 엘프들이 어떤 족속인지!"

"로돈 씨, 저는 의뢰를 중간에 중개할 뿐이예요. 이건 다 의뢰인 측에서 결정한 사안이라..."

"그럼 동료 얘기는 제일 먼저 해주셔야지요! 노스렌드에 있는 내내 같이 있어야 할 동료가 블러드 엘프였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전 절대로 수락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 아무리 대영주 님의 요청이라고 해도요. 암요!"

직원은 심히 당황했다. 고고하다는 성기사가 이토록 흥분한 건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기도 하고 그게 로돈이라는 사실이 믿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그녀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그녀는 침착하게 로돈을 설득했다.
 

 "하아, 로돈 씨. 이 임무는 의뢰인이 먼저 레아나 씨에게 임무를 부여하시고 같이 할 동료로 로돈 씨를 추천하셔서 레아나 씨가 오그리마로 오신거예요. 그 노고가 지금 무시되는게 옳다고 생각하세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게다가 저는 중개인일 뿐이예요. 문제가 있다면 제가 아니라 의뢰인하고 상의해야 할 부분이라구요."

  로돈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대영주 또한 충분히 알고 있었다. 로돈이 블러드 엘프를 언더시티의 악취보다 훨씬 더 싫어한다는 것을.

사실 블러드 엘프는 호드 내에서도 그리 좋지 않은 취급을 받고 있었다. 굉장히 이기적이고 오만하며 허영심이 강하고 자신과 다른 모든 것들을 무시하고 천시하는 것까지. 다른 이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오직 자신과 자기 종족만이 전부이고 최고라고 생각하는 족속들이라 알려져 있었다.

단지 알려져 있다는 정도라면 인식을 바꿀 수 있는 조금의 기회라도 있었지만, 블러드 엘프와 '어쩔 수 없이' 동행하게 된 모험가들만큼 그들의 실체를 잘 아는 자들은 없다. 로돈도 그 중 하나였다. 특히 장가르 습지대의 포자 동굴이나 스컬지의 저주를 받은 생명체가 살고 있는 무덤 같은 사지를 함께 탐험할때는 스트레스가 2~3배는 쌓였다. 당장 공격을 해야하는 상황에 자기 옷을 먼저 챙긴다던지, 별로 걷지도 않았는데 다리 아프다며 징징거린다던지, 기껏 여러공격에서 지켜주면서 고마워하기는 커녕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라던지. 블러드 엘프를 싫어해야하는 이유라면 정말 차고 넘쳤다. 그것은 아마 로돈 뿐만 아니라 같은 호드인 오크나 트롤, 고블린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로돈은 스스로를 애써 억누르고 이어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 대영주 께서는 내가 블러드 엘프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블러드 엘프와 같이 행동하도록 하신 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겠지. 참자... 참는거다... '

마음의 결정을 내린 로돈은 단호하게 직원을 향해 쏘아붙였다.

"좋습니다. 하겠다고 한 이상 성실히 임해야겠지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앞으로 동료가 붙을 임무라면 무조건 누군지부터 먼저 알려주셔야 하고 그게 블러드 엘프라면 저는 무조건적으로 거절하겠습니다. 설사 대영주 님이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지신다 해도 말이죠. 알겠습니까?"

"아, 알겠습니다. 당연하죠."

  대답을 여러번 확실하게 들어두고 나서야 로돈은 의뢰소를 나올 수 있었다. 당장 블러드 엘프와 함께 다니는 것도 골치 아프지만 당장 줄드락의 임무에 좀 더 집중하기로 했다. 

 

 로돈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실종되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몇년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리치 왕이 노스렌드에서 영향을 행사하고있다 하기는 무리가 있다.

 
그는 예전에 부서진 섬을 탐험할 때 죽음의 기사들을 만난 적이 있었다. 리치 왕에게 힘을 부여받고 그 힘으로 리치 왕과 맞섰던 자들. 그들에게서 가히 믿지 못할 이야기를 들었는데 바로 분노의 관문에서 전사했다고 알려진 볼바르 폴드라곤 경께서 다음 리치 왕이 되셨다고 했다. 그 분께서는 칠흑의 기사단과 계약을 맺어 아제로스 전역의 잔존 스컬지들을 흡수하여 군단과의 전투에 전력을 다하기로 했고, 이어 새로운 4인 기사단을 창설했는데 그 중에서는 판다리아에 있었던 내내 충돌이 잦았던 나즈그림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니, 로돈은 정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밖에 납득하지 못할 이야기가 많았지만 당장 그 곳에서도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지 못할 일들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의심은 일단 접어두기로 했다.

어쨌든 그 죽음의 기사가 했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당장 스컬지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럼 그들은 왜 실종당한 것인가? 스컬지가 아닌 다른 세력인가? 아님 스컬지들이 기어코 리치 왕의 통제에서 벗어난건가? 가능하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통제에 벗어난 스컬지들에게 습격을 받지 않았다면, 몇 년을 파견 나갔던 성기사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귀환 명령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을테니까.

