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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바람벽이 있어 by 백석

밴프국립공원c7645
2019-04-25 06:11:47 200 0 0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 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 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 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미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미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 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 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락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도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젠가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쯔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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