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멜_ 63위 0

사연게시판 제 인생의 교수님

zodlee92
2017-12-06 22:14:15 155 4 0

멜하! 오늘은 저희 학교 교수님 이야기를 해볼까 해요. 보통 대학교수는 엄근진이나 괴짜의 대명사인데, 이번에 제가 말하는 분은 엄근진은 날려버리셨지만, 완전 나이브한 괴짜십니다. 말씀하시는 어조가 이건 뭐 교수님이 아니라 썰 푸는 동네 할아버지 레벨이에요.

평소 무언가를 잘 외우시지 못하신다고 직접 말하시고, 엄격한 틀과 많은 정보량은 교수님 강의와 거리가 멀어요. 그냥 전공교재 내용의 맥만 대충 따라가는 강의를 하셨는데, 강의 와중에 교재의 사소한 단어를 가지고 유래를 십분 이상 풀이하시질 않나, 그 풀이를 하다가 점점 삼천포로 빠져서 각종 썰과 개드립을 시전하시곤 하시죠. (애초에 천성이 타인들을 힘들게 하는 걸 싫어하셔서 학기 중에 배울 내용을 적게 가져가서고 학생들의 부담을 최소한으로 줄이려고 노력하셨어요. 그래서 학생들도 한 학기에 책 한 편정도 적당히 배우는 게 다였죠)

드립력이 엄청 강하신 분이에요. 예시를 들자면

1) 수업 맨 앞줄에서 대놓고 스마트폰으로 쓸데없는 기사를 읽던 제 옆에 조용히 다가오셔선, ‘야~ 이눔 예쁜 여자 얼굴 보고 있네! 얘들아, 이 안에 예쁜 여자 있다!!’ 쿨럭;; 저는 당연히 뻘쭘해지고 학생들은 폭소... 하여튼 학생들이 딴짓을 해도 절대 혼내시지 않으세요.

2) 중딩 시절에 수학 수업에 계산을 모른다고 하셨다가 엄청 털렸대요. 그래서 수포자 루트를 타면서 공부를 아예 안하셨고 지금까지도 사칙연산을 잘 못하신대요(대학 들어가고 교수가 되신 건 다른 분야에 전문성이 엄청 뛰어나셔서).

3) 90년대에 유력 신문에 교양 칼럼을 몇 년 간 연재하셨고, 그렇게 적은 내용들을 책으로 편집해서 2000년쯤엔가 출간하셨어요. 조금 팔렸던 모양인데, 몇 년 전 봄 학과 답사 중에 동료 교수님이 후배들한테 이 교수님의 얼마나 대단하신지 소개하시는데, ‘애들아, 이분은 이런 책을 내셨다. 교수님, 그 책 인세도 나오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뒷짐을 지고 고개를 숙이며 모기같은 목소리로 답변하시면서 조용히 지나가시더군요. ‘그거 마누라 몰래 챙기고 있지.’ 평소에 반농담으로 사모님이 무섭고, 수십 년간 같이 산다는 게 참 징하다고 하시더라고요. 가장 안 믿기는 점은, 이제는 방에서 쫓아낸대요. 그래서 구석의 방에서 장판깔고 주무신다나.

4) 어느 날 수업에는 연애 얘기를 하시더군요. 어느 여학생에게 남친 있냐고 물어보자, 군대를 갔대요. 그러니 ‘군대를 가면 여자친구가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 말이 있다더라’하시고는, 남학생들에게 정말 그러냐고 물어보셨어요. 그날 저는 제 한마디가 좌중을 뒤집어놓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니 연애를 해봐야 그런걸 알죠!’

이거 외에도 트게더를 아무리 채워도 모자란 추억이 많아요. 그만큼 소탈헐랭하고 인품이 좋은데다가 공부가 싫다고 드립을 쳐도 사실은 학문이 높으셔서 내외적으로 존경을 많이 받으세요. 그 증거로, 이 글을 적는 지금은 교수님 정년퇴임식인데, 식장을 수백명의 사람들이 채우고 있어요. 가족, 교수진, 연구자, 대학원생, 학부생, 보통 사람 안 가리고.

지금 하는 얘기는 자신이 워낙 모자라고 뻘짓을 많이 해서 나가 죽으라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면서 젊은 시절을 보냈는데, 그러다 50대에 위암이 걸리셨대요. 이전에 들어서 알던 얘긴데 술을 엄청 마셔댄 대가였었고, 다른 교수님께 듣기로는 겉으론 낙천적이시지만 엄청 예민하시대요. 그래서 위의 절반을 도려내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으셨고, 5년간 통증에 시달리셨대요. 지금도 많이 먹으면 아프고, 술은 막걸리만 몇 잔사실 술을 너무 좋아하셔서 끊지는 못함. 저번에 뵀을 때는 결혼식에서 약주 한잔만 하고 오셨는데 엄청 힘들어하셨어요. 그렇게 생의 위기를 넘으시니 몸이 홀쭉해지고 뱃속이 깨끗해지셨대요. 위암 걸리기 이전보다 더 건강하게 사신다고 하고.

나이드신 지금까지도 악몽에 시달리는데, 수학 선생이 눈앞에 떡하니 앉아있대요. 그만큼 트라우마가 큰 것 같다나. 그만큼 젊은 날에 다 내려놓고 살았다고 회고하시는데 한마디, ‘그런 와중에 배우는 철학이 있더군요.’

지금 강연장은 폭소의 도가니에요. 어지간한 스탠드업 코미디언들을 뺨치는 만담에, 와중에 관련 인물들이 있다면 일어나서 인사를 시키시네요.

오늘 교수님이 교단을 떠나십니다. 이 순간에 2년 전의 여름이 생각나네요.

인사를 드리려고 찾아간다 연락을 드렸는데, 그날은 당신 어머님의 수술날이셨어요. 그래서 나중에 찾아갈까 했는데 이미 약속 잡은데다 그냥 단순한 허리 부상이니 그냥 병원으로 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때 병원에서 소아과 앞에서 자리를 잡고 시시껄렁한 얘기를 하는 도중에 졸으시다가 깨시고서 남긴 말은 제 평생에 못 잊습니다. ‘트수야, 인생 뭐 별거 없다. 그냥 눈 앞에 있는 한 잔의 술, 친구가 소중해. 그게 최고야. 다른 건 다 필요없어.’ 전 그날 살아있는 신선을 봤습니다. 최근에도 은퇴를 앞두시기에 집 근처로 찾아갔는데 그냥 공부하지 말고 놀면서 살래요. 당신이 그걸 깨닫는데 평생이 걸렸다는군요. 교수님 지론인듯해요.

지금 강연 마무리 하면서 하는 말이

‘하루를 즐겁고, 건강하게 몸 아프지 않고, 행복하게 남은 시간을 금쪽같이 살아야합니다.’

카라멜님, 너무 말이 길었네요. 죄송해요. 하지만 오늘 진심으로 존경하는 교수님을 떠나보내면서 감정이 참 묘합니다. 누군가에겐 소회를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교수님, 존경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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