역시 확신을 얻으려면 직접 줄드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골치 아픈 블러드 엘프를 데리고... 로돈의 심정이 착잡해졌다.

"하아, 안쉬여. 어찌 제게 이런 시련을..."

로돈은 탄식하듯 짧게 기도를 올리고 어둠의 틈 밖을 나왔는데 주변에서 들리는 소란이 아까와는 좀 달랐다.

"뭐지?"

관중들이 한 구역을 둥그렇게 애워싸고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로돈은 관중 속을 비집고 들어가 상황을 보고자 했다.

"역겨운 엘프 같으니!"

"네녀석이 왜 여기 있는거냐!"

로돈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까 의뢰소에서 만났던 레아나가 홀로 관중에게 둘러쌓인 상태로 던진 달걀과 토마토를 맞고 있었다. 물론 거기의 모든 관중이 그녀에게 욕을 하고 있는 게 아니고 두 세명의 오크들이 하고 있긴 하지만 그 누구도 말리지 않고 있었다. 몇몇은 오히려 레아나를 경멸의 눈으로 쳐다보고있었다.

"거기 엘프! 너 얼라이언스의 첩자 아니냐? 너와 네 종족들이 우리 호드를 위해 한 게 뭐가 있지?"

"따지고보면 트롤한테서 나온 녀석들이 뭐가 고상한 척 해대는 것이냐!"

"꼴도 보기 싫다! 당장 꺼져!"

오크들은 계속 모욕을 뱉으면서도 레아나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과 옷이 더러워지고 냄새가 나도 닦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크들이 계속 달걀과 토마토를 던지다 기어코 길바닥의 돌맹이를 집어들어 던지고 말았다. 돌맹이는 빠른 속도로 포물선을 그리며 레아나의 머리 위로 떨어졌지만, 돌이 머리에 박히는 소리가 아닌 단단한 철판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멈추시오!"

우렁차게 울리는 목소리에 레아나는 자신의 앞에 드리운 그림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일말의 표정 변화도 없던 그녀의 두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지금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 분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런 수모를 당해야하는거요?"

로돈은 방패로 그녀를 가리면서 소리쳤다. 오크들은 소리쳤다.

"타우렌이 끼어들 일이 아니다. 당장 비켜!"

"아니, 난 알아야겠소. 이유가 타당하다고 느끼기 전까지 난 절대 비키지 않을 것이오!"

오크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분명 단순히 블러드 엘프를 싫어하는 사적인 감정으로 시작했을 일이 뻔했다. 그냥 한번 걸어본 시비를 묵묵히 받아주니 이어계속해서 모욕을 뱉다 주변 관중들의 관심을 받았고 지금 이 상황이 만들어진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오크들 또한 흥분했는지 강경하게 나왔다.

"한번 해보자는거냐, 소대가리?"

"대체 왜 그 녀석을 감싸주는거지? 여자친구라도 되시나? 크하하하!"

그 말을 들은 로돈은 방패로 레아나를 감싸면서 허리춤의 둔기를 집었다. 방패에 비해 한없이 작은 둔기였지만 로돈은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곧바로 로돈의 둔기는 태양빛을 흡수하여 밝게 빛이 나기 시작했고 그것이 관중들의 시선을 빼앗을 찰나에 곧바로 땅바닥에 내리쳤다.

콰앙! 하고 울리는 굉음과 함께 빛이 로돈과 레아나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이어 로돈과 레아나가 서 있는 땅이 태양빛을 받고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굉음만으로도 모두를 압도하기엔 충분했다. 로돈은 둔기를 오크들에게 겨누면서 소리쳤다.

"이 자는 나와 같이 신성한 빛의 힘으로 여기 모두를 지킬 의무를 지닌 성기사이자, 앞으로 일어날 전쟁에서 호드를 위해 헌신할 임무를 받은 동료다! 네놈들의 사적인 감정에 이런 모욕을 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그런 이유만으로 다른 종족을 매도한다면 너희들이 가로쉬와 다를 게 뭐가 있지? 명예를 중시한다던 네놈들의 행동은 전혀 명예롭지 못하다!"

그러자 시비를 걸던 오크들도, 주변에서 경멸의 시선으로 구경하던 관중들마저 얼이 빠진 듯 했다. 레아나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로돈만 바라보고 있었다.

"에,에잇! 더러워서 진짜..."

"거기 엘프! 운 좋은 줄 알아라."

오크들은 끝까지 사과는 한 마디도 안하고 적반하장 식으로 응수하더니 관중들 사이로 빠져나갔다. 관중들도 조금씩 웅성거리다가 이내 하나 둘 해산하기 시작했다.

거의 대부분의 관중들이 빠지자 로돈은 방패를 치웠고, 그제야 레아나는 얼굴과 옷에 묻은 얼룩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친데는..."

레아나는 로돈이 손을 내밀려고 하자 툭 치면서 말했다.

"참 대단하시네요. 이런 보여주기식 연기라니. 정말 잘 먹혀들어간 것 같아요. 안 그래요?"

로돈의 이마에 핏대가 쭉 올라왔다.

"지금, 뭐라고...?"

"됐고, 앞으로 이런 지나친 관심은 사양하겠어요. 어디까지나 이번 임무만 동행하는 사이니까. 알겠어요?"

레아나는 고맙다는 인사 없이 그대로 가던 길을 갔다. 레아나에게 생겼던 조금의 연민과 동정심이 순식간에 증발하자 로돈은 어이없고 당황스러워서 주먹을 꽉 쥐고 그 자리에서 한참을 부들거렸다.

그날 밤

"크하하하, 오늘 일어난 소동이 바로 자네 때문이었구만!"

"그렇게 웃어넘길 일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데즈코 씨. 그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짜증이 솟구친단 말입니다."

밤이 깊어지고 오그리마의 어느 선술집에서, 로돈과 데즈코는 한창 오늘 일어난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확실히 블러드 엘프들은 남을 배려하는 행동이 많이 서투르긴 하지."

"많이 서투른 게 아니라 아예 그런 개념이 없는 것 같아요! 어찌 그렇게 이기적이고 오만한지. 지금까지 정말 제대로 됨됨이가 박혀있는 블러드 엘프는 리아드린 님과 대영주 님 빼고는 본 적이 없단 말입니다!"

데즈코는 로돈의 투정을 전부 들어주면서 맥주를 연거푸 들이마셨다. 계속된 수다로 로돈의 화가 좀 풀린 듯 하자 데즈코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대영주께서 왜 자네 곁에 굳이 그 혈기사 친구를 붙여두셨는지 이해가 갈 것 같군."

"무슨 말입니까?"

"자네가 평생을 바쳐서 이루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데즈코가 취했다고 생각한 로돈은 대충 대답하려다가 혹시 몰라서 제대로 된 대답을 했다.

"당연히 평화죠. 전쟁도 없고 상처도 없는."

"전쟁이 없는 평화라... 그럼 당장 얼라이언스와의 전쟁부터 멈추고 싶겠군. 안 그런가?"

"너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전쟁으로 일어나는 피해가 얼마나 큰데 어찌..."

"그 전에, 우리 호드는 평화롭다고 할 수 있는가?"

데즈코는 로돈의 말을 끊고 갑자기 훅 들어왔다. 로돈은 순간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당연히 아닐거야. 오늘 그 혈기사 친구에게 일어난 일만 해도 평화와는 거리가 멀고 멀지. 당장의 감정이 앞서서 모욕을 쏟아내면, 그것이 갈등을 일으키고 커지면 전쟁이 되는 법이라네. 넓게 본다면, 얼라이언스와의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경위도 이와 많이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후후,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았나?"


   데즈코는 로돈의 빈 술잔에 맥주를 가득히 따라 부었다.

"자네는 너무 멀리 있는 산을 보고 있어. 아직 숲을 벗어나기는 커녕 나무 한 그루에서 맴돌고 있는데 말일세. 자네가 진정으로 평화를 원한다면 당장 자네가 해결할 수 있는 갈등부터 찾는게 가장 올바른 게야."

"그러니까 그게 블러드 엘프들인거구요. 맞죠?"

"그렇지! 이제야 이해가 가는가? 하하하하."

데즈코는 로돈의 술잔에 혼자 팔을 내밀어 건배를 하고 들이마셨다. 로돈은 여전히 탐탁치 않은 표정이었다.

그렇게 데즈코와 헤어지고 여관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취한 로돈은 계속 비틀거렸다. 여전히 자신의 놓치고 있는 것들이 신경쓰였다. 평화를 위한다면서 정작 같은 호드 내에서 필요한 평화는 찾지 못했다. 오늘 있었던 것만 해도 블러드 엘프는 어쩌면 로돈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탄압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게 너무 없었다. 블러드 엘프를 싫어할 줄 알지, 그들을 이해하는 방법은 모르고 있었다.

'제가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안쉬여... 늦은 밤이라서 제 목소리가 닿질 않을 것 같군요...'

노스렌드로 출항하는 비행선은 내일 오후였다. 내일 다시 만난다면 좀 자세하게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블러드 엘프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지 않을까. 로돈은 겨우 여관에 도착해서 곧바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없다고요?"

  "에... 최근에 여기 묵었던 투숙객 중에서 블러드 엘프는 없습니다만?"


  "그럴리가..."

여관주인은 장부를 확인하면서 대답했다. 로돈은 어이가 없었다. 분명 노스렌드로 가는 날에 만나자고 먼저 약속했던 아가씨가 애초에 여관에 머물지 않았다고?

"혹시 오그리마 내에 여기 말고 다른 여관은 없습니까?"

여관주인은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흐음, 저기 골짜기 쪽에 고블린들이 사는 쪽으로 가보쇼. 대부분 여기 아니면 거기 묵을진데."

"알겠습니다."

로돈은 숙박비를 내고 여관을 나와서 고블린들이 모여 사는 정기의 골짜기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른 아침부터 요상한 음악소리가 들려오자 거의 다다랐음을 확신했다.

아니나 다를까 고블린들이 이른 아침부터 술과 음식을 먹고 강물에서 뛰놀고 있었다. 그 사이를 거닐자 여러 고블린들이 로돈에게 치근덕대기 시작했다.

"여, 타우렌 친구! 에일 맥주가 세일이야. 한 잔 받아보라고!"

"여기왔으면 잠시 쉬다가야지! 내가 싸게 해줄게. 응응?"

"죄송합니다. 좀 지나가겠습니다."

로돈은 정중히 거절하고 골짜기를 두리번거리며 레아나를 찾았다. 한참을 고블린들 사이를 거닐다 문득 유독 큰 파라솔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고블린이 한 5명은 들어가도 자리가 남을 정도로 큰 파라솔이었다. 혹시나 해서 가보니... 웬 블러드 엘프가 선글라스를 끼고 비키니 차림으로 파라솔 아래 누워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옆에 고블린들이 서비스해주고 있는 건 덤이다.

로돈이 성큼성큼 다가가서 도끼눈으로 노려보자 시선이 느껴진 레아나는 선글라스를 아래로 살짝 내리고 로돈을 바라보았다. 누군지 못 알아보고 잠시동안...

"...아! 어제 그 타우렌 씨. 여긴 어쩐 일이세요?"

"그쪽이야 말로 여기서 뭐하고 있는 겁니까? 곧 노스렌드로 가는 비행선이 오는데."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됬나... 알겠어요. 하암, 조금만 더 쉬고..."

레아나는 그대로 다시 선글라스를 쓴 다음 양 손으로 머리를 받치며 누웠다. 로돈은 다신 느끼지 않을 줄 알았던 절망감을 맛보았다.

"아, 안쉬여..."

아무래도 로돈은 아직 블러드 엘프를 이해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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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개운하다."

레아나는 일광욕을 마치고 샤워까지 말끔하게 한 다음 갑옷을 챙겨입고 나왔다. 물론 로돈은 그 동안 계속 발을 구르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도 기다리고 계셨네요? 비행장에 먼저 가 있으시라니까."

"아뇨. 차라리 이러는 편이 더 나았을 것 같아서요."

로돈은 레아나를 내려보면서 말했다. 그녀는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럼 가죠."

둘은 나란히 비행장으로 향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도 오그리마는 어제만큼이나 많은 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블러드 엘프한테 대놓고 시비를 거는 놈들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길 위에서 로돈은 사이가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레아나는 별 개의치 않은 듯 했다. 그는 어제 데즈코와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레아나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크흠, 레아나... 씨? 뭐 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뭔데요?"

"왜 여관에 안 묵고 고블린들 사이에 껴 계셨습니까?"

"그게 왜 궁금해요?"

레아나는 대답 대신 말대꾸를 했다. 로돈은 곁눈질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그리고는 일부러 빈정거리는 말투로 대답했다.

"아니, 제가 먼저 물어봤잖습니까. 대답하는게 그렇게 힘든 것도 아니고. 게다가 제가 아는 블러드 엘프들은 고블린들 근처에도 안 가서 말이죠."

"어제 저한테 일어난 것만 봐도 딱히 대답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요? 직접 두 눈으로 봤잖아요. 여기의 모두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로돈은 어느 정도 납득했지만 레아나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어떻게든 그녀의 신경을 긁으려고 애를 썼다.

"허, 저라면 뻔뻔하게라도 그 오크들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것 같습니다만? 냄새나는 고블린들 사이에서 하룻밤을 보낼 바에 말이죠."

"그거야말로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 말씀이네요."

"네?"

"대체 어디서 그런 소문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밖에서 화약 만지고 진흙탕에서 구르는 고블린들이면 모를까. 이런 대도시 안에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고블린이 아제로스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청결한 법이죠. 청결하지 못하면 누가 그 고블린의 서비스를 받고 돈을 주고 싶겠어요? 게다가 받는 돈만큼 최고의 서비스를 해주는 종족도 고블린 밖에 없는데."

레아나는 너무나 잘 안다는 듯이 대답했다. 로돈은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아, 그렇습니까? 그것까진 제가 잘 몰랐..."

"그쪽은 블러드 엘프부터 이젠 고블린까지 차별하시나봐요. 그렇게 냄새 타령 하실거면 트롤 냄새는 대체 어떻게 참으셨을까? 아하하하!"

레아나는 비꼬는 듯한 말투로 로돈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이고는 가뿐히 그를 앞서갔다. 로돈은 완전히 벌레 씹은 얼굴을 하고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둘은 승강기를 타고 오그리마 절벽 정상으로 올라갔다. 수 많은 병사들과 모험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둘은 정신없는 틈을 비집고 노스렌드로 가는 비행장으로 올라갔다.

"흐음, 간신히 시간 내에 도착한 것 같군요."

"그러게요. 이렇게 서 있을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쉴 수도 있었는데. 누구 때문인지..."

레아나가 팔짱을 끼고 하는 말 한마디마다 로돈의 속을 벅벅 긁었다. 애초에 씻고 옷 입는다고 하는 시간만 더 줄였다면 훨씬 더 먼저 와서 기다릴 수 있었을텐데. 레아나는 잘 모르겠지만 항상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있던 로돈은 지금 굉장히 시간에 쫒겨 온 것이다.

괜한 말싸움을 하면 자기가 제일 지친다는 걸 아는 로돈은 다른 급히 화제를 돌렸다.

"크흠, 그나저나 노스렌드에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전 이번이 두번째 여행입니다만?"

"흐음, 저도 두번째지만 한번은 꽤 오래 머물렀던 편이죠. 아마 지금까지 한 고생 중에서 두 세번째로 제일 힘들었던 것 같네요."

"아, 그렇습니까?"

로돈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고생을 했다면 얼마나 했다고 저런 말을 할까 하는 심정이었다.

"저기 오는군요."

저 멀리서 비행선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는 속도가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로돈과 레아나 앞에 멈춰섰다. 비행선이 정착하자마자 고블린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안녕하신가 친구들, 노스렌드로 가고 싶다면 빨리 올라오라구!"

"그럼 가시죠."

로돈이 비행선에 발을 디디자 고블린이 갑자기 로돈 옆에 착 붙어서 말을 건넸다.

"이봐 타우렌 친구, 원래 비행선 운영은 오그리마에서 전액 지원해주기 때문에 와아아아안전 무료라구. 알고 있지?"

"아, 네 물론이죠."

"그.런.데!"

고블린은 손바닥을 척 내밀면서 자신있게 말했다.

"추가요금만 지불하면 '특급 1등석'에 모셔줄 수 있어! 그리 안 비싸! 단돈 1골드면 충분하지!"

고블린의 당당한 태도가 오히려 더 의심스러운 로돈은 불안감이 들어서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 괜찮습니다. 저는 그냥..."

"1등석? 그것도 특급?"

근데 그 말에 레아나가 혹하고 말았다. 그녀의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래, '특급 1등석!' 관심 있나?"

로돈의 예상 밖이었다. 레아나는 자기 가방에서 1골드짜리 금화를 튕겨 고블린에게 건넸고 고블린은 그걸 좋다고 넙죽받았다.

"그럼 어디 그 자랑하는 '특급 1등석' 구경 한번 해볼까요?"

"아 물론! 자 자, 이리로 오라구."

"저기... 레아나?"

"걱정하지 마세요. 돈 아꼈다가 어쩌시려구요? 이럴때 미련없이 써주고 호사를 누리면 되는거예요. 알겠어요?"

레아나는 로돈을 뒤로 하고 가뿐히 고블린을 따라갔다. 로돈은 그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이 지켜볼 뿐이었다.

시간이 조금지나고 선장의 우렁찬 명령이 울렸다.

"그럼 출발! 노스렌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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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욱, 우웨엑!"

"괜찮으십니까?"

"마, 말 시키지마요... 우웨엑!"

노스렌드의 드라노쉬아르 비행장의 어느 구석진 곳에서 레아나는 무지개빛 토사물을 한껏 뿜어내고 있었고 로돈은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고 있었다.

"그러길래 누가 그런 말을 함부로 믿으라 했습니까?"

"으억, 솔직히... 누가... 알고 있었겠어요...? 그 1등석... 이라는게... 설마 비행선... 맨 꼭대기였을... 줄은... "

"그 고블린은 정작 제일 신났던 것 같습니다만?"

척 봐도 고블린이 운영하는 비행선에서 1등석의 기준은 고블린 기준으로 정해지는 건 당연했다. 누구는 멀미 때문에 죽도록 고생할 자리일지라도 누구는 제일 신나게 즐기면서 갈 수 있는 자리일테니. 암튼 로돈은 레아나가 고생하는 모습이 은근 쌤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힘드시면 먼저 요새 안의 여관에 가 계시는게 어떻습니까? 어차피 지금 오느라 밤이 다 되서 내일 이른 아침에 출발해야하니까요. 전 볼 일을 좀 보고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 알겠어요..."

거듭되는 구토로 인해 아까까지 윤기가 좔좔 흐르던 레아나의 얼굴이 금세 수척해지고 말았다. 그녀는 비틀비틀거리면서 요새 안쪽으로 들어갔고, 로돈은 그제서야 노스렌드에 왔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추위로군.'

로돈은 처음 노스렌드에 도착했을때가 떠올랐다. 스컬지에 잠식당한 네루비안들이 요새 앞마당을 습격해서 모든 병사들이 애를 먹었을 당시였다. 그땐 그 시체 거미들을 상대하는게 너무 막막했는데, 이제 와서는 너무 허전할 정도로 앞마당이 텅 비어버렸으니... 오히려 그래서 더 이상하게 느껴진다. 이정도로 지금 스컬지들이 약해져 있는 상태일텐데 대체 은빛십자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무슨 상황인지 알고 싶어서 보내는 전령들도 하나같이 실종되버린 상태니...

레아나가 있는 숙소로 가기 전에 로돈은 요새 전체를 한번 쭉 둘러보았다. 요새에 근무하는 병사들에게서 정보를 모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리치 왕을 상대할 땐 최전방에서 싸우던 병사들이 이젠 노스렌드의 물자를 오그리마로 보급하는 후발대로 전락해버렸으니, 그 용맹하던 호드의 전사들도 이곳에선 하나같이 나약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별다른 정보 없이 근황만 반복해서 듣던 도중 의무장교의 직책을 맡고 있는 노쇠한 트롤 주술사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리치 왕의 통제에서 벗어난 스컬지? 확실히 그들은 무서운 존재일세. 어느 죽음의 기사가 일러주길, 리치 왕이 그들을 통제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불타는 군단의 편이 되었을거라 하더군. 생각만해도 끔찍하다네."

"그럼 통제 받지 않은 자들이 존재할거라고 생각됩니까?"

"흐음, 예외란 있는 법이지. 정령들이 분노로 미쳐 날뛰기 전까지 그 누가 눈치를 챘겠나. 필멸자들을 위해 산과 강을 만들어 자비를 베풀어주시던 넬타리온께서 데스윙이 되어 나타나기도 했으니... 다만 자네 말대로 그렇게 단순히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네."

"왜 그렇죠?"

"지배받지 않는 스컬지들은 무조건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네. 분노, 파괴... 그들 안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들이지. 한둘이면 모를까, 수백 수천마리의 스컬지들이 휩쓸고 지나가게 된 자리에 남는 것이 뭐가 있겠나? 또한 그런 상태라면 어떤 형태로라도 지금쯤이면 소식이 닿았을걸세."

"그렇다는 것은..."

"통제를 받지 않는 스컬지는 존재하지 않네. 다만 리치 왕이 아닌 다른 존재에게 받고 있는 것이면 모를까... 최소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자들 보단 의식이 있고 생각이 있는 누군가겠지. 적어도 내 생각은 그렇다네."

주술사와 헤어지고 로돈은 생각을 정리했다. 가능성이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졌다. 정말 그 누구에게도 통제 받지 않는 수백마리의 스컬지들이 줄드락을 습격하여 은빛십자군은 물론 그들에게 귀환 명령을 전하러 간 전령과 얼라이언스 조사 단원까지 전부 죽임을 당했거나, 아니면 리치 왕이 아닌 다른 누군가 스컬지를 이용하여 줄드락의 안팎을 차단한 상태이거나. 그 두 가지 가능성만이 지금 놓여진 상황을 납득시킬 수 있었다. 근데 생각해보면 두 가지 전부 최악의 상황이었다.

전자의 경우에는 시신을 수습한다고 확정짓는다면 여유를 둬도 된다. 하지만 만약 후자라면 최소 한 두명의 생존자는 줄드락에서 고립되어있다고 봐야했기에, 로돈은 차마 그들이 죽었다고 쉽게 단정지을 수 없었다. 어차피 최대한 빠르게 줄드락으로 가야하는 건 마찬가지. 후자의 가능성에 좀 더 무게를 싣는다고 해도 전자의 임무가 변하는 것은 아니라 판단되었다. 그렇기에 로돈은 급히 노스렌드 지도를 보고 동선을 파악한 다음 시간을 계산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타운카르 마을을 거쳐서 줄드락으로 가려면 1분 1초가 급했다.

로돈은 한숨을 푹 쉬며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기도를 올렸다.

"안쉬여, 죽음은 그대의 태양빛 아래 무력할지니..."



1시간 후, 로돈은 평복 차림의 레아나와 마주쳤다.

"예? 곧바로 떠난다구요? 아까는 분명 내일 아침에 출발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당장 우리 구조를 기다리고 있을진데 조금이라도 지체할 순 없잖습니까."

레아나는 팔짱을 끼고 얼굴을 가득 찡그렸다.

"아니, 그래도 저녁은 먹고 가야되는거 아닌가요? 여기서 타운카 부족이 있는 곳까지 얼마나 걸리는데, 가면서 쫄쫄 굶을 생각인거예요?"

"그러길래 누가 그렇게 무리해서 속을 다 게워내라고 했습니까? 어쨌든 움직여야 하니 짐 다 챙겨오세요. 출입구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하... 알겠어요."

레아나는 투덜거리면서 여관 쪽으로 돌아갔다. 로돈은 코웃음을 치면서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고보니... 원래 저런 성격이었던가?'

첫 만남은 거의 얼음 방패마냥 차가운 느낌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행동이 로돈에게는 살갑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사실 로돈은 블러드 엘프가 하는 행동을 최대한 이해하려 노력하는 중이다. 자기 성격에 안 맞고 협조를 제대로 안해주는 모습에는 여전히 언짢게 느껴지지만,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 주먹이 날리지 않는 것이 어디인가.

10분 정도 지나자 갑옷 차림의 레아나가 출구 쪽으로 나왔다.

"가시죠. 급하다면서요."

그녀가 걸을때마다 허리춤의 작은 상자가 매달린채로 흔들렸다.

"그 상자는 뭡니까?"

"네?"

로돈이 레아나의 허리를 가리키자 레아나는 상체를 숙였다.

"어머, 이게..."

레아나는 곧바로 상자를 허리에서 떼내어 가방에 넣었고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큰일 날 뻔했네."

그렇게 말할뿐이었다. 상자에 대해서 아무 설명도 없이. 로돈은 대충 말하기 싫은 이유가 있거나 아니면 귀찮아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걸었다. 지금이 새벽쯤 됬으니 타운카르 마을에 도착하면 이른 아침일 듯 했다.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로돈은 어느 정도 추위와 허기를 견딜 수 있는 듯 했지만 레아나는 그렇지 못했다. 역시 아까 오후에 했던 구토가 문제였다.

"으드드드...추워... 배고파..."

"참으셔야 합니다. 이제 반 정도 왔..."

"앞으로 반이나 더 걸어가야 한다고요? 그냥 여기서 얼어죽는게 훨씬 더 낫겠네요!"

레아나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로돈은 어쩔 수 없다는 눈빛을 보냈지만 솔직히 본인도 지치긴 매한가지였다.

"아, 안되겠군요. 잠시 쉴 곳을 찾아야겠습니다."

"잠깐..."

레아나가 잠시 로돈의 앞길을 팔로 막았다. 그녀의 눈빛이 조금 이상했다. 먹잇감을 확실하게 찾은 듯한 매의 눈빛...

"로돈, 저기 보여요?"

레아나는 저 멀리 꿈틀대는 무언가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로돈이 손벽을 이마에 붙이고 확인해보니 그녀가 가리키는 건 엄청난 털복숭이에 매우 커다란 엄니를 가진...

"매머드?"

"시선 좀 끌어줘요."

"네?"

로돈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레아나는 앞으로 달려갔다. 방금까지 지쳐서 툭 건들면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고는 전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힘차게.

"으랴아압!"

이어 레아나는 엄청난 고함으로 매머드를 도발했다. 뭣도 모르고 도발에 이끌린 매머드는 그대로 그녀에게 돌진해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매머드의 크기가 기하급수적으로 커져갔다.

매머드가 압도적인 크기로 커지면서 달려오는데 어째서인지 레아나는 진작에 로돈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당연히 분노에 차서 앞으로만 달리는 매머드의 앞에는 로돈만이 남게 되었다.

"이, 이런...!"

로돈은 황급히 방패를 꺼내들었다. 겨우 전신을 가린 찰나에 매머드가 방패에 부딪혔다. 조금만 늦었어도 로돈이 방패 신세가 되었을 정도로 굉장히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매머드는 쉬익쉬익 입김을 내면서 계속 로돈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힘이라면 둘째가 서러운 로돈조차 겨우 버티는 정도였다. 로돈이 레아나의 존재를 급하게 찾을 즈음에 위쪽에서 기쁨에 가득찬 함성이 들렸다.

"오.늘. 저.녁.은...!"

레아나가 거대한 도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면서 떨어지고 있었다.

"매머드 파티다!!"

콰앙! 하는소리와 함께 레아나의 도검이 매머드의 몸통을 반으로 갈랐다. 주변의 눈먼지들이 잦아들고 나서야 로돈은 방패를 치우고 넋이 나간 채로 두동강으로 시체가 된 매머드와 레아나를 바라보았다.

"빛이여, 이 불쌍한 생명을 인도하시길..."

짧은 기도를 마치자 레아나는 바로 태연하게 고기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로돈,어디 불 좀 지펴주세요. 이 녀석 다 먹고 갈테니까."

"자, 잠시만요."

"네?"




"으음, 맛있어!"

"천천히 드세요. 양은 많으니까."

레아나는 스테이크를 한 움큼씩 잘라서 계속 입에 넣었다. 갓 잡은 매머드의 신선한 고기, 멀고어의 싱싱한 야채, 그 밖의 특제 향신료와 양념장, 그리고 일류 요리사의 솜씨까지. 모든게 로돈에게 갖춰져 있었다. 또한 항상 기본적인 식기 또한 가지고 있어서 먹는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로돈은 스테이크가 구워지는 동안 남는 부위를 해체하여 잘게 다지고 향신료와 주변에 쌓인 눈을 넣어서 스튜로 끓이기 시작했다. 고소하고 풍미 가득한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스튜는 이따 야식으로 먹고 남은 고기는 따로 챙겨야겠습니다. 이놈을 다 먹어치우려면 여기서 야영을 할 수밖에 없겠군요."

"음, 찬성!"

레아나는 고기를 입 안에 가득 머금은 채 손을 번쩍 들었다. 그나저나 레아나는 먹는 양이며 속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블러드 엘프들이 먹는 식사량을 한참 뛰어넘는 것 같았다. 이러다 마치 로돈이 먹으려고 남겨놓은 것 까지 전부 먹어치울 기세였다.

"그나저나, 이런데 피 냄새 풍기게 내버려두면 늑대들이 몰려오지 않겠습니까?"

"아 그건, 걱정 안해도 되요."

"네?"

"여기 노스렌드 지방의 늑대들은 낮에만 다니거든요. 털 색깔이 밝다보니까 밤에 돌아다니면 천적들의 눈에 쉽게 띄니까요."

"천적들이요?"

"뭐, 마그나타우르라던지. 얼음 트롤들이라던지. 아니면 우리라던지."

레아나는 마지막 '우리' 라는 말과 함께 살이 반 정도 없어지고 뼈가 드러난 매머드를 가리켰다. 로돈은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허, 농담으로 하는 말이겠죠?"

"글쎄요? 하하하!"

레아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빠른 속도로 고기를 집어먹었다. 스튜가 거의 다 완성될 즈음에 레아나는 배를 만지고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아, 잘 먹었다."

로돈은 레아나가 참 특이하다는 듯, 한편으로는 잘 먹어줘서 흡족하게 듯이 바라보다 마저 통 안의 스튜를 젓고 있었다.

"고마워요."

"네?"

"고맙다구요. 밥 맛있게 해줘서."

로돈은 귀를 의심했다. 블러드 엘프한테 감사를 받다니. 생전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나...

"별 말씀을..."

"스튜 다 됐어요?"

"네, 거의 다... 또 드시려고요?"

"잘 먹었고 밥 맛있다고 했지, 배 부르다고 한 적은 없거든요?"

레아나는 냉큼 접시를 들고 스튜를 퍼서 담은 다음 호호 불며 입에 넣었다. 아직 뜨거웠다.

"아뜨뜨뜨... 맛있다..."

"거, 엄청 잘 드십니다?"

로돈은 이번에는 기다란 빵을 꺼내서 뚝 잘라 한 쪽을 레아나한테 건넸다. 그녀는 냉큼 받아들고 스튜에 찍어 먹으면서 대답했다.

"아직 멀었어요. 이정도로 먹고 다니지 않으면 앞으로 어떻게 버티고 살아요?"

"이미 충분히 많이 드셨잖습니까? 지금까지 먹은 것만 해도 저의 두 배는 되는 것 같습니다만?"

레아나는 어이가 없는지 코웃음을 치면서 말을 장황하게 이어갔다.

"모르시는 말씀. 가시덤불 골짜기에서 두 달을 표류한 적 있었는데 그 중에 거의 한 달은 근처의 랩터랑 퓨마 사냥하는데 쓰고 나머지 한달 중 보름 정도는 강물에서 살면서 물고기만 잡아먹고 살고 그랬다구요. 그렇게 죽을 고생을 하다 겨우 빠져나왔는데 웃긴 건 거기가 길을 잘못 들은 곳이라는거예요. 얼라이언스 눈을 겨우 피해서 빛의 성소로 도착하는데만 꼬박 반 년이 걸렸는데, 가는 길에 멧돼지랑 거미랑 랩터랑 그리핀이랑 올빼미야수 등등... 아마 제가 안 잡아먹는 애들 세는게 더 빠를지도 몰라요. 게다가 재수가 없는 날에는 근처에 약초랑 버섯을 무더기로 뜯어먹다가 사경을 헤맬 지경이었으니... 제가 지금까지 돌아다니고 살아남으려 발악하면서 느낀게 뭐냐면 바로 체력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고 그 체력을 얻으려면 무조건 죽기 살기로 먹고 봐야한다는거죠. 진짜예요!"

레아나의 너무나 당당한 수다에 로돈은 어이가 빠졌는지 스튜를 입에 가져가려는 채로 굳어버렸다. 다른 이들도 아니고 블러드 엘프한테서 저런 장황한 이야기가 나오다니...

"거 확실히, 당신은 제가 아는 블러드 엘프들과는 다르군요."

"감히 지금 누굴 누구랑 비교하는거죠? 앉아서 책만 읽고 마법 좀 쓴다는 쫌생이들하고는 수준 자체가 다르죠! 그런 놈들은 아마 사지에 떨어져서 배고프면 그냥 굶어죽겠다고 할 놈들인걸요."

레아나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자부심이 가득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서도 스튜에 계속 빵을 적셔서 먹고 있었다. 근데 로돈은 뭔가 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어째서 가시덤불 골짜기에서 표류를 하게 된겁니까? 일반적으로는 잘 가기 힘든 곳인데..."

"아 그건, 정말 운이 없던 사고였어요. 그냥 차원문 사고 정도로 생각해주세요. 이제와서 따져봤자 달라질 것도 없고..."

레아나는 한숨을 푹 쉬면서 말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그렇습니까...?"

레아나는 그저 정신없이 스튜를 떠먹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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